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져 내린 사랑들
먼 옛날, 왕자를 짝사랑한 인어공주가 사람이 되기 위해 마녀에게 찾아간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던 인어공주가 결국엔 바다 대신 육지 세상을 선택해, 인간의 삶을 살아가다 난쟁이 찰리와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만, 그녀의 매끈한 다리는 새 사랑 찰리를 위해 마녀에게 바치게 되었지만요. 여기 난쟁이 부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인어공주와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 이 글은 인어공주 역을 맡은 유연과의 대화를 토대로 작성한 가상 인터뷰이며,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공주들이 모이는 무도회가 열렸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인어공주 당신은 무도회 중간에 나왔다면서요.
네, 무도회를 찾아간 건…. 제게 남아 있는 건 왕자와의 추억뿐이었어요. 갑자기 문득 그 추억을 향한 그리움이 몰려와 무도회에 갔죠. 결과적으로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의 말에 현실을 인정하게 됐지만. 적나라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아, 나는 이제 공주가 아닌데’ 싶더라고요. 설사 제가 공주였어도 남아 있는 건 왕자와의 추억 딱 하나였으니까요. 그래서 무도회장 밖으로 나왔는데, 갈 곳이 바다밖에 없었어요.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바닷속 모습과 그곳에서 지냈던 삶에 대한 그리움이요.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했어요.
무도회에서 만난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어요?
누가 뭐래도 왕자는 제겐 첫사랑이었고, 전부였어요. 요즘에는 ‘밀당’이라는 것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전 정말 몰랐어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가 하는 이야기들이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죠. 그녀들은 언제나 제게 ‘너무 순진해. 지금은 그렇게 사랑하면 안 돼’라고 나무라는데, 마치 성숙한 큰언니들 같았어요.
신데렐라의 이야기에 상처도 받았을 것 같아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제가 예전 그녀의 모습과 비슷한가 봐요. (미소) 제 모습이 답답해서 붙잡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요. 요즘 말로 ‘츤데레’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밉거나 서운하기보다는 귀여워 보여요. 비록 제 목표와 신데렐라의 목표는 달랐지만,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인간이 된 이후에 물속 인어 언니들과 교류가 있었나요?
아니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무도회장을 나와서 오랜만에 바닷물에 다리를 넣었다가 빼봤어요. 그런데 차마 다시 돌아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저로 인해서, 언니들도 희생했잖아요. 저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언니들은 절 위해 희생했어요. 그 이후로 언니들을 다시는 못 봤죠…. 많이 보고 싶네요.
과거 본인의 선택에 후회한 적은 없어요?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만약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후회되고 마음 아팠을 것 같아요.
당신은 이미 한 번 사랑에 배신당했는데,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왕자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를 위해서 많은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제가 가진 선택은 딱 하나였죠.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런 거예요. 어떤 다른 공식이나 방법은 없어요. 제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 결국은 제가 행복한 사랑이더라고요.
인어공주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순수함이요. 지고지순한 매력이라고도 할까요? (미소) 사실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어렵죠.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내가 가진 것 하나, 아주 조그마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잖아요. 그런 걸 잃지 않고 있는 게 바로 저의 매력인가 봐요.
찰리를 처음 본 순간 어땠나요?
전 그동안 계속 혼자 지냈어요. 찰리는 그런 저의 외로움에 손을 내밀었죠. 제게 말을 걸어줬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어요.
정말 찰리를 왕자라고 생각했나요?
찰리를 처음 본 순간에는 왕자라고 믿었어요. 키도 크고 잘생겼고, 옷도 정말 멋졌거든요. 찰리는 지금도 제 눈엔 멋있고 잘생긴 왕자에요!
찰리가 왕자가 아니라 난쟁이라는 걸 안 순간 기분이 어땠나요?
배신감보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난쟁이 찰리를 본 순간에요. 저도 한 번 상처를 겪어봤기 때문에 찰리의 진짜 모습을 봤을 때 공감이 됐어요. 상처에 대한 공감이요.
당신은 찰리를 위해 두 다리를 마녀에게 걸잖아요. 왜 그랬어요?
당연한 일이었어요. 설레는 마음으로 찰리를 기다렸는데, 갑자기 난쟁이가 되어서 나타났어요. 그는 저를 가까이 못 오게 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과거의 제가 생각났고,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저는 잃을 것이 없었어요.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의심도 있었고요. 신데렐라처럼 부에 대한 욕망도, 백설공주처럼 욕망을 다시 채워줄 누군가도, 제게는 없었죠. 모든 걸 잃고 외롭게 지내고 있는 제게 찰리는 손을 건넸고 즐겁게 해줬는데, 그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해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또 배신당하면 어떻게 해요?
배신당할 거란 생각까지도 못했어요. 제가 찰리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당연히 줬을 뿐인걸요. 제가 너무 순진한가요…?
그럼 언제부터 찰리를 사랑했나요?
찰리가 난쟁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상당히 괴로워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어떤 공감과 동질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그 전까지는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 고민했거든요. 그때야 사랑을 느낀 것 같아요.
찰리와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행복해요. 얼마 전엔 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고백하더군요. 찰리의 아버지가 찰리에게 절대 가장이 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찰리에게 가장이라는 부담감을 많이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서로 존중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저는 지금 찰리의 모든 것이 좋아요. 서로에게 따뜻하게 마음을 기대며 살고 있죠. (미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1호 2018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