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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팬텀> 김순영 [No.160]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17-01-25 5,808

더 넓고 깊은
세계로


2015년 국내 초연한 뮤지컬 <팬텀>은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프리마 돈나 크리스틴 역으로 진짜 성악가를 무대에 올리고자 했다. 당시 이 파격적인 도전에 응한 이가 바로 소프라노 김순영. 유럽과 국내 무대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해온 그는 처음 도전한 뮤지컬에서 ‘순크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역할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노래와 기대 이상의 연기를 선보였고, 그해 공연 전문 사이트 ‘스테이지톡’에서 관객이 뽑은 ‘뮤지컬 여우 신인상’을 받으며 그 인기를 확인시켜줬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 뮤지컬 무대로 돌아왔다. 이제는 머리 뿐 아니라 가슴으로 크리스틴을 이해하는 더 넓고 깊은 ‘순크리’가 되어서 말이다.




<팬텀>이 만든 변화


<팬텀> 초연 때만 해도 클래식 가수가 뮤지컬에 출연한다는 건 그야말로 파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어떤 이유로 출연을 결심한 건가요?
사실 그때는 뮤지컬의 ‘뮤’자도 몰랐어요.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뮤지컬이 2014년에 올라간 <레베카>였거든요. 클래식 공연만 보고 살았던 제게 뮤지컬은 완전히 신세계였죠. 솔직히 클래식계에서는 뮤지컬을 단순한 쇼 비즈니스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베카>를 보고 함부로 무시할 장르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그런데 어느 날, EMK뮤지컬컴퍼니라는 곳에서 뮤지컬에 출연해달라는 연락이 온 거예요.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전화를 끊고 제작사 이름을 검색해보니 <레베카>를 올린 곳이더라고요! 그게 제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들어놨어요. 그때부터 출연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이 시작됐죠.


출연 여부를 두고 고민한 건 왜예요?
클래식 가수가 뮤지컬로 넘어가면 그때부터 ‘쟤는 정통 클래식이 아니야’라는 낙인이 찍히는 경우가 많거든요. 클래식 무대로 돌아오기 힘들어질까봐 두려웠어요. 지인들도 열에 여덟은 하지 말라고 말렸죠. 그런데 지도교수님께서 좋은 기회니 도전해 보라 하시더라고요. 지도교수님 말을 믿고 출연을 결정했는데, 실제로 <팬텀> 출연 이후 클래식 무대에서도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어요. 이제는 저를 통해 클래식계도 고정관념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원래 뮤지컬이란 장르가 오페레타라는 정통 클래식에서 출발한 거잖아요. 클래식과 뮤지컬 무대를 왔다갔다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초반에는 뮤지컬에 맞게 창법을 바꿔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요.
기본적으로 오페라와 뮤지컬은 발성법이 달라요. 오페라는 두성을 써서 소리를 띄우듯이 낸다면, 뮤지컬은 그걸 압축시켜 밖으로 빼내는 느낌이에요. 소리를 더 얇고 말하듯이 내야 하죠. 크리스틴은 오페라 가수로 나오기 때문에 예외적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뮤지컬에 맞는 발성법을 익혀야 했어요. 초연 때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계속 공부하다 보니 올해는 더 뮤지컬다워졌다는 얘길 들어요. 물론 여느 뮤지컬 배우 같진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또 저만의 특색이 사라지잖아요. 중간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뮤지컬에 도전하는 데 있어 가장 넘기 힘든 산은 뭐였어요?
제일 힘든 건 역시 연기였죠. 오페라는 대사 대신 레치타티보로 이루어지는데, 뮤지컬에서 제대로 된 대사를 하려니 너무 어색한 거예요. 다른 배우들은 다 잘하는데 저 혼자 못하니까 좌절감과 중압감이 엄습했어요. 연습 시작하고 한 달 동안 혼자서 대성통곡을 세 번 했죠. 하루는 연습실에서 원로 배우님에게 크게 혼이 난 거예요. ‘이건 오페라가 아니야!’란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화장실로 뛰어갔어요. 뒤따라온 카를로타 역의 (신)영숙 언니에게 ‘나는 아무래도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며 그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이런 말로 절 다독여주시더라고요. ‘네가 뽑힌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너에게 주인공의 아우라가 있으니까 기획자가 너를 선택한 거고, 그건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자신감을 가져라.’ 그때 그 말이 저한테는 정말 큰 힘이 됐어요. 


크리스틴이란 역할은 실제 성격과 잘 맞았나요?
사실 제가 연습 초반에 엄청 혼났던 이유가 목소리를 예쁘게 내야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어요. 제가 소프라노 치고 평소 목소리가 낮고 허스키한 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청초한 크리스틴 역이 나와 맞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죠. 목소리를 꾸며낸 것도 그래서였고요. 그런데 <팬텀>의 크리스틴은 제가 생각한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하고는 또 다른 캐릭터더라고요. 마냥 여리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발랄하고, 당차고, 내면 깊숙이 강한 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어요. 그런 점이 제 성격과도 잘 맞았죠. 그래, 애써 가식적으로 할 필요없다. 그냥 내가 가진 걸 보여주자! 그렇게 마음먹으니 연기가 한결 자연스러워졌어요.


<팬텀>에 출연한 이후 생긴 변화가 있다면요?
<팬텀>이 저한테는 정말 큰 전환점이 됐어요. 이전에 오페라만 할 때는 노래를 잘하는 게 최우선이고 연기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무슨 얘길 하는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거든요. 나만 잘하면 돼, 나만 돋보이면 돼! 그런 생각이었죠. 근데 뮤지컬을 하면서 연기할 때 상대방과 주고받는 에너지가 있다는 걸 배운 거예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이제는 오페라를 할 때도 무대 위에서 상대방의 호흡을 읽고, 받아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클래식계 사람들도 제 연기가 몰라보게 좋아졌다며 깜짝 놀라요.




현실이 된 꿈 속에서


프리마 돈나를 꿈꾸는 크리스틴을 연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본인의 과거가 떠오를 것 같아요.
그렇죠.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어요. 초등학생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KBS 동요제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고, 중학생 때는 대전시립소년소녀합창단에 들어가 활동했죠. 하지만 본격적인 성악 공부는 집안 형편 탓에 포기해야 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학교 대표로 서울에서 열린 중창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거예요. 당시 저를 지켜본 학교 수녀님이 넌 꼭 성악을 해야 한다며 레슨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레슨비가 없다고 반대하는 부모님 앞에서 제가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며 울었던 기억이 나요. 결국 친언니가 월급을 털어 레슨비를 대준 덕분에 성악을 시작해 6개월 만에 성악과에 들어갔죠. 4년간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다니고, 2년간 국립합창단에서 일한 돈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 조금씩 소프라노 김순영이라는 사람을 알릴 수 있었어요. 크리스틴이 ‘내 고향’이라는 곡에서 ‘꿈 속에 살던 나, 그 꿈이 이제 현실이 됐어. 이 무대 위에서 온 맘을 다해 노래할 거야’라고 노래하는데, 그 노래가 딱 제 마음 같아요.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가 어느새 이렇게 오페라와 뮤지컬 무대에 서서 노래하고 있다는 게 감사하고 행복하죠.


뮤지컬 출연 이전부터 클래식 대중화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유학 시절까지만 해도 저는 무조건 클래식이 최고고, 어떻게든 클래식 가수로 성장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귀국해서 무대에 서보니까, 중소극장에서 올라가는 대다수 클래식 음악회는 제가 봐도 너무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저희가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노래하는 내용을 대부분의 관객은 이해 못하잖아요. 거기다 대고 ‘나 이렇게 잘한다, 나 소리 이렇게 좋아’ 주입하는 것만으로 무슨 감동이 생기겠어요. 좀 더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보기 좋은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 음악회 의뢰가 오면 항상 자막을 넣어달라고 주문해요. 무대나 배경 영상에 어떤 걸 넣어달라는 주문도 하고요. 아마 제 이런 성향이 아니었다면 <팬텀>에도 출연하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김효근 작곡가의 가곡으로 뮤직비디오를 찍는 독특한 시도를 한 적이 있는데, 권은아 협력연출님이 바로 그 뮤직비디오를 보고 저를 캐스팅하신 거거든요.


앞으로 김순영이라는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기를 기대하나요?
진정성 있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성악가. 사실 클래식 가수 중에 소리 좋은 사람, 성량 좋은 사람은 너무 많아요. 그에 비하면 전 체구도 작고 소리도 크지 않죠. 그럼에도 항상 제 장점으로 꼽히는 게 ‘소리에 마음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최고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노래로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여태까지 한 공연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공연이 두 번 있는데, 하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들을 위해 노래한 거고. 또 하나는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위해 노래한 거예요. 처음에는 하나같이 울상이던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이렇게 행복한 직업을 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무대에 서는 대단한 프리마 돈나가 아니라도, 단 한 명이라도 제 노래로 감동을 받는다면 전 행복할 거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0호 2017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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