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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어쩌면 해피엔딩> [No.161]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네오프러덕션 2017-02-14 3,970

사랑,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어쩌면 해피엔딩>




기억이란 사랑보다                


이번 청문회에서도 어김없이 똑같은 대사가 남발됐다. 언제 누가 나오든 하는 말은 하나더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대사를 읊는 사람들의 표정은 차분하고 말투는 침착하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반복되는 그들의 말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말은 기계적일 수 없고 무의미일 수 없으며 무엇보다 감정과 괴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들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란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는 유일한 방식이니까. 지금껏 잃어버린 것보다 그러모은 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얻을 것에 있다. 기억은 뒤에 있고 얻을 것은 앞에 있으니 앞으로 손을 뻗는 사람에게 기억은 방해가 될 뿐이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을까. 이래 보나 저래 보나 그들은 사람이 아닌 거다.


그래서일 거다. 상실을 예견하면서도 기꺼이 기억하기를 선택하는, ‘인간 아닌 것’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리는 까닭 말이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그렇다. 여기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 등장한다. 로봇이 주인공인지라 언뜻 미래형 SF를 예상하게도 하고 그들의 사랑이 중심인지라 애틋한 멜로를 기대하게도 하지만 이 작품의 이야기가 조금은 남다른 이유는 사랑이라는 관계를 기억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키는 데 있다. 사랑한다는 건 기억을 끌어안는 것임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해피엔딩’이란 ‘사랑해서 잘 살았습니다’의 결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합니다’의 과정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 과정이야말로 ‘어쩌면’ 진짜 사랑이 아닐까. 모든 뮤지컬의 서사는 결국 사랑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질감이 조금은 두터워진 느낌이다.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이야기인데도 팔랑팔랑 가벼운 깃털이라기보다는 따뜻하고 포근한 솜털 같다.



인간 아닌 것의 인간다움           


이 작품의 고전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주인공은 사람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오래돼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구형 헬퍼봇. 이 로봇의 일상을 보시라. 잡음 섞인 LP판에서 흘러나오는 1940년대의 재즈를 들으며 음악 잡지를 탐독하고, 작은 화분을 가꾸는 행복을 만끽하며 주인을 친구라 여기며 그리워하는 이 로봇은 SF의 주인공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로봇은 미래 사회의 개조된 인간의 모습이거나 무결점을 지향하는 인간의 디스토피아적 비전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했을 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의 정서는 고전적이다 못해 복고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지없이 서정적이다. 이 서정성 때문에 그가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더 슬프지만 말이다. 고장 나도 부품이 생산되지 않아 더 이상 고칠 수 없고, 가족인 것 같았던 주인은 물론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어서, 고립된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면서 저절로 기능이 멈출 때까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로봇의 모습. 그 위로 비인간의 영역으로 밀려난 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로봇은 버려지고 잊혀져버린 존재를 대표하고 있는 거다. 선하고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그 모든 것들을.     


<어쩌면 해피엔딩>의 사랑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쓸모없는 존재가 내민 손을 또 다른 쓸모없는 존재가 잡아줌으로써 그들은 연결되기 때문이다. 방전되어 죽어가는 클레어에게 올리버는 자기의 충전기를 꽂아주고, 혹시라도 클레어가 충전하러 오지 않을까봐 자기와 연결된 종이컵 전화기를 클레어의 문 앞에 던져두는 식이다. 충전기의 선과 종이컵 전화기의 선은 그들의 연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이다. 오로지 주인과의 관계만 있을 뿐 자기와 같은 ‘인간 아닌 것’과의 유대를 맺어본 적 없는 두 쓸모없는 존재가 서로를 향해 말을 걸고 서로에게 문을 연다. 둘의 만남은 쓸쓸하지 않고 쏠쏠하다. 함께 자기의 틀을 벗어나고 함께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입술의 감각을 나누며 함께 삶을 공유한다. 하지만 함께의 기억은 상실의 아픔을 통과해야만 하는 법. 클레어는 혼자 남겨질 올리버를 위해 모든 기억을 지우고 올리버는 아직 앞에 있는 클레어를 위해 모든 기억을 끌어안는다. 방식은 달라도 서로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 아닌 것들’의 삶. 그들의 공존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인간다움의 가치가 반짝인다.



새로운 듯 전형인 듯                


<어쩌다 해피엔딩>의 시작과 마무리는 이렇듯 흥미와 여운을 갖고 있지만 서사의 디테일은 사실 좀 성글다. 그냥 쉽게 넘길 수도 있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적잖더라. 부품도 없이 버려진 로봇이라면 당연히 폐기됐을 텐데 외진 아파트에 격리되어 자연히 멈출 때까지 그냥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감정은 자율적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하면서도 그리움, 외로움, 심지어 사랑까지 알아서 척척 학습해 나가는 것도 그렇다.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헬퍼봇의 존재 목적이건만 정작 다른 로봇과의 공존은 프로그래밍되지 않았음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던데.


이런 디테일을 따지는 건 버려진 로봇이라는 설정 자체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대립시킬 수 있는 좋은 매개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과 심지어 자기 취향까지 지녔지만 철저히 인간만을 위해 설계된 로봇이 어떻게 다른 로봇을 향해 연결의 손을 내미는 것인지, 이 지점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될 터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된 관심은 아직 예쁘고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에 머물고 있다. 올리버의 주인 찾기와 클레어의 반딧불 여행은 두 로봇의 성장과 만남에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건만 이 사건이 그저 착한 일탈로 끝나고 마는 식이다. 주인은 그저 죽었을 뿐이고 반딧불은 그저 잡아오면 끝이다. 이게 뭐람. 올리버에게 주인은 ‘인간 아닌 것’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발견케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주인마저 끝내 선량하다. 클레어가 그토록 애타게 반딧불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애매하다. 그냥 제주도에 가보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초반의 흥미로운 설정의 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인 둘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야기는 갑자기 익숙한 전형이 돼버린다. 너무나도 따뜻한 사랑, 충분히 예측 가능한 멜로. 예쁘지만 밋밋하고 따뜻하지만 깊지 않다. 사랑이 대답이 되려면 그 전에 질문이 있어야 할 터, 질문의 깊이에 따라 사랑의 무게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 작품의 소재에는 수많은 질문이 담겨 있고 이 작품의 설정에는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건만 착하고 예뻐지느라 질문의 물음표가 쪼그라든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빛이 나는 이유는 음악과 가사의 짜임새와 공간 연출의 만듦새에 있다. 실내악을 연상시키는 클래식한 악기 편성과 잔잔한 듯 기능적인 음악의 화술은 극의 분위기를 단아하게 가꿔놓는다. 때로는 영화음악처럼 배경이 됐다가 때로는 마임 음악처럼 행동을 이끌고 때로는 뮤지컬답게 극적으로 다가오더라. 음악이 귀에 들어오는 데는 가사의 몫도 크다. 대사였다가 묘사였다가, 잘 번역된 명작 라이선스의 가사처럼 유려하기도 하다. 아름다운 가사는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문을 통해 두 로봇의 공간을 중첩시키는 공간 연출이나 크게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조명과 영상의 활용도 세련되더라. 정문성과 이지숙 등 배우들의 연기도 조화롭다. 올리버는 로봇에 가깝지만 클레어는 인간에 가까운데, 모델의 차이로 설명되긴 하지만 둘 사이의 간극을 너무 벌리지 않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어쩌면 해피엔딩>은 공연으로서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다.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그 질문이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닐 터. ‘인간 아닌 것’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는 작품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다. 부디 그렇게 완성되어 가길. 넓은 시장을 관통할 예술의 힘은 하나의 묵직한 질문일 테니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1호 2017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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