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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오페라의 유령>의 홍광호, 가면 위에 다시 가면을 쓰고 [No.78]

글 |김영주 사진 |심주호 2010-03-25 8,590


 

3년 전 <더뮤지컬>에서 뮤지컬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나왔을 때,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뮤지컬 배우로 뽑힌 신인을 두고 많은 이들이 반문했다. “홍광호가 누구지?” 당시 대극장 뮤지컬의 앙상블과 커버 배우 경험을 거쳐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주연으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그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많은 지명을 받은 것은 이변처럼 보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10년 현재, 한국 뮤지컬계를 아는 사람 중에 그 설문조사의 결과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음표를 대면하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그는 동기들 중 유일하게 ‘뮤지컬 배우’가 꿈이라고 말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연극영화과’의 분위기 속에서 그 소망은 아이돌 가수가 되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졌지만 홍광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생짜 신인에게 프로 무대의 벽은 높기만 했고, 배우의 인지도나 경력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해외 스태프들이 결정권을 쥔 <미스 사이공>을 만나기까지 그는 오디션 탈락으로 인한 불안과 좌절감을 몇 번이나 맛보아야 했다.

 

<미스 사이공>에서는 앙상블이자, 크리스와 투이 역의 커버 배우로 발탁되었다. 메인 배우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대작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설 수도 있지만,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면, 종연까지 단지 앙상블 중 한 사람으로 머물 수도 있다는 것이 커버 배우들이 감당해야 하는 희망 고문이다. 다행히 홍광호에게는 기회가 왔다. 상당히 별난 방식으로.


“마이클 리의 목에 문제가 생기면서 극 중간까지 앙상블로 출연하고 있던 내가 갑자기 크리스 역으로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순간은 정말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예요. 관객들 머리 위에 물음표가 하나씩 떠 있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어요.” 순수한 베트남 소녀 킴이 연애는 마이클 리와 하고, 결혼은 그와 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홍광호는 어수선한 무대에서 제 몫을 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로 크리스로 무대에 설 기회가 계속 되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배우로서 새로운 장이 열린 순간이 있다면 그때였던 것 같아요. 정말 못했는데, 다들 너그럽게 봐주셨죠. 그래서 <미스 사이공>은 꼭 제대로 다시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곧 무대에 올려지는 <미스 사이공> 팀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배우로서 또 한번 새로운 전기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청년 귀족과 천재 괴물 사이에서


일인이역이 아니고서야 한 작품을 공연하는 중에 역할이 바뀌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다. 배우들이 평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이런 일을 홍광호는 벌써 두 번씩이나 경험하게 됐다. 그것도 <오페라의 유령>에서 가장 상반된 캐릭터인 팬텀과 라울로 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는 공연 도중에 가면을 바꿔 써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라울 역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미남연기! 미남연기는 아주 힘들죠.(웃음) 그런 연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대놓고 잘생긴, 잘난 남자잖아요. 그런 역을 나한테 맡기다니.”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얼마 전까지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그 자신이 태양처럼 빛나서 팬텀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을 더욱 짙고 무겁게 만드는 것이 임무인 청년 귀족 라울 드 샤니 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자신이 괴롭혀 왔던 그 지하 세계의 지배자로 새로운 가면을 써야 하는 것이다. “라울과 팬텀을 모두 연기한 배우들은 꽤 있대요. 하지만 한 시즌에 두 역을 하는 경우는 없었던 거죠. 아예 다른 작품도 연달아서 하는 건 힘들어서 그렇게는 안하려고 하는데 한 작품에서 다른 역을 하려니까 정말 부담스러워요. 그리고 지금 팬텀을 하고 있는 형들이 너무 잘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오페라의 유령>은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뮤지컬로 손꼽힐 만큼 화려한 작품이지만 주인공인 팬텀은 같은 장르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만큼 어둡고 비틀려 있는 인물이다. 홍광호는 이 강력한 캐릭터와 배우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첫 발을 내딛고 있을까. “<빨래>를 함께 했던 이정은 누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영화 없을까요 물어보기도 하고, 관련 이미지들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자료들을 모으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런 콤플렉스나 고통을 나는 못 느껴봤거든요. 사람들이 보자마자 침을 뱉고 저주하고 토할 정도의 흉측한 외모로 산다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진짜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의 이미지들을 보다보면 이런 거였겠구나, 라고 느끼게 되는 게 있어요.”

 

세계 최연소, 그리고 이번 한국 공연의 세 번째 팬텀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는 것은 분명 배우로서 영예만큼이나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실 객석에서 이 공연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배우로서 극에 참여해서 보는 것과 객석에서 3인칭 시점으로 보는 건 정말 다르거든요. 내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어요. 짜여져 있는 것이 확실한 작품이니까 내가 객석에 앉아서 모니터를 하면 테크닉적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작품에 임하는 나의 마음, 재미를 위해서 이렇게 한번 가보자, 라고 결심을 했어요.”

지금까지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 팬텀을 보여주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그건 관객들이 느끼고 판단할 부분일 뿐,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거든요. <타이타닉>보다 더 많이 봤다는데, 그건 정말 작품이 가진 힘인 거 같아요. 그런 작품이니까, 내가 ‘어떤 팬텀’을 만들어서 보여줘야지, 라는 것보다는 그냥 장면마다 필요한 것을 분석하고, 정확하게 연기해서 이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목표예요.”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섞인 이 어두운 인물에 대해 그는 열심히 배워나가는 중이다. “인간에게는 방어기제라는 게 있잖아요. 팬텀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보상받으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경우였던 거 같아요. 팬텀에게 크리스틴은 사랑하기에 너무 완벽한 여자에요. 약간 멍한 면도 있고, 4차원인 소녀가 아버지에게 음악의 천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걸 벽 뒤에서 듣고서는 ‘그래, 그럼 내가 음악의 천사 행세를 해야겠다’라고 결심을 하는 거죠. 이 여자가 자기 예술을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는 통로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거든요. 물론 사랑하지만, 처음에는 음악적인 것에 대한 마음이 더 컸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라울이 나타난 거예요. 팬텀은 사랑과 예술을 모두 크리스틴과 해결하려고 하는데 크리스틴은 예술적인 건 팬텀이랑 해결하려고 하고, 사랑은 라울이랑 하려고 해요. 아, 생각해보니 참 나쁜 기집애에요.(웃음) 그렇게 서로 바라는 게 다르니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라울은 돈도 많고 인기도 많고 지위도 높고 게다가 미남인데, 이 미남이라는 게 중요해요. 팬텀의 외모 콤플렉스를 자극해야 하니까. 그래서 라울을 연기할 때는 팬텀에게 없는 것을 모두 가진 남자, 매력적인 남자를 만들려고 했어요. 라울은 크리스틴이 믿고 따라갈 만한 남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냥 밝고 쾌활한 남자가 아니라 강직하고 남자다운 남자이고 싶었고, 그렇게 표현하려고 애를 썼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라울을 연기했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칭점에 선 팬텀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홍광호는 크리스틴에 대한 라울의 사랑이 진정으로 시작된 순간이 ‘All I Ask of You’를 부를 때였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때 팬텀의 분노와 복수심이 폭발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팬텀의 사랑은? “크리스틴이 지하 세계에서 팬텀에게 다시 가면을 돌려주는 장면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크리스틴이 흉측한 맨얼굴을 보고도 침 안 뱉고 욕하지도 않고 가면을 건네줄 때 팬텀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 순간이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해요.”


그는 팬텀이 관객들에게 불쌍해 보일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는,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할 수조차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팬텀은 실질적인 출연 분량에 비해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작품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홍광호는 앞서 연기했던 <지킬 앤 하이드>가 배우가 해야 하는 몫, 배우에게 기대는 부분이 큰 작품이라면 <오페라의 유령>은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작품임을 느끼고 있다.


“2주 전에 연출가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제가 좀 흐트러져 있는 걸 보고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배우를 두 가지로 구분하자면, 관객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배우가 있고 그와 반대로 작품의 본질을 쫓아가면서 작품이 보여줘야 할 것에 신경 쓰는 배우가 있다. 그런데 전자의 배우는 싸구려라고. 너의 재능을 그렇게 사용하지 말라고. 그 말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어요. 나도 어떻게 보면 그동안 그렇게 망가진 순간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인터넷의 관객 후기 같은 걸 안 본 지 꽤 됐어요. 인터넷에 내 이름을 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들을 볼 수 있으니까 신기했죠. 나를 어떻게 봤나 궁금했고요. 그런데 그게 결국에는 내 연기에 아주 조금도 도움이 안 됐어요. 그 글들이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저한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해요. 물론 지금도 궁금하기는 한데, 그 반응들에 신경을 쓰고 끌려 다니다보면 그 연출가가 말했던 것처럼 내 연기가 변질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일치하게 되는 것을 성장이라고 한다. 가면 위에 다시 가면을 썼을 때 홍광호에게도 그 변화의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8호 2010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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