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SPOTLIGHT]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어요 - <미스 사이공>의 마이클 리 [No.84]

글 |정세원 사진 |김호근 2010-09-07 7,535

 

4년 만에 무대에 오른 <미스 사이공> 한국 공연이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마이클 리는 아쉽기만 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고한 목적, 그리고 수많은 노력으로 달려온 배우 인생의 첫 무대이자,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의 나라에서 한국어로 공연하는 기쁨을 안겨준 작품과의 이별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기회가 닿는다면 연출가로든, 엔지니어 역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이 특별한 작품에 계속 참여하고 싶다는 마이클 리를 만났다.

 

 


이번 공연은 2006년 초연 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모든 부분에서 성숙해진 느낌이랄까요. 당신은 어땠나요?
배우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연기에 반영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관객 입장에서 변화를 느꼈다니 참 다행이네요. 초연 이후로 내게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연기를 했다는 얘기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은데요.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아들 제시가 태어난 일?
맞아요. 초연 때는 없었던 아들이 태어난 일이 가장 큰 변화죠. 특히 우리 공연에는 딸도 아닌 아들이 나오니까 더더욱 중요하죠. 그것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제 감정 변화도 있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어느 한곳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하잖아요. 아내 킴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내거나 여행하게 되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했어요. 초연 때만 해도 막 결혼한 이후라 큰 변화를 못 느꼈죠.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4년 가까이 함께 지낸 아내와 아들과 이별하는 슬픔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그런 감정 변화들이 무대 위에서도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고요.


다시 만난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그들과의 호흡에서 이전과 다른 어떤 변화를 느낀 적 있나요?
베스트 프렌드인 건명 형과 같은 무대에 서지 못해 많이 아쉬웠지만 (김)성기 형님과 드디어 같이할 수 있어 좋았어요. 내가 어떤 평가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김)보경과 (김)선영은 지난 4년 동안 정말 멋지게 성장한 것 같아요. 보경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주인공’임을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아요. 지난 공연에서는 채 다듬어지지 않은 본능과 재능으로 연기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잘 파악한 데다 자신감까지 더해졌다고나 할까요. 선영은 언제나 스스로의 존재감을 잘 아는 배우이지만 이제 무대 위에서 그녀가 나를 리드하는 느낌을 받아요. 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내가 지난 4년 동안 겪은 변화를 통해 배우고 성장했듯이 이들 역시 그랬을 것이고, 그 시간 동안 쌓아온 실력과 자신감이 이번 무대 위에서 투영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극 중에서 킴이 17살의 소녀에서 아들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엄마가 되듯이 말이죠.


지난 4년 동안은 뭐하며 지냈어요?
음… 뭔가를 아주 많이 했어요. 영화 시나리오도 썼고 제작도 들어갔는데 회사와 의견이 어긋나서 완성되진 못했죠. 영화 <원스>의 영향을 받아서 구상한 뮤지컬 영화였는데, 한국계 미국인 작곡가가 한국인 여성을 만나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면서도 그녀의 도움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게 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었죠. 보경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고 음악도 직접 썼어요. 그 노래들로 만든 음반이 「파라다이스」예요. 아들도 태어났고 열 편 정도의 뮤지컬에도 출연했어요. 운이 좋았죠. (어떤 작품들이었어요?) <후스 토미>, <킹 앤 아이>,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외에도 여러 창작 단계에 있는 작품들과, 오랜만에 투이 역으로 <미스 사이공>에도 출연했어요. 딱 일주일 동안이었지만.

 

투이로 다시 무대에 섰다니, 감회가 새로웠겠어요.
느낌이 상당히 달랐어요. 처음 투이를 연기할 땐 정말 진심으로 킴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녀를 뺏긴 실연의 상처로 아프고 괴로운 모습 등을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낭만적으로 연기하지 않았어요. 킴에 대한 사랑보다는 가족의 약속, 국가에 대한 충성 등에 무게를 더 뒀죠.


당신이 연기하는 크리스는 크고 당당한 구원자로서의 미국을 상징하기보다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연약한 남자죠. 실제로 당신이 그리고 싶었던 크리스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배우로서는 당연히 모든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죠. 하지만 그런 면에서 가장 큰 숙제는 연출가 로렌스 코너나 협력 연출자인 대런은 이 공연이 아주 현실적인 작품이 되길 바랐다는 거예요. 그럼 크리스라는 인물을 관객들이 좋아할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투이 역으로 작품을 바라보다가 크리스 역으로 공연하게 되면서 나는 관객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인물로 만들고 싶었어요. 운명적으로 킴과 사랑에 빠지고, 또한 비극적인 운명 때문에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슬픔에서 헤어나기 위해 다른 사랑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근데 문제는 크리스가 그 시절의 GI(미국 육군 병사의 속칭)였다는 거예요.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쳤을까 싶은 청년이었을 테고, 이 전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이죠. 그런 관점에서 저는 아무런 목적도, 정체성도 없이 방황하던 크리스가 우연히 만나게 된 베트남 소녀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고 봤어요.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왜 클럽에서 사람을 만나고 가벼운 만남을 통해 위안을 얻는 사람들 있잖아요. 킴과 크리스에 대입하기엔 너무 조야한 예겠지만, 연출이 내게 요구한 건 이와 비슷했어요. 그래서 저는 관객들이 크리스를 좋아하기를 기대하지 않아요. 제가 의도하는 게 아니니까.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가 그의 삶에서 내리는 결정과 저지르는 모든 실수와 그로 인한 결과물들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고 살아나가는지.


그런 의미의 하룻밤 사랑이라면 두 사람이 그토록 뜨겁게 서로를 가슴에 품는 건 좀 억지스러운 것 같아요.
열일곱 살의 킴에게 크리스는 첫사랑이었겠지만 크리스는 이미 많은 여자를 만나봤을 거예요. 두 사람의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들이 보낸 그 밤이 단순한 하룻밤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그래야 두 사람의 사랑이 설득력이 있다고 연출가와 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아쉽게도 설득하지는 못했죠. 그래서 스스로 타협을 했어요. 어떻게 보이더라도 나 스스로만큼은 그녀와의 첫날밤이 아주 특별했다고.


킴도 그렇지만 크리스 역시 작품 안에서 혼란 속에 있다가 킴을 만나 행복해졌다가 다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엘렌을 만나 잠시 괜찮아졌다가 킴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다시 무너지잖아요. 그를 연기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힘들어요 정말로. 진심으로 캐릭터를 마주보고 연기하다보면, ‘나’와 ‘캐릭터’를 완벽하게 분리한다는 것도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관객들은 단순히 세 시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린 그 안에서 평생을 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집에 가면 무조건 나를 비우려 노력해요. 요즘엔 공연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날 향해 달려오는 아들을 안으면서 현실로 돌아와요. 하지만 그들과 다시 헤어지면 그 절절한 감정 때문에 완전히 사실적인 공연을 하게 될 거예요.


많은 분들이 마지막 ‘계속 안고 싶어’라는 대사에 집중하더군요. 그 장면을 연기할 때 어떤 심정인가요?
연출과 킴의 죽음 이후 크리스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난 크리스가 제정신으로 살았을 것 같진 않다고 했고 연출은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고 했죠. 이런 결말을 암시하며 막을 내린다니 참 잔인하지 않나요. 킴의 죽음만으로도 이미 비극인데 킴뿐만 아니라 크리스의 인생도 거기서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크리스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어요. ‘I Still Believe’에서 그의 악몽은 2막 시작에서 존에게 고백한 것처럼 그가 킴에게 준 총으로 그녀가 자살하는 모습이었어요. 그저 악몽이라 믿었던 꿈이 실제로 그의 눈앞에 현실이 되고, 그 죽음을 책임져야 하죠. 단 하나의 실낱 같은 희망이라면 탬만은 킴이 그토록 바라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정도겠죠.


<미스 사이공>은 철저하게 서양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작품인데, 투이 역으로 처음 참여했을 때 불편한 부분은 없었어요?
특별히 불편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이 작품은 미국이 다른 나라들을 어떻게 군림했는지 보여주잖아요.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그들의 압력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오히려 그 역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투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압력에 당당하게 맞서는 역할이잖아요.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더 좋았어요.
그런데 한국 공연에서는 미군 역할로 캐스팅이 됐죠. 참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에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런 부분에선 KCMI가 한국계 미국인인 나를 크리스 역으로 선택한 건 흥미롭기도 하지만 꽤 잘한 선택이지 않나 싶어요. 한국인의 외양에 미국인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니 가장 사실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들어서 습득하지 않아도,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 작품에 많은 것들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번 공연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없나요?
없어요. 모든 것을 다 쏟아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힘들었을 거예요.

한국에서의 무대 경험이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을까요.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일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나뿐만 아니라 내 부모님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면서,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도, 한국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입장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어 왔거든요. 공연하는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 왜 내가 현재의 나일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어요.


당신은 부모님이 바라던 의사 아들로서의 미래가 아닌 뮤지컬 배우의 길을 택했고 십 년이 넘도록 그 길을 걷고 있어요. 뮤지컬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다른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중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주는 장르죠. 음악과 연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둘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좋은’ 뮤지컬 작품은 제게 엄청난 성취감과 감동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히 뮤지컬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예술을 얘기하고 싶어요. 예술은 제게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창의적인 삶’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족이 생긴 후로는 내가 걷고 있는 ‘아티스트’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도 감당하는 것, 그 둘의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배우로서, 아티스트로서, 뮤지컬을 하며 그 안에서 삶을 이루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에요.


<미스 사이공> 이후의 계획은?
여러 작품을 얘기 중인데 확실한 것은 뉴욕에서 레아 살롱가와 함께하는 워크숍 공연이 있어요. 그리고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은 풀타임으로 아빠 노릇하기고요.


레아 살롱가와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군요. 어떤 작품인지 얘기해줄 수 있나요?
2차 대전 중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라는 작품이에요.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일본인이기만 하면 무조건 수용소에 가둬놓고 살게 했는데, 그 수용소에 감금된 한 가족에 대한 내용이죠. <알타보이즈>를 연출한 일본인 연출가 스태포드 아리마(Stafford Arima)가 연출을 맡았는데 지난 5월에도 워크숍을 다녀왔어요. 레아는  지금 필리핀에서 <캣츠>의 그리자벨라 역으로 출연하고 있어요. <미스 사이공>이 끝나기 전에 제 공연을 보러 온다고는 했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배우로서 욕심이 나는 작품이 있어요?

<컴퍼니>의 바비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나의 영웅이기도 한 손드하임의 가사는 굉장히 자세하고 음악과 잘 맞물려 있거든요. <태평양 서곡>에서 그와 작업한 적이 있었는데 작품 안에서는 굉장한 천재이지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혹시 그가 한국에 온 적 있나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그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웃음) 그리고 이번에 <넥스트 투 노멀>로 토니상을 받은 친구 브라이언 요키(Brian Yorkey)도 한국에서 작업을 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2007년에 그가 함께 작업한 <후스 토미>를 한국에 소개하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됐거든요. 그와 한국에서 작업해보고 싶어요.


시나리오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나요? 작품을 쓸 때 그들에게 자극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웃음)
계속하고 있지만 비밀이에요.(웃음) 한 남자와 마네킹을 소재로 뮤지컬을 구상 중이에요. 소재 자체는 그리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 인간 본성의 선량함을 믿고, 그것을 찾으려 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에요.


지금 현재 당신의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아들이 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들을 제공하는 것? 우리 부모님이 내게 해주셨던 것처럼 말이에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4호 2010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