떠나간 첫사랑 줄리와의 만남을 노래를 통해 추억하는 잭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리틀잭>. 유주연은 이번 시즌 처음으로 줄리 역에 합류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잭과 함께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길 꿈꿨던 줄리처럼, 유주연 역시 자신이 줄리로서 존재하는 모든 순간이 관객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무대에 선다.
2019년에 <리틀잭> 공연을 처음 본 후, ‘이 작품에 꼭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들었어요. <리틀잭>의 어떤 점이 그때 주연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나요?
그때도, 이번 시즌에도 잭 피셔 역을 맡고 있는 황민수 배우와 대학교 선후배 사이예요. 선배가 공연을 한다길래 어떤 작품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민수 선배가 땀과 눈물을, 모든 것을 쏟아내면서 노래를 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요. 작품 자체도 매력적이잖아요. 라이브 밴드가 있고, 밴드 멤버들도 작품의 일원이 돼서 함께 연기도 하고. 거기에 관객분들까지 다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이 공연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이번에 <리틀잭>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공연을 본 6년 전, 2019년이 제가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던 해였거든요. 배우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에 꼭 출연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품을 진짜로 다시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어요.
한 번 관람했던 공연을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보면,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하잖아요. 특히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줄리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작품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을 것 같아요. 줄리의 시선에서 바라본 <리틀잭>은 어떤 작품이던가요.
관객의 입장에서는 한 줄기의 큰 이야기를 보게 되잖아요. 잭이 줄리를 회상하면서 정말 공연 시간 내내 줄리 얘기만 하더라고요. (웃음) 저 사람이 저렇게 사랑하고, 저렇게 노래하는 줄리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사실 줄리가 등장하는 장면이 길지 않잖아요. 잭의 기억 속에서 장면 장면으로 등장하다 보니, 배우로서 그 감정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더라고요. 공연을 볼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줄리로서 무대에 서보니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무대 뒤에서 잭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나는 뭘 했지?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떠올리는 게 감정을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줄리를 잘 표현하기 위해 가장 많이 고민한 점은 무엇인가요.
줄리로서 감정을 전부 표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잭을 떠나는 줄리의 선택이 회피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거든요. 만약 줄리가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 말없이 잭을 떠나는 게 약간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줄리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생각이나 행동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을 거예요. 그러니 감정을 드러내는 것,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을 거고요. 심지어 줄리는 엄마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아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나로 인해 잭이 힘들어지는 게 두려웠을 거예요. 내가 힘들어 봤으니, 잭은 힘들지 않길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떠난 거죠. 줄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그가 그 순간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어요.
줄리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어요. 줄리에게 사진을 통해 기록한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요?
줄리에게 ’기록’이라는 건 자유롭지 못한 삶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생명력을 남길 수 있는 행위였을 거예요. ‘왜 사진을 찍게 되었을까?‘ 저도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사실 줄리의 진짜 첫 번째 피사체는 엄마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엄마는 떠났지만 그 순간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거고, 그때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엄마가 떠난 후에는 ‘인물 사진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로 포장하며 인물 사진을 안 찍었겠죠. 그래서, 그런 줄리가 우연히 만난 잭의 사진을 홀린 듯이 찍었다는 게 제게는 큰 의미로 다가와요. 잭을 처음 본 순간부터 줄리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피어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요.
줄리의 전사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네요.
인물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어요. 극 중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잠깐 등장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언제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녔을까, 왜 아빠를 두려워했을까 고민해 보기도 하고요. 줄리와 아버지와의 관계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화목한 가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모든 게 갑작스럽게 변했을 것 같아요.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내를 닮아 몸이 약한 딸에 대한 과보호로 이어져서 줄리가 억압 속에 살게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줄리도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알아서, 자신을 바라볼 때 떠나간 엄마를 떠올린다는 걸 알아서 크게 반항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줄리는 “이 비가 멈추고, 이 여름이 가도 언제나 너를 기억할게”라고 노래해요. 여름과 함께 이번 시즌 <리틀잭>도 끝이 날 텐데, 관객분들이 <리틀잭>의 유주연을 어떻게 기억해 주기를 바라나요.
‘유주연은 진짜 줄리였다.’ 그게 최고의 칭찬일 것 같아요. 제 공연을 보신 분들이 ‘유주연이 하는 줄리는 진짜 줄리였어, 보는 내내 줄리라고 생각하면서 봤어.’ 이렇게 기억해 주신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순간이 있었나요?
음…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 인생을 조금 더 겪어본 후에, 나중에 돌아보면 그런 순간이 생겨있겠죠?
2019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로 데뷔한 후, 대학로에서 장기간 공연되는 작품에 출연하는 것도, 관객과 가까이에서 호흡하는 작품에 출연하는 것도 이번 <리틀잭>이 처음이었더라고요.
제가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는데, “대학로에서의 첫 작품이 <리틀잭>이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거예요. 이 작품만의 감성이 저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사실 첫 공연 날 엄청 당황했거든요.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분들이 너무 잘 보여서요. (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분들과 소통하는 게 재밌고 편해졌어요. <리틀잭>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즐길 수 없었을 거예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데뷔 이후 앙상블 배우로 주로 활동을 해오다가, 2024년 <노트르담 드 파리>의 플뢰르 드 리스 역을 통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섰어요. 그때의 벅참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겠죠.
그때 오디션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여행을 갔었어요.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있는데, 소속사 실장님한테 카톡이 온 거예요. ‘주연아..’ 이렇게요. 떨어졌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제가 합격했다는 거예요! 저 정말 안 우는 편이거든요? 근데 그 자리에서 수영복 입고, 선글라스 낀 채로 엉엉 울었어요. (웃음) 아, 아까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순간이 있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수영장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들은 그 순간이 그 답이 될 것 같아요. 기쁜 와중에 한편으로는 뭉클하기도 했어요. 참고 견디니까 되긴 되는구나 싶어서요. <노트르담 드 파리>를 만나기 전,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오디션을 봤는데 다 떨어졌거든요. 그렇게 고군분투를 하다가 찾아온 작품이 무려 <노트르담 드 파리>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벅찼어요.
대극장 무대에서도,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도 당당하게 실력을 입증했으니, 이제 앞으로 차근차근 나아갈 일만 남았어요. 배우 유주연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저는 그냥 ’오래 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내 앞에 놓인 순간들을 착실하게 소화해 가면서요. 오히려 멀리 보면 괴롭더라고요. ’언제 저기에 닿을 수 있지?’라는 생각에 지쳐서요. 그래서 저는 딱 제 앞만 보고 살아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차근차근 수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 먼 곳에 도착해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행복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