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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DIARY] 정재진 영상디자이너의 해외 작업기, 도쿄와 상하이를 오가며 발견한 ‘다음 페이지’ [No.185]

글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사진제공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2019-02-28 8,962

정재진 영상디자이너의 해외 작업기, 도쿄와 상하이를 오가며 발견한 ‘다음 페이지’ 

2018년은 고민으로 시작된 해였다.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왔지만, 급변하는 뮤지컬 환경은 영상디자이너로서 방향성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했다. 국내에서 대형 창작뮤지컬 제작이 점점 줄어드는 분위기 가운데, 때마침 전시나 광고 프로젝트 의뢰가 이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무대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심지어 ‘올해는 10년이나 미뤄뒀던 박사 논문이나 마무리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던 차, 느닷없이 두 건의 해외 작업 제안이 잇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나는 도쿄와 상하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나날이 시작됐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곳에서의 협업은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다. 그런 낯선 환경에서 일하는 경험은 그동안의 경력을 무(無)로 돌린다. 하지만 두 나라를 오가며 보낸 그 흥미진진한 시간들은 오히려 나를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영상디자이너로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줬다. 



같은 의미, 다른 느낌의 인사
다카라즈카 가극단과의 인연은 지난 <싱잉 인 더 레인> 작업으로 맺은 바 있다. 이번에 제안받은 작품은 <팬텀>이다. 이번 <팬텀>은 다카라즈카의 본고장 효고현의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이어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에서 공연되는 스케줄이었다. 반면 상하이음악청(上海音樂廳)에서 제작하는 <꽃처럼 지는 청춘>은 한 주 먼저 막을 올린다. 회의 일정부터 모든 제작 과정이 긴박하게 진행되며, 매주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스케줄이 시작됐다. 인천과 김포공항 이용이 잦아지다보니 항공사 직원들도 나를 알아볼 정도였다. 
해외 프로덕션과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양국 모두 전문 통역가가 있긴 하지만, 항상 이들을 대동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간단한 대화에는 위챗이나 라인 같은 소셜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즘엔 번역 기능까지 있어 짧은 소통에는 불편함이 없다. 물론 번역기가 표현을 종종 왜곡해 서로 오해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반말(?)로 소통을 한 것이 오히려 해외 스태프와 친밀감을 쌓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현지에서 직접 대화를 할 때는 번역기도 소용이 없다. 중국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나마 일본어는 대학생 때 몇 년간 공부한 기억을 되짚어 의미를 유추하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선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연출가나 스태프들이 의견을 말하면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렇게 말 한마디마다 집중해서 경청하자 나중에는 서로의 눈빛만 봐도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중국에서 회의할 때는 처음엔 성조의 강한 억양 때문에 상대방이 화난 게 아닌가 헷갈리기도 했다. 나중에 말투에 익숙해지자 그런 부분들이 유쾌하고 에너제틱하게 다가왔다. 하루를 마치며 건네는 인사 ‘신쿨러(辛苦了, 수고했습니다)’는 활기찬 억양 덕분에 힘이 나는 말이었다. 반면 일본에서 같은 의미인 ‘오츠카레사마데시타(おつかれさまでした, 수고했습니다)’는 차분한 말투처럼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두 나라 모두 한국에 비하면 젊은 스태프가 많고, 나이를 떠나 서로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우연히 나오는 아이디어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언어를 초월해 공감하는 순간이 있다. 한국에서는 말을 아끼던 나도 어느새 본성을 드러내며(?)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러다 일본에서는 ‘나니와 치에코(주로 조폭 우두머리 캐릭터를 맡는 배우)’나 ‘오사카 개그맨’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영상감독이라는 타이틀에 스스로를 가둬왔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때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나날이었다. 




오프닝은 강하게, 임팩트 있게!
중국은 뮤지컬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영상을 활용한 쇼나 미디어 파사드 같은 대형 이벤트는 많기 때문에 영상의 중요성에 대해 설득하기가 수월했다. 물론 뮤지컬에서의 영상 활용 사례가 많지 않다 보니 제작에 앞서 연출진을 대상으로 시연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는데, 이번 공연에 함께 참여한 서숙진 무대디자이너가 대형 무대 모형을 제작해준 덕분에 이런 과정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다. <꽃처럼 지는 청춘>은 투어를 염두에 두고 간소화된 세트로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시공간을 구현한 작품이라 영상의 책임과 부담이 컸다. 와이바이두 다리, 동방명주, 국제호텔, 난징둥루 등 극 중 상하이 명소들이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영상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관객들에게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장면은 오프닝 영상이다. 상하이의 상징인 와이탄의 시계탑을 중심으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영상은 강한 인상을 남기며 이야기의 문을 연다. 
2011년 공연 이후 네 번째로 돌아온 다카라즈카의 이번 <팬텀>과 이전 버전들과의 차이 또한 영상이 투입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일본 프로듀서에 따르면 이번 <팬텀>이 다카라즈카 공연으로서는 영상이 무척이나 다양하게 활용된 버전이라고 한다. 그런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기존 버전에 익숙한 열혈 다카라즈카 마니아들을 납득시켜야 하는 과제의 무게가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우리 팀 에피타프의 전매특허인 전환 영상과 라인 영상, 배경 영상과 심리 영상, 오프닝 영상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했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오프닝 영상은 서곡 연주 때 관객이 팬텀의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스토리텔링했다. 편곡자와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1분 30초 분량의 이 영상은 다카라즈카 공연 사상 가장 긴 오프닝 영상이라고 한다. 하나의 소스로 쭉 재생되는 영상이 오케스트라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아닌 ‘한국 아티스트’라는 정체성 
중국 공연에서는 세트 전환과 영상의 유기적인 연결에 있어 재미있는 연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 객석 반응이 좋았던 장면 중 하나는 무대에 실제 버스가 등장해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것과 맞물려 영상으로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표현한 대목이다.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연기를 일으키며 떠나가는 버스 영상은 조용하던 객석에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중국 공연의 특징은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드라마와 세트에 묻어나는 것인데, 영상도 그 코드에 맞춰 과감하게 입체감을 더한 표현을 시도해 독특한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상하이 대극장에서의 <꽃처럼 지는 청춘> 첫 공연을 위해 인근 도시인 쿤산 대극장에서 트라이아웃을 진행하는 동안, <팬텀>은 도쿄 공연에 앞서 다카라즈카 대극장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정은 영상의 디테일을 수정,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작업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다져진 철야의 내공(?) 덕분에 중국과 일본 공연도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두 나라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리 팀은 ‘에피타프’라는 팀명보다 ‘한국 영상 팀’이라는 정체성의 무게가 더 컸다. 
우리가 만든 결과물에 따라 한국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상하이 공연 기간에 대극장 옆의 중극장에서 창작뮤지컬 <랭보>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상하이 공연을 보러온 관계자 중 우리 팀과 협업하고 싶다고 연락한 곳이 있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들이 한국 아티스트들에게도 열려있다. 평소에 더 열심히 연구하고 도전하는 자세로 임해야 함을 또 한 번 다짐했다.
모션 그래픽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국에서는 한국 아티스트로서 공연 분야에서도 영상 디자인의 성공 사례를 남기고 싶었다. 일본에서는 105년의 전통을 지닌 가극단의 역사에 누가 되지 않는 게 첫 번째 목표였지만, 기존 일본 영상 팀들과 다른 한국 아티스트의 역량과 개성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다카라즈카와 작업을 시작한 시기에 가극단에 입사한 무대 팀의 진경아 감독의 존재도 더 신중을 기하는 요인이었다. 내가 감히 국가대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각오를 다지며 작업에 임하다 보니 세계 대회에 나서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책임감과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신과 함께’한 철야의 나날들
상하이 대극장에서 최종 리허설을 앞둔 당일, 하드웨어 쪽에서 변수가 발생해 진땀이 흘렀다. 중국 쪽 하드웨어 팀과 하나씩 장비를 다시 세팅하면서 역시 영상 분야는 어디에서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수와 계속된 철야로 인해 체력은 떨어지고 신경이 예민해진 까닭인지 기이한 일도 겪곤 한다. 각 나라마다 공연장 귀신이나 미스터리한 일들은 흔한 이야기의 소재이지만, 두 나라에서 번갈아가며 유령 같은 존재를 만난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중국에서는 철야 작업 중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던 중 누군가 팔을 세게 쳐서 꿈에서 깨어났다. 당연히 방에는 나밖에 없었는데도 팔을 맞은 촉감은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유령이든 수호천사든 악몽에서 깨도록 도와준 셈이니 나에게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초자연적인 경험은 일본에서 먼저 겪었다. <팬텀> 회의를 위해 다카라즈카에 갔을 때 현지 숙소에 ‘팬텀’ 에릭이 방문한 것이다. 무언가가 일정한 패턴으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흡사 모르스 신호 같은 소리의 정체를 알기 위해 문으로 다가간 순간 그것은 옆방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하지만 침대로 돌아오면 다시 가까워지는 소리 때문에 그날은 잠을 포기하고 꼬박 밤을 샜다. 나중에 일본 스태프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에릭이 찾아온 것이 아니냐고 해석을 했다. 이후 일정 조율을 위해 출장을 미뤘는데, 그날 태풍으로 간사이 공항이 쑥대밭이 되고 매번 극장으로 가는 다리가 붕괴한 것을 보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때의 모르스 신호가 에릭이 내게 남긴 경고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다시 시작할 동력을 얻은 시간
중국과 일본에서의 첫 공연 후 언론 매체나 평단의 반응이 어떨지, 현지 스태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관객들은 어떻게 볼지 신인처럼 두근두근 했다. <꽃처럼 지는 청춘>은 상하이 음악청에서 시도하는 자체 제작 뮤지컬의 시발점에 한국 아티스트가 함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올해 딤프에 참여할 예정이라 한국에서 다시 만나면 더욱 반가울 것 같다. <팬텀>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변화를 모색한 결과물이라는 점이 뿌듯하다. 
이런 양국에서의 작업은 앞으로 영상디자이너로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건, 그들이 작품에 임하는 태도에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은 그 언어만큼이나 다른 색깔을 지닌 나라지만, 공통적인 점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각 파트의 사람들이 타협하며 조율하는 ‘원 팀 정신’이었다. 디자이너 개인의 독창성이나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가 오로지 작품에 녹아들기만을 바라며 ‘요소’로서의 자신을 납득하고 노력한다는 점이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파트 간 불필요한 힘겨루기나 불협화음이 없는 이런 환경에선 목소리를 높이거나 인상을 찌푸릴 일이 없다. ‘일을 즐긴다’라는 것이 단지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실에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말임을 깨달으며, 나도 그런 ‘원 팀’의 일부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활동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해외 활동에서 얻은 또 하나의 성과는 건강하게 일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내가 일하는 방식은 ‘안 먹고, 안 자고, 못 싸는(?)’ 고행(苦行)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특히 중국에서) 푸짐하고 맛도 훌륭한 음식들을 마음껏 먹으면서 하루에 ‘육변’을 할 정도로 장이 건강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면서 오랫동안 건강하고 즐겁게 일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녹록지 않았던 이번 장기 프로젝트의 끝에서 만난 가장 큰 선물은 다카라즈카 관객 중 한 분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거창한 말이 아닌 ‘참여해줘서 고맙다’는 그 한마디 말은 내게 최고의 찬사이자 위로였다. 많은 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나눠주는 일이 나의 역할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 말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5호 2019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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