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끝
전동석은 올해 <프랑켄슈타인>과 <모차르트!>로 바쁜 행보를 이어 나갔다. 차분히 숨을 고를 만도 한데 휴식도 반납하고 선택한 작품은 매혹적인 ‘오페라의 유령’을 다룬 <팬텀>이다. 전동석은 비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 팬텀을 어떻게 그려낼까?
누군가는 아주 오래전 파리 오페라 극장에 흉측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유령이 살았다고 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천재 음악가, 극장 지하에서 숨어 살았던 ‘오페라의 유령’은 결국엔 비극으로 삶의 막을 내렸지만, 그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통해 영원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살아 있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은 연극과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내려왔고, 이젠 뮤지컬 <팬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왔다. 작품은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사람을 피해 숨어 지내는 팬텀과 천상의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크리스틴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팬텀>은 팬텀이 지닌 인간적인 부분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부각하는데, 이는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팬텀으로 합류한 전동석의 마음을 순식간에 끌어당기며 그가 ‘오페라의 유령’으로 변신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류)정한 형님의 공연을 보고 ‘아, 계속해서 형의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음악을 들을수록 팬텀의 인간적인 모습에 마음이 끌렸어요. 처음 <팬텀>을 봤을 때, 느낀 감동을 잊지 않고 있어요. 제가 받은 감동을 전해드리기 위해 정말 많이 준비하고 있죠.”
팬텀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인 크리스틴에게 마음을 뺏겨 그녀를 유일한 제자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 “제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레슨비를 안 받고 성악을 가르쳐주셨어요. 심지어 시간이나 요일도 상관없이요. 학교만 끝나면 레슨을 받으러 갔죠. 그래서 나중에 저 또한 한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 한 명에게 모든 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이러한 학창 시절의 기억은 크리스틴만을 향한 팬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만큼, 음악이란 매개체는 유난히 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전동석은 팬텀과 크리스틴의 듀엣곡인 ‘오, 너는 음악’이라는 곡에 유난히 자신의 심정을 투영하는 듯 보였는데, 그는 “이곡을 부르면 부를수록 크리스틴이 아니라 마치 나를 향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 같아 나 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팬텀은 무엇보다 커튼콜까지 단 한 차례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각양각색의 가면이 팬텀의 심경을 대변해 준다고 하더라도,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은 어쩌면 배우에게 득이자 독이 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전동석은 이것을 작품의 큰 매력이라 자신했다. “가면을 쓰면 눈물을 흘려도 어느 정도의 농도로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팬텀>의 가면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얼굴의 일부분만 가려 관객이 시선을 둘 수 있어요. 그래서 가려진 부분을, 감정적으로 더 상상할 수 있게 만들죠. 특히 팬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잖아요.”
유달리 전동석은 이번 <팬텀>을 만들어가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만큼 팬텀의 아픔, 사랑, 비극에 대한 감정적인 공감을 이뤄냈다는 뜻이다. “팬텀의 여러 가지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들어와요. 노래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느라 노래를 부르지 못할 정도예요. 작품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슬퍼요."
사람마다 유독 자꾸만 신경 쓰이고 생각이 나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 전동석에게 그런 손가락은 단연 <모차르트!>다. 데뷔 후 처음으로 약속된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아픔은 그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동시에 단단하게 아물어버린 새살이 됐다. “너무 힘들었어요. 어떻게 내게 목소리가 안 나오는 일이 생길 수 있지?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사실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유독 더 좋은 공연이 나온다는 풍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농담으로 웃어넘기기엔 여타의 다른 날과 전혀 달랐다. 공연 전 죽을 힘을 다해 목소리를 내보려 했고, 결국엔 리허설이 진행되는 무대 위에서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절망에 빠진 그를 일으킨 건, 절친한 선배 김소현과 김준현이었다. “소현 누나와 준현 형이 제게 와서 ‘일어나, 괜찮아. 안 해도 돼.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는 말을 해줬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고마웠어요.” 늘 소녀답고 연약하게만 보였던 김소현은 전동석에게 선배이자 엄마 같은 품으로 큰 힘이 됐고, 말없이 그의 어깨를 잡아주던 김준현은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또 정영주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전동석의 상황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며 기꺼이 후배의 죄책감을 대신해서 짊어졌다. 그날 공연장을 찾아 준 관객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죄송하다”는 전동석의 눈빛에는 여전히 진지하고도 묵직한 무게감이 묻어났다. 그런 그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허공에 눈을 두고 있는 기자를 발견한 전동석은 이내 밝게 웃어 보이며 “그날 영주 누나, 소현 누나 그리고 준현 형에게 정말 고마워서 그 후에 잘하려고 노력한다”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끔찍했던 기억도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는 법. 처음으로 절망감을 안겨준 <모차르트!>가 싫어질 법도 하지만 오히려 더 큰 애착이 생겼다. “상처가 깊은 작품이 됐지만, 무대를 더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이 모든 일이 제가 <모차르트!>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일어난 것 같아요.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고통이 다가온 거겠죠.” 마침내 목소리를 되찾고 다시 오른 무대에서는 엄청난 감정이 그를 휘몰아쳐 왔다. “모차르트가 처음 등장하며 부르는 ‘나는 나는 음악’을 시작하는데 눈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때 ‘내가 정말로 무대를 사랑하는구나’ 다시 깨달은 날이었죠. 음악이 없다면 전동석이라는 사람이 없어질 것 같아요. 다시 무대로 복귀한 <모차르트!> 공연 날, 아직도 무대에서 느꼈던 감정이 생생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죠.”
예술고등학교의 입학을 시작으로 쭉 성악의 길을 걸었던 전동석이 해병대 복무 시절 휴가를 받기 위해 뮤지컬 넘버를 열창했고, 이후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아르로 화려하게 데뷔한 것은 꽤 잘 알려져 있다. 데뷔 이후 그는 젊은 배우 중에서도 유달리 주목을 받으며 <모차르트!>, <엘리자벳>, <두 도시 이야기>, <해를 품은 달>에서 차례로 주역을 꿰찼다. 데뷔 초창기 안정적인 노래 실력으로 호평을 받았던 그에겐 어느 순간 섬세한 감정 또한 덧붙여졌다. 특히 전동석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깊어진 슬픔의 깊이를 드러내며 숨겨진 가능성을 보여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슬프다’는 감정이 그냥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다가 아니란 걸 배웠어요. 슬픔이 제 몸 하나하나를 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죠. 어떨 땐 슬픔이 배를 덮치기도 하고, 어떨 땐 가슴을 치고, 또 어떨 땐 무릎이 아려왔어요.” 과거에는 소년다운 분위기와 모성애를 자극하는 캐릭터를 주로 표현했다면, 최근에는 인간 본연에 대한 고뇌나 감정에 대한 깊이가 더 농익은 인물을 연기한 것도 큰 변화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히 들어오는 것 같다. 작품마다 배우고 점점 단단해졌다”면서 여유로우면서도 겸손함까지 드러낸다.
그동안 전동석은 유달리 밝은 작품이나 로맨스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니 대답 대신 호탕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로맨스가 어려워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여배우랑 호흡을 맞추면 미안해요. 사실 지금까지 남자 배우들과 많이 무대에 섰으니까요. 보통은 남자 선배보다 여자 배우, 특히 누나들의 얼굴을 만지는 게 쉽잖아요? 그런데 전 남자 선배들 얼굴 만지는 게 쉬워요. (웃음) 나도 모르게 편한 느낌. 근데 저도 좀 로맨스나 멜로 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너무 슬픈 작품만 했잖아요.” 사실 지금까지 전동석은 미쳐버린 여동생과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레어티스, 아버지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천재 모차르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루돌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못해 자살한 베르테르, 죽은 세자빈을 잊지 못했던 세자 훤, 가장 친한 친구의 시체로 괴물을 창조해 낸 빅터까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이고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치열한 감정에 매혹을 느끼는 건 배우로서 당연히 욕심이 날 만하다. 그래서일까. 은은한 미소를 띠며 로맨스와 멜로를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네던 그가 순식간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도전하고 싶은 배역과 작품을 물었을 때다. “사이코패스를 해보고 싶어요. 정말 악에 받친 사람이요. <프랑켄슈타인>의 빅터에겐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가여움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타당성과 가여움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악인(惡人)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젠 새로운 작품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제 손으로 조금씩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데뷔 7년 차, 흐른 시간만큼 생각 또한 훌쩍 자란 배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전동석은 이젠 무대에서 일부러 관객을 향해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혹여라도 작품 속 인물이 아닌 전동석이 비칠까 우려되는 마음 탓이다. “옛날에는 ‘이걸 더 해보고 싶어. 이걸 더 강조하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고집이었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이젠 스태프들을 믿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실해지죠. 스태프들은 제 편이잖아요. 제 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편이에요.” 고집과 욕심을 버린 전동석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작품을 할 때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배우로 느끼는 ‘행복’에 대해 “어둠 속에 혼자 조명을 받고 있을 때, 말할 수 없이 행복해요. 마치 아무도 없는 공간에 서 있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전동석은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을까. “롱런 하는 배우요. 롱런이라는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겼지만 가장 큰 의미는 ‘계속 보고 싶은 배우’니까요. 오래오래 무대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9호 2016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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