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운명이자 목적
프랑스 혁명기에 정치를 시작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 유럽 대륙을 정복한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장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군인이자 정치가, 또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에게는 유언에서조차 애틋하게 이름을 부른 한 여자가 있다. 그녀를 향한 사랑, 질투, 좌절로 인해 유럽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끝내 난봉꾼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나폴레옹. 그의 사랑을 살펴본다.
“나로 말하자면, 너만을 사랑하는 것, 너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너를 언짢게 하는 짓은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운명이고 목적이야. …
안녕, 열렬히 사랑하는 아내여. 안녕.
나의 조제핀이여. 운명이 내 마음속에 모든 슬픔과
모든 고통을 집중시켜 주길 바란다.
그러나 운명은 나의 조제핀에겐
풍요롭고 행복한 나날을 부여해 주기를. …
나는 편지를 다시 열고 너에게 키스를 보낸다.
아! 조제핀” - 1796년 11월 28일
단 하나의 사랑
나폴레옹의 일생에서 단 하나의 사랑으로 꼽히는 여자는, 바로 첫 번째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ephine de Beauharnais, 1763~1814)이다.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섬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난 조제핀은 조각 같은 미모를 소유했지만 사치와 낭비가 심했다. 그녀는 1779년 부유한 보아르네 자작과 결혼해 두 남매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허영과 사치가 강했던 남편은 시간이 흐를수록 섬 출신 조제핀의 촌스러운 매너와 부족한 교양을 이유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심지어 조제핀의 남편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알현하러 갈 때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남편에게 무시당한 그녀는 결국 1785년 남편과 별거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파리 상류층의 관습과 매너를 습득하기 시작한다. 이후 조제핀의 남편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혁명군에 가담, 1794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녀 또한 이러한 영향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테오미도르 반동이 일어나 감옥에서 자유를 찾았다. 석방된 이후 조제핀은 파리 사교계에서 미모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데, ‘로즈’라는 애칭으로 불리곤 했다. 조제핀이란 이름은 훗날 나폴레옹이 붙여준 이름이다. 조제핀은 프랑스 혁명 도중 단두대에 설 뻔했던 아찔한 경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원했다. 자신의 행복과 생존을 보장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조제핀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을 선택했다.
운명의 만남
나폴레옹은 프랑스 정치계의 거물로 알려진 바라스의 소개로 조제핀을 만난다. 당시 조제핀은 바라스를 비롯한 몇몇 정치인의 애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한 사교 모임에서 조제핀을 보고 첫눈에 반한 나폴레옹은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에게 조제핀이 자신보다 여섯 살 연상에 두 아이의 엄마였던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당시 27세였다. 결국 두 사람은 사귄 지 3개월 만인 1796년 결혼한다. 많은 정부를 둔 조제핀은 지원군 하나 없던 나폴레옹의 구혼을 받고 망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제핀은 결혼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나폴레옹을 풍류를 모르는 시시한 남자로 봤고, 그 몰래 애인을 만들어 불륜을 반복했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심지어 조제핀은 결혼 직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출정한 동안 다른 남자를 불러들여 은밀한 밀회를 즐겼다고 알려졌다. 조제핀을 둘러싼 추문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이를 들은 나폴레옹은 추궁했지만, 그녀는 매번 ‘이혼’을 무기로 삼으며 부정했다. 이후에도 나폴레옹은 다른 남자들과 추문을 묵인할 정도로 조제핀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왕관을 쓰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곧 헤어질 사람처럼 엄청난 논쟁을 이어가다가도, 뜨거운 열정과 편지를 늘어놓으며 기묘한 관계를 이어 나간다. 이들은 1804년 황제와 황후에 오른 후에야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피우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대관식을 열었다. 나폴레옹은 손수 황제관을 머리에 쓰고, 조제핀의 머리에도 황후의 왕관을 씌워줬다. 황후로 즉위한 조제핀의 사치는 전보다 더 심해졌는데, 그녀가 사용한 드레스는 약 900여 벌, 장갑은 1,000켤레가 넘는다. 이러한 사치 덕에 파리의 의상실과 보석상은 떼돈을 벌었고, 사람들의 원성은 끊이지 않았다. 조제핀을 향한 가장 큰 비난은 바로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단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무분별한 행동, 사치와 방탕 그리고 제국의 존속을 위해 1809년 12월 큰 결심을 한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마침표를 찍은 것. 조제핀과 이혼한 나폴레옹은 1810년 3월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다. 사랑 없던 그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은 당연히 불행했다. 나폴레옹은 형식적인 결혼 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궁정 여자를 비롯해 미망인, 서커스단의 여자 곡예사와도 잠자리를 같이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과 이혼 후 말메종 성으로 내쫓겼다. 그녀는 그곳에서도 화려한 삶을 이어 나갔고 죽을 때까지 황제의 아내인 황후라는 칭호를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폴레옹의 퇴위 후 1814년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는데, 나폴레옹은 그녀의 죽음을 듣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랑의 이유
조제핀은 두 아이를 둔 미망인이었으면서도 정치계 거물의 정부였다. 또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것은 사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다 알 정도였다. 심지어 조제핀은 나폴레옹의 뜨거운 사랑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왜 이런 조제핀을 사랑했을까.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됐을 당시 조제핀에 대해 “나는 천성적으로 여자와 같이 있으면 수줍어진다. 그러나 보아르네 부인은 내게 어느 정도 자신감을 준 최초의 여자였다”고 회상했다. 과거 나폴레옹은 사투리가 섞인 억양과 이름 그리고 코르시카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교계에서 놀림을 받거나 주목을 받는 특이한 대상이었다. 또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기도 전에 가장의 역할을 했는데, 나폴레옹에게 조제핀은 그리웠던 어머니의 정과 이성애를 동시에 선사하는 여자였다. 또한 조제핀을 처음 만났을 당시 나폴레옹은 어떤 배경이나 든든한 지원자가 없었던 상태로, 코르시카 출신의 젊은 장교로서 정관계 후원자들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사교계에서 탄탄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던 조제핀은 이런 나폴레옹의 야망을 위한 발판이었던 셈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6호 2017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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