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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테이 [No.176]

글 |안세영 사진 |김호근 2018-05-29 7,201
새로이 부는 바람

부드럽고 애절한 목소리로 사랑받아 온 발라드 가수 테이.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추운 계절 따뜻한 카페라떼를 한 모금 삼킨 것처럼 달고도 씁쓸한 기분에 젖을 수 있다. 하지만 뮤지컬 무대에서 그는 늘 의외의 모습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했다. <셜록홈즈: 앤더슨가의 비밀>에서 범죄자 에릭/아담 역으로 데뷔한 데 이어 <잭 더 리퍼>에서는 살인마 잭을, <명성황후>에서는 장군 홍계훈을 연기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역시 뜻밖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남북전쟁 전후 미국을 배경으로 여주인공 스칼렛과 사랑의 ‘밀당’을 펼치는 레트는 로맨틱하면서도 시니컬한 매력을 지닌 인물. 영화에서는 마초적인 이미지의 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연기했고, 뮤지컬에서도 신성우, 김법래, 김준현, 윤형렬 등 주로 거칠고 굵직한 목소리의 배우들이 맡아왔다. 새로운 도전에 나선 테이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이방인, 깨어 있는 자, 사랑꾼

차기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라니 좀 의외예요. 그동안 이 역할을 맡아온 배우들과 테이 씨의 이미지가 쉽게 겹쳐지진 않잖아요. 이 역할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캐스팅에 앞서 이 작품의 주연을 뽑는 TV 오디션 프로그램 <캐스팅 콜>의 MC를 맡게 됐어요.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작품에 관심이 생겼는데, 제작사에서 먼저 레트 버틀러 역을 제안했죠. 처음에는 걱정했어요. 제 대외적 이미지는 애슐리에 가깝잖아요. 신사적이면서 사랑 앞에 유약한 모습이 제 이미지랑 맞아 연기하기도 쉬웠을 거예요. 반면 레트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걱정하면서 오랜만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찾아봤는데, 전에는 몰랐던 레트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격식을 차리기보다 현실적으로 행동하고 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1930년대에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게 놀라울 만큼 시대를 앞선 인물이에요. 그런 매력을 잘 살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클라크 게이블이 연기한 원숙하고 넉살 좋은 레트와는 다르지만 젊고 위트 있는 레트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SNS에 레트로 분한 컨셉 사진을 올리면서 ‘이방인’, ‘깨어 있는 자’, ‘사랑꾼’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걸 봤어요. 레트를 대변하는 단어로 이 세 가지를 꼽은 건 왠가요?
레트는 남부에서 태어났지만 북부에서도 오래 생활했어요. 경험을 쌓고 실리를 챙기기 위해 한곳에 머무르는 대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죠. 게다가 그는 남부 신사들의 룰을 따르지 않아요. 남들이 불편해하더라도 스스로 판단하기에 옳은 행동만 하고 옳은 말만 해요. 그런 점에서 남부인들에게 레트는 이방인처럼 보였을 거예요. 또 레트는 스칼렛이 두 번이나 결혼해서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그저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사랑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사랑꾼이고 깨어 있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들만 바라지 않고 딸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점에서도 그 시대 일반적인 남자들과 다르죠. 

극 중 레트는 스칼렛에 대해 ‘같은 영혼을 가진 그녀와 나’라고 표현하잖아요. 두 인물은 어떤 점에서 닮았다고 생각해요?
스칼렛은 주변에서 왜 저러나 손가락질할 만큼 제멋대로거든요. 그 모습이 레트의 눈에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보였을 것 같아요.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는 숙녀들과 다르게요. 저 사람은 거짓 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구나. 나와 같은 부류다. 내가 저 마음 알지. 이렇게 느끼고 끌렸을 거예요. 



레트는 다른 남부인처럼 도덕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 그런 남부의 정신을 아주 무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는 싸움에는 안 건다’고 하다가 뒤늦게 남부 군대에 합류하기도 하잖아요. 
레트는 북부의 군사력을 알기 때문에 남부군이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부인들에게 가봤자 다 죽을 거란 걸 알려주고, 나도 안 갈 거라며 다른 선택이 있음을 보여주려 했을 거예요. 하지만 스칼렛을 데리고 타라로 가면서 전쟁에 패하고 쓰러져 있는 고향 사람들을 보니 죄책감을 느꼈을 것 같아요. 내가 아무리 실리를 추구한다 해도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 다시금 고민했겠죠. 그래서 스칼렛을 혼자 보내고 늦게라도 참전한 것 같아요. 크게 보면 스칼렛의 안전도 결국 전쟁의 승패에 달린 거니까요. 

스칼렛에 대한 레트의 마음도 알쏭달쏭해요. 돈을 빌리러 찾아온 스칼렛을 매몰차게 돌려보내고는 돌아서서 저 여자랑 결혼할 거라고 얘기하기도 하죠. 
그건 제가 연기를 해보니까 알겠어요. 처음에 스칼렛이 찾아와 감옥에 있는 절 걱정했다고 말할 때 감동하거든요. ‘아, 얘가 성숙해졌구나’ 싶은 거죠.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은 알아요. 마음이 성숙해짐에 따라 행동도 변한다는 걸. 아마 레트 자신이 그렇게 수없이 변해 왔을 테고, 그래서 아직 어린 스칼렛도 언젠가는 철이 들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거예요. 그랬는데 실은 돈이 필요해서 찾아왔다고 하니까 와, 세상 얄밉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매몰차게 대해요. ‘너 아직도 얼굴로 먹고 살려고 그래? 내가 아직도 널 원할 것 같아?’ 하고. (웃음) 그러자 스칼렛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당신이 교수형에 처했으면 좋겠어’ 하는데, 그 순간 또 느끼죠. 짜증나지만 사랑스럽다. (웃음) 원래 레트는 스칼렛의 그런 솔직한 모습을 사랑한 거거든요. 그걸 잘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늘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첫 번째여야 하는데, 잘못 연기하면 이중인격처럼 보일 수 있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레트도 결국 지치는 때가 오죠. 레트가 스칼렛을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대사 ‘솔직히 말해 이젠 내 알 바 아냐’가 유명하잖아요. 이때 레트의 속마음은 어땠을까요?
아직 고민 중이긴 한데 지금 생각으로는요, 정말 내 알 바 아니라서 하는 말 같아요. 스칼렛이 미워서 상처받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제부터 각자의 길을 가자는 의미로. 아무래도 딸 보니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겠죠. 끝까지 애슐리만 바라보는 스칼렛에게 상처받은 상황에서, 그녀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보니마저 잃고 나니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을 것 같아요. 떠날 때는 이미 감정의 끈이 끊긴 상태라고 봐요. 

가장 풀어내기 어려운 장면이나 넘버는 뭔가요?
레트가 떠나기 전에 부르는 ‘사랑했어’라는 노래가 있어요. 사실 배우로서는 그 타이밍에 그렇게 깊은 감정의 노래를 부르기가 힘들어요. 왜냐면 그 시점에서 이미 레트는 마음정리가  끝났거든요. 그런데 ‘사랑했어~’ 하고 노래하려면 감정이 엄청 올라와야 한단 말이에요. 내용상 안 맞는 것 같은데 또 아이러니하게 노래는 제일 좋아요. (웃음) 그래서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걸 해내야 어른이 된다

여태까지 뮤지컬 활동을 돌아보면, 항상 가수 테이의 이미지에 딱 맞는 역할이 아니라 의외의 역할을 맡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지금까지 맡은 역할 모두 저한테는 도전이었어요. 데뷔작 <셜록홈즈: 앤더슨가의 비밀>에서는 일인이역에 도전했고, 살인마 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샤우팅 창법을 써야 했죠. 가수 활동할 때 안 쓰던 몸을 쓰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근데 소문을 들어보니 <명성황후>의 홍계훈만큼 몸 쓰는 역이 없대요. ‘이걸 해내면 다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연습 때 두 번 토했어요. (웃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애슐리를 맡았으면 도전이라고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레트는 도전이거든요. 이런 도전을 계속 해나가고 싶어요. 

대외적인 이미지는 제쳐놓고, 실제 자신과 레트가 닮았다고 느끼는 점이 있나요?
지금 제 행동 양식이나 사상은 레트와 더 닮았어요. 레트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인물인데, 저도 나이를 먹으니 남들 눈에 잘 보이는 것보다 제 자신이 뭘 원하는지 먼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삼십 대 넘으면서 성차별, 인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면서 어떤 게 진짜 옳은 건가 다시 고민해 보게 됐어요. 연애관도 레트와 비슷해요. 내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대를 찾지, 남들 시선에 맞춰서 누군가를 찾진 않거든요. 저만 좋으면 되니까. 다만 다른 점이라면, 레트는 행복을 위해 유흥도 적당히 즐길 줄 아는데 제가 그쪽으론 좀 약해요. (웃음) 술, 담배도 안 하거든요.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졌다니, 전에는 어땠는데요?
어릴 때는 무조건 착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살았어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있으니까 화가 나고 싫은 게 있어도 꾹 참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죠. 그러니까 제 안에 스트레스가 엄청 쌓였어요. 이게 과연 나한테 행복한 일일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요새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에요. 다만 말하는 방법이 달라졌죠. 전에는 솔직한 것과 직설적인 걸 구분하지 못했어요. 라디오 DJ를 맡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면서 깨달았어요. 솔직한 말을 이렇게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구나,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어른스럽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래서 저도 다짐했어요. 솔직하되 상처주지 않게 잘 얘기하자. 

솔직하되 상처주지 않게라…, 어렵네요.
어렵죠. 어려운 걸 해내야 어른이 되는 것 같아요. 가수라는 직업상 많은 사람이 저를 중심으로 모여 일하다 보니 잘못하면 갑 의식을 느낄 수 있어요. 모두가 나를 위해 희생하는 느낌이고, 결국 내가 잘돼야 다 잘되는 거라고 합리화하기 쉽거든요.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크고요. 매 순간 상처주고 상처받는 거죠. 이걸 십 년 넘게 반복하면서 서서히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잘돼야 다 잘된다’가 아니라 ‘같이 일한다’는 개념으로. 오히려 나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니까 내가 좀 더 희생해야 굴러간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아직도 멀었지만 깨어 나가고 있어요. 

라디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난 4월 8일 방송을 끝으로 3년간 진행해 온 MBC ‘꿈꾸는 라디오’에서 하차했잖아요. 서운함이 크지 않았어요? 
처음 DJ를 맡았던 KBS ‘뮤직 아일랜드’를 끝냈을 때는 엄청 서운했어요. 하지만 ‘꿈꾸는 라디오’를 끝낼 때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할 때 불러준 곳이 여기고, 덕분에 3년간 행복하게 일했는데 감사함을 잊으면 안 되겠다. 나중에 또 쓰임이 있으면 불러주겠지. 그래서 아무렇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청취자들이 제게 남긴 음성 편지를 듣고 울컥했어요. 스태프와 게스트는 방송국 밖에서도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청취자와는 정말 헤어져야 하는구나 싶어서. 방송에서 잘 안 우는데 진짜 울 뻔했잖아요.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SNS에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어린 왕자』에서 인용한 문장을 올렸잖아요.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다.’ 왜 이 문장을 골랐어요?
사실 길게 글을 쓰려다가 이게 ‘갬성글’이 돼가지고 나중에 부끄러워질까 봐 그림만 올렸어요. (웃음) 제가 늘 쓰던 헤드폰을 동그랗게 그렸는데 아, 이게 어린왕자 같은 거예요. 우리끼리만 이 별에서 계속 만나왔던 느낌. 『어린 왕자』에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구절이 있잖아요. 제가 라디오 할 때 그랬어요. 방송 시작하기 한두 시간 전부터 설렜거든요. 그래서 그 문장을 적을까 했는데 이것도 약간 ‘갬성글’ 같아서. (웃음) 고민 끝에 지금의 문장을 골랐어요. 라디오 DJ는 캐릭터를 만들 수 없어요. 매일 얘기하다 보면 본모습을 다 들키거든요. ‘내가 이런 얘길 방송에서 왜 했지’ 싶은 것도 막 털어놓게 돼요. 그걸 떠올리니 이 구절이 딱 와닿더라고요. 청취자들도 주변에 털어놓기 힘든 고민을 사연으로 보내면서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해요. 한동안 청취자들과 헤어져야 하지만 라디오 DJ는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할 거예요. 



뮤지컬을 하면서 새롭게 생긴 목표도 있나요?
제가 데뷔작이었던 <셜록홈즈: 앤더슨가의 비밀>을 정말 좋아해요. 그 작품 때문에 뮤지컬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거기서 연기한 에릭/아담이 드라마적으로 풀어야 할 게 많은 역할이었어요. 그때 연기의 즐거움을 알았죠. 제가 뮤지컬을 하고 싶은 건 노래보다 연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는 소극장 뮤지컬이나 연극 쪽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소극장 뮤지컬에 관심이 있다니 그것도 의외네요. 혹시 꿈꾸는 역할이 있나요?
일단 애정을 담아서 <셜록홈즈3>가 빨리 올라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셜록홈즈> 시리즈 1, 2, 3에 다 출연해 보고 싶어요.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토마스, <빨래>의 솔롱고, <헤드윅>의 헤드윅도 늘 하고 싶은 역할이에요. 아마 제가 헤드윅을 하면 기존의 테이 이미지를 좋아했던 팬들은 배신당했다고 느낄 거예요. (웃음) 그래도 헤드윅이라는 인물이 지닌 아픔을 잘 표현해 보고 싶어요. 록 밴드 출신이라 록 넘버도 잘 부를 자신이 있거든요. 더 나이 먹기 전에 하고 싶은데 기회가 올런지.

마지막으로 가수로서는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있어요?
드라마 OST 제의가 들어오긴 하는데 조금 망설이고 있어요. 물론 OST 참여도 행복하지만, 계속 이렇게 목소리만 팔면 안 되겠다는 죄책감이 들어서 새 앨범을 작업 중이에요. 좀 더 기다려주시면 겨울 즈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겨울이 제 메인 시즌이니까, 겨울 그리고 내년에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올해는 그 준비를 탄탄히 할 계획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6호 2018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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