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날 시켜줄까? 그런 생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직원 언니가 절 부르시더니 제가 무대에 오를 날짜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순간 그 언니가 천사처럼 보였어요!” 이수빈은 이 말을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그녀는 아역 배우 시절의 이야기를 거쳐 ‘홍연’으로 무대에 서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내 마음의 풍금>은 어떤 작품인지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도 꼭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지원 자격이 안 됐거든요. 언젠가 꼭 도전해 보자,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이수빈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내 마음의 풍금> 오디션에 지원했고, 오만석 연출은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줄’ 이 사춘기 소녀를 홍연 역의 언더스터디(주인공이 불의의 사고를 당할 시 투입되는 대역 배우)로 발탁했다. 10대의 소녀가 주인공의 언더스터디로 공연에 참여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연습 기간에 역량을 보여줘 스태프의 만장일치로 메인 배우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정 기간 무대에 서게 된 걸 보면 그녀의 재능과 근성을 인정할 만하다. 그렇다면 공연하는 동안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공연이 시작되면 홍연이는 무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잖아요.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가 홍연이 안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공연 내내 홍연이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데 동수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올 때는 ‘선생님이 날 걱정했구나’ 라는 생각에 얼마나 떨리는지 몰라요.” <내 마음의 풍금>을 통해 알게 된 건 노래를 더 잘 부르는 방법이 아닌 첫사랑의 감정이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고백이 적혀 있는 선생님의 일기를 보게 됐을 땐 너무 슬퍼서 무대 뒤에서도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랑의 교감을 무대에서 배운 그녀는 이듬해 다른 무대에서 사랑보다 훨씬 큰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대형 뮤지컬 <영웅> 오디션에서 당당히 배역을 따낸 것이다. 그녀가 연기하게 된 링링의 극 중 나이는 열여섯이지만 주인공과 감정을 주고받아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기성 배우들이 거쳐 간 배역이다. 300여 명에 가까운 지원자들 중 그녀는 유일한 미성년자였다. “다른 지원자들의 경력을 보는데, 어, 내가 오디션을 봐도 되나 싶더라고요”라고 그녀가 자신이 뽑힌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수줍게 웃는다. 나중에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오디션 심사를 마친 윤호진 연출가는 이수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재야, 천재.”
그런데 아역 배우라고는 한 명도 없는 대형 공연에 참여하게 됐을 땐 전과 다른 부담감이 그녀를 짓누르진 않았을까? “아프면 안 되겠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해해서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제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저 때문에 연습이 지연될 수는 없으니까요.” 생각이 야무진 만큼 욕심도 많다. “뭐라도 하나 실수하면 그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대사를 틀린 게 속상해서 운 적도 있어요. 언니 오빠들이 실수한 건 싹 잊어버려야 한다는데 전 아직 못 그러겠어요. 마음 한구석에 꾹 남겨뒀다가 다음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그 부분만 연습하는 거예요. 그래도 실수는 되풀이지만요. 하하.”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태도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그 성숙함에 놀라지만, “팀에서 저 혼자 학생이니까 절 ‘아기’로 보는 거예요. 전 이제 고등학생이 됐는데”라고 뽀로통하게 말할 땐 영락없는 아이 같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데 어른에 한 발짝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고 고등학생이 된 소감을 말하는 이수빈. 우리는 그녀를 무대 위에서 오래오래 볼 수 있을까? “무대에 설수록 ‘조금 더’ 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더 잘하고 싶다. 조금 더 뭔가를 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대 위에 있을 때하고 아래 있을 때 기분이 정말 달라요. 무대에 있을 때만큼은 제게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제가 마음 가는 대로 그동안 연습했던 걸 보여주는 거니까 오로지 공연에 몰입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대 위에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0호 2012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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