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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작업노트] 연극 <베이컨> 시소를 타고 오르내리는 감정

글 |이솔희 사진 |엠피앤컴퍼니 2025-08-13 355

 

연극 <베이컨>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툰 두 소년, 마크와 대런의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기에 마주하는 위태로운 감정과 사회적인 억압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2022년 영국 런던 핀버러 극장에서 초연된 최신 화제작으로, 영국 각지에서의 공연을 거쳐 2024년 미국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올렸다. 한국에서 공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대에는 마크와 대런, 단 두 인물만 등장한다. 하지만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주고받는 에너지와 그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피어오르는 감정의 충돌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객석까지 압도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흡인력을 더하는 것은 무대에 놓인 단 하나의 구조물, ‘시소’다. 무대 중앙에 놓인 커다란 시소는 두 인물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균형과 불균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최적의 장치다. 시소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각자의 사연을 전하는 두 배우의 호흡, 그들을 비추는 집요한 조명 역시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요소다. <베이컨>을 탄생시킨 연출가 매튜 일리프, 무대 디자이너 나탈리 존슨, 조명 디자이너 라이언 조셉 스태포드와 한국 공연만의 매력을 더한 전서연 협력 연출, 임재덕 조명 수퍼바이저에게 질문을 던졌다.

 

충돌과 공존의 공간

<베이컨>의 대본을 쓴 작가 소피 스위딘뱅크는 이 작품을 ‘사랑을 배우기 전에 싸우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하는 사회 속에서 두 소년에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온전히 보호받지 못한,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고,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알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진짜 감정’을 직면했을 때 혼란 속에 헤매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둘 중 누구의 편을 들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솟아오른다. 매튜 일리프 연출은 이 작품에 대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 자란 두 소년이 결국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깊은 비극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관객들이 이 두 인물을 모두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사회 구조와 그들이 경험한 감정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공감에서 비롯된 사랑이요.”(매튜 일리프 연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마크와 대런, 두 인물이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 또는 미움과 비난의 대상, 어느 한쪽으로만 비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났을 때, 인물이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해서 화가 나고, 용서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이해가 되는 등, 어디로도 기울 수 없는 혼란의 시소 위로 관객분들을 세우는 것을 작품의 목표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물의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있는 장면들(기뻐할수록 외로움이 느껴진다거나, 화를 낼수록 두려움이 느껴지는 등의 장면들)을 찾아, 인물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보이게 하지 않기 위해 집중했습니다. 이는 <베이컨>이 17살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 조절이 불가능한 프라이팬 위에 올려진 얇은 베이컨 같은 소년들. 그들의 서툴고 투박한 이야기를 어떠한 재단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며, 그게 또 다른 마크와 대런을 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전서연 협력 연출)

 

 

무대에 놓인 시소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균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게 시소를 나눠 타며 우정을 쌓을 수도 있었을 그들의 또 다른 관계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한쪽이 올라가면 어느 한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시소 무대는 에너지가 양쪽으로 균등하게 전달되면서, 누군가 멈추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움직이는 장치인 ‘뉴턴의 요람’에서 영감을 받았다.

 

“두 인물 간의 감정적, 심리적 역학을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또, 마크와 대런 사이의 밀고 당김을 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움직이는 구조물’이 필수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두 인물의 관계가 서로 강하게 얽혀 있는 2인극에서는 시소가 적절한 은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작품이 언어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세계를 무대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대본에는 놀이터 기구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무대는 추상화된 형태로 해석하긴 했지만, 놀이터의 핵심적인 요소는 유지했습니다. 시소뿐만 아니라 바닥 역시 영국 놀이터의 바닥재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거든요. 이때, 열일곱 소년들을 놀이터라는 맥락에 배치하며 생기는 부조화가 흥미로웠습니다. 열일곱 살은 시소를 타기에는 나이가 들었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에는 이른 나이입니다. 감정적, 사회적으로 애매한 경계에 존재하는 셈이죠. 무대 위에 단 하나의 시소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 설정은, 경계에 존재하는 이들의 긴장감을 부각하고, 놀이터라는 공간을 놀이의 장소에서 권력, 취약함, 감정적 대면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바꿉니다.” (매튜 일리프 연출)

 

“제가 이 무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하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권력의 균형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시에, 모든 일이 벌어질 당시 인물들이 아직 10대, 즉 ‘아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영국은 청소년을 위한 여가 공간이 부족한 편입니다. 놀이터를 이용하기에는 나이가 많고, 술집에 가기엔 아직 어리다 보니, 그들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밀어내다시피 하면서 공원이나 놀이터를 점유하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그런 공간에 이 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이들이 갈 곳 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 이 공간이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인상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게 됩니다.”(무대 디자이너 나탈리 존슨)

 

 

무대를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시소는 다소 비뚤어진 각도로 배치되어 있다. 관객의 집중을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이다. 나탈리 존슨은 “처음 이 공연을 만들었을 때는 관객이 무대와 훨씬 가까이에 있었고, 무대는 양쪽으로 나뉜 좌석 사이에 시소가 놓인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경험을 지닌 두 인물을 위한 2인극에서 ‘양쪽으로 열린 공간’은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배우들은 등을 맞댄 채 각자 다른 방향을 보며 앉을 수 있었고, 그건 관객에게 ‘어디를 봐야 할지’ 알려주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른 공연장에서 공연되면서 관객이 한쪽 면에서만 볼 수 있는 구조가 되자, 시소와 관객 사이의 관계가 점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껴졌습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양쪽에서 마주 보는 구도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소를 약간 비스듬하게 배치하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공연 중 대부분의 순간에 한 인물은 전면에, 다른 인물은 배경에 놓이도록 의도하기도 했고요. 이로써 공간에 약간의 불균형을 주고, 무대에 또 다른 차원을 추가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구성이 관객의 집중을 유도하고, 어떤 시점에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하는지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무대 디자이너 나탈리 존슨)

 

시소 위에 선 마크와 대런이 때로는 위에서, 때로는 아래에서, 때로는 동등하게 서로를 바라볼 때, 어떤 감정을 느끼길 바랐을까? 매튜 일리프 연출은 “서로를 향한 깊은 책임감”이라고, 전서연 협력 연출은 “승리감 혹은 패배감, 더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솔직함”이라고 말했다.

 

“문자 그대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서로에게 깊은 책임감을 느끼길 바랐습니다. 시소 위에서 매 순간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지탱하거나, 들어 올리거나, 균형을 흔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 중심에 놓인 감정적 줄다리기를 물리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하는 거죠. 저는 배우들이 이 과정을 통해 권력의 구도가 얼마나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지 체감하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경외감 혹은 원망을 품고 상대를 올려다보다가, 다음 순간에는 통제감, 죄책감을 안고 내려다보게 되는 그런 경험이요. 물리적인 불균형은 곧 감정적인 불균형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소는 ‘공모(complicity)’를 요구합니다. 한 사람이 손을 놓거나 집중을 잃는 순간, 다른 한 사람은 위험에 처하게 되니까요. 이러한 역학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공존, 조종, 신뢰라는 주제를 더욱 부각시킵니다.”(매튜 일리프 연출)

 

“시소는 마크와 대런이 함께하는 순간들처럼 불안정합니다. 그 불안함 속에서 안정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시소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때, 시소를 기울인 사람은 시소와 상대방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갖게 되고,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흔들리는 시소 위에서 겨우 중심을 잡고 서 있을 뿐. 그래서, 시소를 힘으로 짓누르고 있는 사람은 여유와 권위, 승리감을, 반대로 위로 붕 떠버린 사람은 불안함, 무력감, 패배감 등을 느끼길 바랐습니다. 시소 양 끝에서 느끼는 감정의 격차가 클수록 시소가 평행한 순간이 더욱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시소가 평행할 때마다 두 사람은 다양한 추억을 쌓게 되는데요, 힘겨루기가 필요 없는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솔직함에 설렘이나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도, 실망감이나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때만큼은 깨끗한 거울을 마주한 듯 그 순간의 솔직한 감정이 쏟아져 나오길 바랐습니다.”(전서연 협력 연출)

 

 

문득 떠오르는 질문 하나. 제목을 <베이컨>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극 중 ‘베이컨 롤’은 마크와 대런이 학창 시절 처음 가까워질 때와 4년 후 카페에서 다시 만났을 때, 즉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에 언급된다. 매튜 일리프는 “극 중 베이컨 롤은 돌봄과 연결, 궁극적으로는 조종을 상징한다”라며 “기억과 친밀함이 얼마나 사소한 것들에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범한 음식이 익숙하고 위로를 주는 관계이자, 동시에 수많은 역사와 감정이 얽혀 있는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교 식당에서 대런은 베이컨 롤을 선택하고, 우리는 마크가 대런을 위해 베이컨 롤을 자주 사줬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간식을 사주는 단순한 행위는 점점 감정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대런이 마크의 카페에서 베이컨 롤을 주문하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적인 신호이며, 두 사람의 과거를 소환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튜 일리프 연출)

 

<베이컨>은 2022년 런던 핀버러 극장에서 초연된 후, 2023년 런던 리버사이드 스튜디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서머홀, 브리스톨 올드 빅 극장에서 공연됐다. 2024년에는 미국 뉴욕 소호 플레이하우스로, 지난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 매트릭스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지역을 오갈 수 있었던 것은 무대, 조명 등 <베이컨>의 구성 요소가 투어 공연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공연장에서 효율적으로 무대를 설치할 수 있도록 전략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매튜 일리프 연출은 “이러한 제약 속에는 일종의 ‘절제된 미학’이 있으며, 오히려 꼭 필요한 본질만을 남기는 훈련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는 한 공연장에서 장기 공연이 가능했기에, 이전의 선택들을 다시 돌아보고 조정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한국 창작진분들이 이 작품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함을 느낍니다. 덕분에 조명을 훨씬 정교하게 구성하는 등 투어 공연 중에는 시도하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작품의 시각적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매튜 일리프 연출)

 

선형 조명이 표현하는 시각적 진자

앞서 언급했듯 <베이컨> 한국 공연은 조명에 차별점을 두었다. 먼저, 투어 공연에서는 여러 제약상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조명 장비를 업그레이드해 연출가의 의도를 한층 섬세하게 무대에 반영했다. 임재덕 조명 수퍼바이저는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오리지널 버전에서 연출가가 원했었던 사이드 조명을 추가한 것이다. 조명기를 추가한 후 연출가와 의논하여 인물의 감정 표현이나 시간, 공간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무대에 담아낼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변화는 인물을 비추는 조명의 개수와 밝기가 증가한 것이다. 임재덕 조명 수퍼바이저는 “조명이 의도적으로 제한된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장면에서 관객이 각각의 인물에게 더 깊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전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공연에 사용되는 조명기는 25개로, 약 150번의 조명 큐 사인이 있다. 오리지널 버전에 비하면 늘어난 수치이지만, 최근 공연 중인 다른 연극들과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의 숫자다. 연극 <나무 위의 군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등 다수의 작품에 참여해 온 그에게도 <베이컨>은 색다른 작품이었다.

 

“영국 공연의 조명 관련 자료를 처음 보았을 때, 예상보다 더 작은 규모라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 작업을 진행하면서 극적으로 절제된 조명과 고도화된 조명 큐가 무대에 서 있는 두 인물을 향하는 관객의 몰입을 돕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감탄했습니다.”(임재덕 조명 수퍼바이저)

 

 

<베이컨> 무대의 중심을 잡는 것은 시소를 비추는 선형 조명이다. 이는 때로는 전체, 때로는 일부분만 사용되어 두 사람의 공간을 구분하기도, 인물의 상황을 강조하기도 한다. 조명 디자이너 라이언 조셉 스태포드는 “이 조명이 처음 사용되는 순간은 마크가 대런을 처음 만나는 장면인데, 이는 두 인물이 이 관계 속에 갇히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시소 위에서 균형을 이루는 시점이자, 공연 전반을 관통하는 ‘시각적 진자’의 시작이기도 하다. 두 인물은 시소 양 끝에 떨어져 서 있지만, 긴 선형 조명이 그들을 연결하고 가둔다. 이 조명은 두 인물을 집요하게 짓누르듯 비추며 앞으로 펼쳐질 관계의 강도와 긴장감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이 공연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대본, 연출, 무대 모두가 지속적인 움직임을 전제로 하고 있죠. 그래서 시소 길이를 따라 픽셀 단위로 조절 가능한 조명을 선택했는데, 이를 통해 공간을 수축하거나 확장함으로써 두 인물 간의 밀고 당김, 시소의 운동성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극 중 장소를 빠르게 전환하거나 독백과 장면 간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요.”(조명 디자이너 라이언 조셉 스태포드)

 

마크의 기억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조명에도 그가 느낀 감정을 녹여냈다. 마크가 편안함을 느낄 때는 따뜻한 느낌의 조명을, 불편함을 느낄 때는 차가운 느낌의 조명을 사용하는 것. 마크가 가정 환경을 이야기하거나 독백을 하는 장면에서는 따뜻하고 편안한 색조의 조명이 주로 사용됐고, 마크가 새 학교에서 느낀 낯선 감정, 대런과 함께 있을 때의 긴장감, 대런의 폭력적인 가정 환경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차가운 조명이 사용됐다.

 

“조명 색채는 따뜻한 백색부터 차가운 백색까지, 비교적 절제된 색조 안에서 설계되었습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는 긴장이 완화되는 반면, 차가운 조명 아래서는 경계심과 긴장감을 느낍니다. 이 따뜻함과 차가움의 대비를 통해 관객들도 마크의 이야기 속 ‘편안함의 정도’를 체감하길 바랐습니다. 공연 전체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은 리치몬드 공원 장면인데, 이때 마크는 대런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큰 행복과 편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장면 이후, 공연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그 수준의 따뜻함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조명 디자이너 라이언 조셉 스태포드)

 

 

여기서 하나 더, 조명만큼이나 두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요소가 있으니, 바로 사운드다. 단순히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장면을 구분 짓는 역할을 넘어,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이끄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매튜 일리프는 “음향이 잠재의식처럼 작용하기를 바랐다. 때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묘하게, 때로는 감정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게 흐르지만, 언제나 인물의 내면 상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베이컨이 지글지글 익는 소리는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들리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건 마크에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청각적 방아쇠입니다. 공연 초반, 크고 생생하게 들리는 베이컨 익는 소리는, 그 소리가 마크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이 소리는 마크의 심리 상태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장치가 됩니다. 마지막에 이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은, 마크가 마침내 과거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되찾는 선택을 내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음악이 마크의 목소리를 삼켜버리는 장면 역시 그의 혼란과 감정적 붕괴를 표현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중요한 말을 전하고 싶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순간. 그 순간에 느끼는 혼란을 관객이 함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음향적 특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이야기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매튜 일리프 연출)

 

이처럼 작품의 시청각적 요소에 숨겨져 있는 함의를 발견하는 재미를 알려주는 <베이컨>. 하지만 매튜 일리프 연출은 관객 각자의 해석과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 역할은 이 작품이 감정적으로 관객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각자의 판단과 해석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여지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객이 극장을 나설 때 스스로의 감정과 질문을 안고 돌아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을 다시 만날 때마다 저는 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해는 깊어지고, 무대 위 세계는 확장되죠. 저는 좋은 연극은 살아 있는 예술이며, 상연될 때마다 새로운 해석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공연은 지금까지의 모든 무대 중 가장 정제되고 완성도 높은 버전이라 생각합니다.”(매튜 일리프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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