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인생에 슬기롭게 다가가는 법
올봄 초연되는 창작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최재웅과 신성록. 바로 지난해 연말에 초연된 <모래시계>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이 이번에도 한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전작 <모래시계>가 국민 드라마를 무대로 옮긴 것이었다면, 이번 신작 <용의자 X의 헌신>은 일본의 인기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을 뮤지컬화한 것. 흥행이란 영광의 무게를 지닌 작품으로 뛰어들기 전 서울 나들이를 나선 두 남자는 담담히 말했다. “그냥, 해요.” 물론 이 그냥이 아무 ‘생각 없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거나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 인생의 절반을 무대에 던져온 두 남자가 무대라는 거대한 삶에 다가가는 법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작품
<용의자 X의 헌신>에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신성록 예전에 일본 영화를 봤어요. 그때 당시에 되게 재미있게 본 기억은 없지만, 이거 좀 깊은 영화구나라고 생각했거든요. 작년에 <키다리 아저씨>를 하고 있을 때 이 작품의 뮤지컬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그때 제가 뭔가 좀 가볍지 않고 깊은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 그냥 한다고 했어요. 큰 고민 없이. 너무 옛날에 미리부터 한다고 했나 싶긴 한데(웃음), 달컴퍼니는 전신 뮤지컬 해븐일 때부터 제 기준에 괜찮은 작품을 많이 했던 제작사니까 그런 신뢰가 작용한 것도 있죠.
최재웅 전 재작년에 <용의자 X의 헌신> 리딩 공연을 했을 때, 그 리딩 공연 시리즈 중 하나였던 <트레인스포팅>에 참여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 작품을 알게 됐어요. 원작 소설이나 나중에 나온 영화 둘 다 안 봐서 자세한 내용은 몰랐고, 일본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뮤지컬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만 알았죠. 그러다 작년에 달컴퍼니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게 됐고요. 저랑 정말 잘 어울리니까 꼭 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걸 한 번 말하고 마는 게 아니라 계속 그러니까 ‘대체 뭔데 나랑 어울린다는 거지?’ 좀 궁금하던 중에 성록이가 계속 꼬드겼어요. (웃음) 그리고 기본적으로 초연 작품하는 걸 좋아해요.
왜 같이하자고 꼬드겼어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신성록 물론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했죠. 근데 그것보다 창작 초연이라는 게 해보면 아실 텐데, 누구랑 같이하느냐, 어떤 이야기를 다루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굉장히 중요해요. 좋은 배우들이 캐스팅되지 않으면 대본이 아무리 훌륭해도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재웅 오, 나 좋은 배우야?) 그렇죠. 대단한 배우죠. 꼭 한 번 같이 작업해 보는 게 소원이다 싶었던. 이건 좀 거짓말이고요(웃음), 작업할 때 마음이 안 맞는 불편한 사람들끼리 있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서로 눈치 보느라 말을 못해요. 근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면 일단 소통이 돼야 한단 말이죠.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색안경을 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작품 할 때 진짜 중요해요. 근데 형은 저랑 지향하는 바도 비슷하고 기호도 잘 맞으니까 같이하면 좋겠다 싶었던 거죠. 이런 얘길 계속하면 서로 너무 창피하니까 여기까지만. (웃음)
꼬드김에 재웅 씨가 쉽게 넘어오던가요?
신성록 아뇨, 그때 저희가 <모래시계>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형한테 ‘형, 이거 꼭 해야 해’ 막 그랬어요. 근데 이 형이 ‘알았어, 알았어, 대본 볼게, 영화 볼게’ 그러고선 두 달 동안 안 보는 거예요. 맨날 내일 볼게, 내일 볼게 하면서. 그러다 어느 날 형이 영화를 보고 와서 저한테 한 이야기가 있어요. 자기가 너무 잘할 것 같다는 거죠. (웃음)
최재웅 아니, 잘할 것 같은 건 아니었고, 영화를 봤더니 이시가미 역할이 저하고 너무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역할을 맡은 일본 배우가 저랑 좀 비슷했는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분이 풍기는 분위기가 제 이미지랑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얘가 절 나쁜 배우로 만들었는데, 제가 대본이랑 영화를 왜 빨리 못 봤냐면 애가 둘이면 집에서 뭘 볼 수가 없어요. 공연 끝나고 집에 가면 피곤하니까 바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애들 유치원 보내 주느라 정신없고, 그러다 보면 뭘 할 수가 없다니까요. (웃음)
두 분 다 데뷔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한 작품에서 만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실제로 같이 작업해 보니까 어떻던가요.
최재웅 저희 둘 다 극단 학전 출신이잖아요. 그때도 같은 작품을 한 적은 없지만, 거긴 같이 작품을 안 하더라도 그냥 다 가족처럼 지냈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기대하시는 것만큼 특별한 감흥이랄 게 없었어요. 아무래도 서로 어렸을 때 처음 본 사이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은 느낌이었죠. ‘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네?’ 이런 느낌은 별로 없었고, 옛날 그대로구나 싶은 느낌.
신성록 형 말처럼 저희는 기자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다른 배우 생각을 많이 안 해요. (웃음) 우리가 막 서로에 대해 이 배우는 이런 배우야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러는 건 좀 오글거리잖아요. 아니면 그냥 서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삶의 여유가 없는 건가. (웃음)
새로운 모험을 펼쳐가는 법
작품을 하기로 하고 나서 원작 소설은 읽어봤어요?
최재웅 아뇨, 영화만 봤어요. 원래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을 할 땐 연습하면서 소설을 읽어봤는데, 요즘엔 잘 안 그래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연습 초반에 미리 원작을 보면 그 원작의 아우라가 너무 세서 스스로 거기서 잘 못 벗어나겠더라고요. 이미 완성된 훌륭한 텍스트가 있는데, 자꾸 우리가 하는 게 이거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문학적 완성도로는 당연히 소설을 이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우리 작품이 거의 다 완성됐을 즈음 한번 읽어보려고요.
신성록 전 원래 원작 소설을 잘 안 읽어요. 저도 형하고 좀 비슷한데 원작을 읽다 보면, 이 부분도 우리 작품에 넣고 싶고, 저 부분도 우리 작품에 넣고 싶고, 자꾸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우리 대본이 그 원작을 가지고 뮤지컬에 맞게 각색해 만든 거잖아요. 공연 대본도 또 하나의 완성된 버전이니까 이게 우리가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어떤 대본이든 부족한 부분은 있겠지만, 그걸 채워가는 게 저희가 할 일이니까요.
그럼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최재웅 <용의자 X의 헌신>을 홍보할 때 보통 ‘두 천재의 대결’ 이런 카피를 내세우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 일본 작품의 특징은 소재는 일상적이지 않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결국 잔잔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말한다는 거예요. 제가 예전에 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 이야기 <오케피>도 그랬고,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살인에 얽힌 천재 수학자하고 천재 물리학자가 주인공이지만, 후반부에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을 보면 이시가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극적인 이야기보다 일상적인 삶을 다루는 작품이 좋아요?
최재웅 특별히 더 좋아한다기보다 요즘 공연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 세니까요. 대부분 우리가 살면서 실제 생활에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죠. 그런데 일상생활의 소중함이라는 건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잖아요.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정서이기도 하고요. 아, 물론 살인은 빼고요. (웃음)
신성록 저 역시 보통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그린 작품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아요. 위대한 영웅의 전설적인 무용담 이런 것보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소한 마음이 오가는 이야기가 좋더라고요. 어떤 대본을 읽을 때 그런 감정선이 눈에 탁 들어오면 전 진짜 참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게 돼요. 예전에 했던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나 <키다리 아저씨>가 그런 작품이었죠. 연습 때부터 폭풍 눈물을 흘렸어요. (웃음)
각자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힌트가 된 게 있다면 뭐예요?
최재웅 글쎄요, 전 어떤 캐릭터든 저에서 출발하는 스타일이라 그냥 하고 있어요. 예전 인터뷰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이번엔 이렇게 할 거야라든가 어떤 캐릭터를 보여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작업한 적이 없어요. 그냥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최선을 다해 그날그날 연습에 임할 뿐이고, 관객분들이 공연을 보시면서 ‘저 캐릭터는 이런 캐릭터구나’ 하고 느껴주시는 거죠. 특히 이시가미 같은 경우엔 겉으로 뭔가 보여줄 수 없는 닫혀 있는 캐릭터라 유카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웃음)
신성록 네, 전 그래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연기를 할 겁니다. 농담이고요, 지금까지 생각한 바로는 유카와를 진지하면서도 괴짜 같은 면이 있는 캐릭터로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전 개인적으로 대본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아, 이 말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면서 캐릭터를 완성해 가거든요. 모든 힌트는 우리 대본 속에 있다고 생각하죠.
대본에 이시가미와 유카와의 대학 시절 관계가 어땠는지 별로 안 나와 있는데, 혹시 그거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신성록 제 생각에 유카와는 학창 시절에 이시가미를 천재로 인정했을 것 같아요. 그냥 천재가 아니라, 살리에리가 바라보는 모차르트 같은 경지의 천재요. ‘나도 천재인데, 얜 더 천재네?’ 싶은 거죠. 하지만 이시가미를 질투한다기보다 그의 천재성에 대해 어느 정도 존경했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이시가미가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오는 거죠. 이시가미가 자신의 뛰어난 두뇌를 그렇게 쓴 것에도 충격을 받고요. 유카와는 끝까지 이시가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그렇게 된 걸 진심으로 안타까워해요.
최재웅 아마 이시가미도 유카와를 비슷하게 생각할 거예요. 저희 대본 속 키워드 중의 하나가 친구라는 건데, 이시가미는 친구가 없거든요. 맨날 학교에서 학생들 아무도 안 듣는 수업 혼자 하고, 수업 끝나면 집에 도시락 사 가지고 가서 혼자 먹고, 이렇게 혼자 사는 사람인데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왔으니까 얼마나 특별하게 느껴지겠어요. 물론 유카와는 알리바이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친구죠.
작품의 핵심 이야기 중 하나인 이시가미의 사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지독한 사랑, 위험한 사랑, 완전한 사랑 등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최재웅 제목 그대로 이시가미의 사랑에는 헌신이라는 단어가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시가미가 제일 힘들었던 때에 본의 아니게 그를 도와준 사람이 야스코니까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그녀를 돕게 되는 거죠. 누군가를 위해서 전부를 바친다는 것, 이게 이 이야기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신성록 그러니까 형이 이번에 굉장히 멋진 역할을 맡으신 겁니다. 원래 누군가를 지켜주는 캐릭터가 멋있잖아요. (웃음) 이시가미의 사랑이 헌신적인 이유가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되면 정말이지 이 작품을 안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근데 만약 그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되면, 저희 작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용의자 X의 헌신>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졌잖아요. 여러 버전으로 변주된 작품인데, 이번 뮤지컬의 매력은 뭐가 될 것 같아요?
최재웅 이 작품은 확실히 각자 다른 경로로 접할 여지가 많아요. 중국에서도 얼마 전에 영화로 만들어져서 박스 오피스 1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뮤지컬만의 매력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존의 다른 뮤지컬하고는 다를 거예요. 저희 작품은 이렇다 할 춤도 없고, 신나는 노래도 없고, 화려하지 않거든요. 성록이가 우리 작품은 에너지를 과시하는 작품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러면서도 그 안에 힘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 지점이 되게 묘하고 재밌어요.
신성록 보통의 작품에서 두 캐릭터가 언쟁을 벌이면서 대립한다면, 저희 작품에서는 두 사람의 말이 아닌 생각이 부딪쳐요. 그게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는데, 전 그런 부분들이 정말 재밌더라고요. 아직 공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계속 다듬어가고 있는 중인데, 아마 무대 버전의 매력은 원작 소설이나 영화의 장점과는 완전히 다를 거예요.
오늘부터 개막까지 한 달 정도 남았는데, 흥행 성적을 어떻게 점치고 있나요?
신성록 지금 기분으론 매우 잘될 것 같은데, 요즘 마음이 매주 오르락내리락해요. 지난주에는 ‘와, 형, 우리 대박날 것 같아!’ 그랬다가 이번 주에는 그 신났던 기분이 다시 사그라져서 ‘형, 우리 그냥 편한 마음으로 하자’ 그러고. (웃음) 근데 얼마 전에 형이 연습하는 거 보면서 폭풍 눈물을 흘린 적이 있거든요. 연습실에서 오열한 몇 안 되는 작품인데, 약간 허풍을 부리자면 제가 연습 중에 울었던 작품은 관객들이 대부분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최재웅 이 친구가 감성록이라 엄청 잘 우는데, 얘는 자기 촉을 되게 믿어요. 우리 작품의 흥행을 굉장히 희망적으로 보고 있죠. (웃음) 근데 저는 작품 할 때 이건 잘되겠다, 또는 안되겠다 이런 감이 잘 안 오더라고요.
신성록 형 거짓말하지 마요. 형 어제 나한테 그랬잖아요. 재미있다고, 우리 잘될 것 같다고. (웃음) 아무튼 저희 작품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집중해서 보면 정말 재밌을 거예요. 관객분들이 그 끈을 놓치지 않도록 저희가 쫀쫀하게 잘해야죠.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해서 공연을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양한 매체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 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오랜 공백 없이 계속 무대에 서는 이유는 뭘까요?
신성록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이건 늘상 해오던 일이니까요. 그리고 전 흥미 있는 작품을 할 뿐이에요. 영화든 드라마든 공연이든 장르 상관없이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거죠. 우리 나이 정도 되면 ‘이번 작품을 해서 스타가 될 거야!’ 이런 생각 안 하거든요. (웃음) 그냥 어떤 식으로든 나한테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죠.
최재웅 저도 공연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아요. 성록이 말처럼 이건 제가 꾸준히 해온 일이고 또 앞으로도 꾸준히 할 일이니까요.
그럼 두 분 다 앞으로도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겠네요?
신성록 네, 그만 보고 싶을 정도로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6호 2018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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