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로의 초대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
2010년대에 들어서 뉴욕 공연계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관객 참여형 공연 ‘이머시브(Immersive)’이다. 2011년에 막을 올린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 모어>는 아직도 인기리에 공연 중일 정도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 인기에 힘입어 <댄 쉬 펠>이나 <그랜드 파라다이스> 등 다수의 이머시브 공연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 역시 그런 시류의 영향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서 만나는 러시아의 고전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은 2012년 작지만 강렬한 작품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비영리 극장 아스노바의 업타운 공연장에서 처음 관객과 만났다. 30~4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은 첫 번째 프로덕션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미트 패킹 디스트릭트(Meat Packing District)에 200석 규모의 가설극장을 설치해 호평 속에 공연을 이어갔다. 이후 브로드웨이 근처의 가설극장 공연 이후 보스턴에 위치한 아메리칸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공연하는 등 길고 복잡한 여정을 거쳐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독특하고 긴 제목이 붙은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은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대다수의 러시아 장편 소설이 그러하듯(특히 톨스토이 작품의 특징인) 복잡한 이름을 지닌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러한 특징을 살리기 위해 주연과 앙상블 배우들이 <플레이 빌>에 실린 가계도를 보라며(실제 극장에서 나눠주는 <플레이 빌>에 등장인물의 가계도가 실려 있다)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첫 장면이 시작되는데, 창작진의 재치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주인공 나타샤는 이제 막 사교계 데뷔를 앞둔 몰락한 귀족 집안의 딸로, 모스크바에 있는 유복한 집 자제인 안드레이와 약혼한 상태다. 그런데 안드레이가 전쟁터에 나가고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아나톨이라는 젊고 잘생긴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아나톨은 유부남이지만, 결혼 사실을 숨긴 채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바람둥이다. 아나톨과 나타샤는 사랑의 도피를 약속하지만 두 사람의 계획이 나타샤의 사촌 소냐에게 들통 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타샤는 아나톨이 유부남인 것을 알게 되자 자살을 기도한다.
이처럼 나타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지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맡는 인물은 내레이터 피에르다. ‘결혼은 했지만 섹스는 없는 짠한 피에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피에르는 부인이 외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한 채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아나톨을 비롯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인물이다. 배경처럼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발각된 아나톨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자살 기도 후 간신히 목숨을 건진 나타샤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온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녀를 위로하는 것도 피에르다. 이야기는 나타샤의 희미한 미소를 보고 그녀의 집을 나선 피에르가 혜성을 바라보며 보통 혜성은 불길하다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저 혜성은 앞으로 펼쳐질 좀 더 나은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며, 담담하게 소회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실 이야기는 꽤나 진부하다. 나타샤가 아나톨에게 반해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는데, 그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라는 점은 식상한 설정인 데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피에르라는 캐릭터도 새롭지 않다. 그리고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면도 있다. 규모가 작았던 이전 공연들에서는 모든 배우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브로드웨이에 오면서 극장 규모가 커져 배우들의 동선이 산만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정신없음’과 ‘진부한 이야기’ 또한 이 작품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큰 매력은 몰락한 러시아 귀족들이 전쟁과 무관하게 사치스러운 삶을 향유하는 모습을 음악과 무대 미학을 통해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시너지가 빛난 크리에이티브 팀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은 작은 규모로 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무대 컨셉을 유지하는데, 이러한 데는 무대디자이너 미미 리엔과 조명디자이너 브래들리 킹, 의상디자이너 팔로마 영의 공이 크다. 낡은 건물처럼 꾸며 놓은 공연장 복도, 러시아 스타일의 빨간 공단벽과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액자, 관객과 같은 눈높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무대 공간 디자인, 뻔한 테크닉 같긴 해도 미미 리엔의 무대 디자인은 팔로마 영의 의상 디자인과 잘 어울려 굉장히 효과적으로 관객들이 19세기 러시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미 리엔의 역량은 각각 다른 공간에서(아스노바, 카지노, 그리고 브로드웨이까지) 같은 느낌을 전하기 위해 공간을 재구성하는 데서 특히 빛을 발한다. 특히 브로드웨이 무대도 객석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2층을 이전의 가설극장들과 유사하게 연결된 느낌을 주기 위해 1층 무대 앞쪽과 2층 메자닌 앞을 연결한 계단을 설치하는 등 공간을 변형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분위기의 변화를 최소화했다. 게다가 브래들리 킹의 조명은 이 작품이 지닌 낭만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준다. 상황에 따라 샹들리에도 되고 별도 되는 이 방사형의 조명은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추운 러시아의 밤거리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냈다는 평이다.
극본과 음악을 맡은 데이브 말로이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데이브 말로이는 오페라와 왈츠, 발라드,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한 데 잘 녹여내는데 특히 나타샤의 뮤지컬 넘버들이 전반적으로 달달한 멜로디가 강한 반면, 아나톨의 곡들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심장이 쿵쿵대는 듯한 사운드 디자인의 인상을 줘 효과적인 대비 효과를 끌어낸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을 뮤지컬화하면서 소설의 느낌을 잃지 않도록 인물들의 내적 생각과 외적 행동을 가사로 쓴 점도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이다. 예를 들면 코트를 입으면서 “나는 코트를 입는다. 소매를 찾을 수 없어 한참을 휘적인다”, “내 뺨은 추위로 붉어져 있죠” 같은 식으로 3인칭 시각을 유지한 것은 꽤나 흥미로운 점이다. 오페라처럼 레치타티보가 있지만, 소설을 읽는 듯한 문장들이 계속 이어질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대사와 노래가 쉼 없이 나온다는 사실이 관객에 따라 부담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지만, 그런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것 자체가 당시 러시아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묘사하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머시브’ 공연의 성격을 지닌 이 작품의 큰 특징은 일부 장면에서 출연진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관객들의 호응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2막 나타샤와 아나톨이 도피를 준비하는 장면에서는 발라가가 관객들에게 셰이커를 나눠주며 관객들이 손에 쥐고 함께 박자를 맞출 수 있도록 참여를 유도한다.
연출을 맡은 레이첼 차브킨은 데이브 말로이와 함께 구상하고 작품을 만들었는데, 점점 능력을 인정받아 최근에 굉장히 바빠진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특히, 정신없이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그녀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스무 명이 넘는 배우들의 동선을 잘 꾸리고, 작품이 지루해지지 않게 템포를 조절한 것에서 특히 그녀의 재능이 빛났다.
열 명 정도 되는 주조연급 배우들도 인상적이다. 잘생긴 바람둥이인 아나톨과 아나톨의 누나이자 피에르의 부인인 일레인, 굉장히 엄한 나타샤의 대모로 등장하는 마리아, 나타샤의 약혼자인 안드레이의 누나로 지극히 평범한 메리, 아나톨의 도피를 도와주기 위해서 등장한 발라가 등 주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 대부분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이들 모두 지난 5년여의 시간 동안 이 작품에 참여했기 때문에 진정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단, 피에르를 맡은 조시 그로번은 역할에 어울리지 않은 달달한 목소리와 마른 체격, 살짝 부족한 연기력 때문에 이전 공연에서 피에르를 맡았던 데이브 말로이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다시 말하지만,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은 서른 명이면 꽉 찰 법한 작은 공간에서 출발해 특별히 설치한 200여 석의 천막 디너 시어터와 보스턴을 거쳐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작품이다. 사실 작품의 성격상 리딩 클럽이나 디너 시어터 느낌의 카지노가 공연장으로 가장 적합했던 터라, 브로드웨이 공연은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연출가 레이첼 차브킨을 비롯한 크리에이터들이 무대를 브로드웨이로 옮기면서 커진 공간을 어떻게든 보완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작품의 친밀도가 떨어진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이번 브로드웨이 공연에 대한 리뷰도 아쉬운 의견이 많았지만, <뉴욕 타임스>는 <해밀턴> 이후 나온 색다른 뮤지컬로 최고라 평했으니 앞으로 뉴욕의 관객들과 관광객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 올겨울 관객들이 그 초대를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9호 2016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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