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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인형의 집> 정운선·이기돈, 여인이 아닌 한 인간의 이야기 [No.182]

글 |박병성 사진 |심주호 2018-11-06 7,237

<인형의 집> 정운선·이기돈, 여인이 아닌 한 인간의 이야기   

 

1789년 12월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입센의 <인형의 집>이 초연됐다.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로라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가는 이 작품은 보수주의자들은 물론 일반 관객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작품에 대한 비난은 소동으로 이어졌고 문제적 작품을 여럿 선보인 입센조차도 독일어판에서는 결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 <인형의 집>은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며 세상에 나왔다. 아내가 집을 나가는 것만으로도 혁명적으로 받아들였던 초연 당시에 비하면 오늘날의 페미니즘 논쟁은 더 뜨거워졌고 수위도 훨씬 높아졌다. 여전히 여성이 누리는 권리는 남성의 그것에 비해 미약하지만 아내가 집을 박차고 나가는 행위는 더 이상 혁명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2018년 <인형의 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우리 시대의 로라

유리 부투소프 연출이 직접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선발했다고 들었어요. 오디션 과정은 어땠나요?

정운선_ 오디션이라기보다는 인터뷰 같았어요. 기존에 했던 작품 팸플릿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이 작품 할 때 어땠는지, 저 작품 할 땐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오히려 제가 연출에게 어떤 <인형의 집>을 만들고 싶은지 묻기도 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기돈_ 저도 오디션 때 그 질문을 했어요. 미투 운동이 활발하고 페미니즘 작품도 많이 나오는 이 시점에 왜 <인형의 집>을 만들려고 하는지 질문했는데 당시에는 확실하게 대답해 주지 않더라고요. 연습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 작품을 단순히 여성 인권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는 거예요. 
 

저 역시 <인형의 집>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점이 가장 궁금했어요. 초연 때는 집을 박차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혁명적이었겠지만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운선_ 3막에 로라가 남편인 헬메르에게 하는 대사가 있어요. 당신에게는 책임이 없어. 당신도 온전히 자유로워야 하고, 나도 온전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헬메르가 종교는? 사회는?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해요. 나도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이제부터 그걸 조금씩 알아가야 해. 저는 이 대사만으로도 이 작품이 우리 시대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쩌면 교육이나 학습으로 만들어진 감정일 수 있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반대로 나의 만족을 위한 행동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요. 


 

헬메르 역시 로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나 성 역할의 편견에 매여서 자신을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요. 그가 가장 강하게 매여 있던 굴레는 무엇일까요?

이기돈_ 가장이라는 굴레에 매여 있는 사람이죠. 가장은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하고, 자기 가족의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굴레에 매여 있는 사람이에요. 작품에서 헬메르는 ‘내가 책임져야 해’, ‘내 걱정거리를 당신에게 왜 이야기해야 하지’와 같은 말을 많이 하거든요.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을 거예요.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교육이요. 로라도 마찬가지로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거죠. 그러다가 빵 하고 터진 거예요. 자신을 묶어왔던 무언가를 깨고 나아가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평범하고 안정된 생활을 했던 로라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 갑자기 변신하거든요. 로라가 각성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면요. 

정운선_ 로라는 남편을 믿고 있었어요. 남편에게 비밀이 알려지면 자신을 구해 줄 기적이 일어날 것을 처절할 정도로 믿고 있었죠.  그로 인해 남편이 파멸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알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여기 없더라도 서류의 사인 위조는 혼자 한 일로 밝혀 달라고 린데 부인에게 여러 차례 이야기해요.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키려고 하지만 만약 드러난다면 남편이 해결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처음에 남편이 화를 낼 때만 해도 자신을 위해 화를 낸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남편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애정을 품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되죠. 로라도 남편이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까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거예요. 이제 그걸 찾기 위해 나가는 거죠. 
 

헬메르는 어떤 인물인가요?

이기돈_ 전형적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은 사람이죠. 헬메르 입장에서는 정말 로라가 잘못했거든요. 돈을 빌리는 일도, 불법적인 일도 그 입장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숨기고 있었으니까. 자신만의 확고한 확신이 있어요. 로라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는 장면이 있어요. 달콤하게 유혹하는데 로라는 그럴 기분이 아니죠. 그걸 이해 못해요. “나 당신 남편이야.” 작지만 굉장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일화예요. 그런 헬메르도 로라가 떠난다고 하자 갑자기 심하게 낙담해서 풀이 죽어버리거든요. 로라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무너져버리죠. 로라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무너져버리는 거죠.

정운선_ 로라가 헬메르를 믿었던 만큼 헬메르 역시 그의 기준에서는 그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서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어요. 하지만 그녀를 온전한 존재로서 사랑했다기보다는 그렇게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를 사랑했던 것이죠. 

 


 

새로운 인형의 집

그동안 억울하거나 뒤틀린 인물들을 많이 연기했습니다. 유리 연출이 어떤 점에서 본인을 헬메르 역에 선택했다고 생각하나요?

이기돈_ 오디션 때 연기를 보여드리지는 않았어요. 주로 대화를 했는데 연출이 굉장히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았어요. 어떤 배우가 오더라도 그에 맞는 헬메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였어요. 그 와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헬메르와 맞닿아 있는 배우를 찾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저의 경우는 황당한 게 <오이디푸스>에서 새 역할을 했다는 것을 흥미롭게 보시더라고요. 연습을 하면서 알게 됐죠.  연출이 이런 기운을 원하는구나. 아주 열려 있는 연출이에요. 다양한 시도를 해서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어떤 연습을 하고 있나요?

정운선_ 보통 첫날은 서로 인사하고 계획을 듣는데 유리 연출은 첫날부터 무대에 서게 했어요. 배우와 스태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정말 다이내믹한 연습을 하고 있어요. 다양한 시선에서 다채로운 시도를 해요.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 위한 과정인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것도 막상 실제 공연에서는 안 할 수도 있어요. 유리 연출과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스태프들이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것에 열려 있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기돈_ 글도 많이 쓰고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로라는 어떤지, 로라의 입장에서 써보라고 했어요. 그것들을 작품에 포함시켜 작업하고 있어요. 기존의 <인형의 집> 그대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로라나 헬메르 이외에도 다른 인물에 힘이 실려 있어요. 죽음을 앞둔 랑크 같은 인물은 ‘러브 앤 피스’ 존 레논 같은 사람이죠. 여성에 대한 편견도 없는 평화주의자로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연출이 어느 정도나 이 인물에 힘을 실을지 모르겠지만 꽤 비중이 생길 것 같아요. 움직임도 많고요. 김도완(크로그스타 역)은 무용을 전공한 친구고, 우정원(린데 부인 역)은 오랫동안 발레를 한 친구라 대사를 하면서 움직임이 많아요. 
 

다양한 성격의 연극뿐만 아니라 뮤지컬까지 스펙트럼이 넓은데요. 출연작은 어떻게 선택하나요. 

정운선_ 운이 좋게도 좋은 작품을 많이 했어요. 욕심 같아선 다 하고 싶지만 결국 한 작품을 떠올리면 그 시기에 저에게 와야 하는 작품이 온 것 같아요. 점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일 년에 많은 편수를 할 수는 없잖아요. 작품을 하면서 한 시기를 살아내는 건데, 이 시기에 어떤 삶을 사는 게 나을까, 어떤 질문과 맞닿아야 하나 생각하면서 선택해요. 

어둡고 음습한 인물들을 많이 연기했잖아요. 그런 인물이 끌리는 걸까요, 아니면 그런 표현을 잘하니까 그런 배역이 들어오는 걸까요?

이기돈_ 억울한 역할 많이 했죠. 누굴 죽이거나 죽음을 당하는 역할.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해도 되는데 전에 이렇게 표현했더니 좋았다는 기억 때문에 반복하게 되는 거죠. 제 연기 스펙트럼의 문제인데 올해 마흔이 됐으니까 다양한 방식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올해는 코미디도 해보고 재밌었어요. <다쿠우스>라고 <에쿠우스>를 모티프로 충남 홍성에서 닭 여섯 마리의 눈을 찔러 죽인 소년의 이야기를 B급 코미디로 푼 작품이에요. 재밌더라고요. 


 

두 분이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나요? 

이기돈_ 이번이 세 번째인데 무대에서 같이 말을 섞어본 적은 없어요. <아워 타운>에서 (정운선은) 에밀리였고 저는 우유 장수.

정운선_ (에밀리 톤으로)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기돈_ <시련>에서는 (정운선은) 아비게일이었고 저는 헤릭 경찰관.

정운선_ (경찰관 톤으로) 데려오게.
 

그럼 이번이 상대역으로 제대로 만나게 된 건데요. 이전 작품을 보면서 또는 연습하면서 서로를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세요. 

이기돈_ 운선이는 정말 강한 배우예요. 무대에서 정말 단단하게 느껴지는 배우가 있어요. 주로 여자 배우에게 받는 인상인데, 주인영 선배에게도 그런 단단함이 느껴져요. 단단하고 굉장히 감성이 풍부해서 잘 감추고 있다가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에너지나 감성이 참 좋아요. 그런 점이 굉장히 부러워요. 사적으로는 굉장히 사교성이 좋아요. 말도 먼저 걸어주고 연습 끝나고 집에 갈 때 단톡방에 인사도 잘 남기고. 

정운선_ 오빠는 작품 해석을 잘하고 다른 인물까지 전체를 보는 시각이 좋아요. 전체적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하고 여러 시도를 해보고 싶어하더라고요. 그리고 엄청 꼼꼼해요. 헬메르가 굉장히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일 것 같거든요. 이래서 헬메르를 맡겼구나 싶었어요. 오빠는 원래 굉장히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인데 반대로 조금 느슨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같아요. 자기 것만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이 있어요. 완벽주의자라 그게 힘들 텐데도 열려 있더라고요. 몸도 잘 쓰고 늘 한두 시간씩 일찍 와서 대본이랑 싸우고 있어요.

이기돈_ 그건 대본을 못 외워서 그런 거야.

정운선_ 늘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완벽주의여서 그런 거 같아요. 

이기돈_ 팀원들이 다 좋아요. 귀하게 만난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2호 2018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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