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를 찾아서
섬세한 감성을 지닌 배우 서영주가 갖고 있는 무대 위의 얼굴은 몇 개나 될까. 감수성 예민하고 한없이 나약한 베르테르와 사랑하는 아내를 힘없이 빼앗기고 눈까지 멀게 된 도미, 여린 듯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기품의 고종, 사사건건 둘리 일행을 괴롭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고길동, 넘치는 끼와 유머로 웃음을 선사한 버질 신부, 감초 같은 연기로 극에 활기를 더한 극장주 앙드레, 라이델 고등학교의 자유분방한 날라리 학생 케니키…. 1990년 연극 <우리읍내>로 데뷔한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서정적인 멜로부터 역사극, 코미디까지 어느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다양한 무대 위에서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지난해 <오페라의 유령>의 앙드레 역으로 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라 농익은 연기를 선보인 데 이어 최근 리바이벌 무대에 오른 <뉴 씨저스 패밀리>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박치기 역으로 또 한번 능글맞은 연기를 펼치며 웃음을 주고 있는 서영주를
“우리 애가 왔으면 좋아했겠는데요.” <미라클 아트> 전시를 둘러보던 서영주가 문득 한마디 건넨다. 그림 속 주인공들과 다양한 눈속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관람객들을 보니 문득 어린이집에 있을 네 살 난 아들 생각이 났나보다. 쉬는 날이면 아들과 함께 체험 전시장을 자주 찾는다는 그는 얼마 전에도 세계 악기 감성 체험전 <시끌벅적 악기궁전>에 다녀왔다며 웃었다. 서영주와 함께 관람한 <미라클 아트>는 보통의 그림 전시와는 달리, 원근법과 색의 음영, 빛의 효과 등을 이용해 관람객들이 보고 만지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유쾌한 아트 체험전이다. 그림 속에서 사물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트롱프뢰유(Trompe L`oeil)’가 대표적인 장르. 풍선처럼 얼굴이 부풀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확성기 소리에 비명을 지르는 뭉크의 『절규』, 진공청소기로 보석 같은 꽃잎들을 빨아들이는 클림트의 『키스』, 한 조각 퍼즐만 더 맞추면 완성되는 고흐의 『해바라기』 등 명화를 패러디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패러디 아트존에 들어섰다. 그림들을 둘러보던 서영주는 도르레를 이용해 샤갈의 ‘생일’ 속 남자 주인공을 묶은 밧줄을 잡아당기는 포즈를 취해본다. “명화들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재해석한 게 재밌네요. 개인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해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작가 개인적인 시각이 담겨 있는 데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보니 편해지지가 않는 것 같아요. 이렇게 그림 속에 직접 참여하는 전시는 처음인데, 어린아이들한테도 재밌는 공부가 될 것 같아요.”
신화 속 인물들을 바로 곁에서 훔쳐보는 듯한 재미를 준 신화 아트와 각도에 따라 보는 재미가 달라지는 거울트릭 아트존을 지나, 그리스 신화 어드벤처존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죽음의 신 하데스를 물리치기 위해 히드라가 삼킨 제우스의 검을 찾아 나선 한 인간의 도전과 모험을 담은 스무 개의 대형 그라피티(Graffiti, 벽이나 지하철 등에서 낙서처럼 휘갈겨 쓴 글씨 또는 그림)가 전시되어 있었다. 하데스가 마치 <이상한 나라의 폴>에 등장하는 마왕을 닮았다며 웃던 그는 “어릴 땐 누구나 그렇듯이 만화영화를 좋아했어요. <태권 브이>, <아톰>, <마징가 제트>…. 대부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캐릭터들이었죠. 근데 <플란다스의 개>는 안 좋아했어요. 네로와 할아버지한테 자꾸 안 좋은 일만 생기니 답답하고 안쓰러워서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무슨 만화가 그래….” 하며 어린 시절을 추억했다. 워낙 동안인 탓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는 올해로 데뷔 21년 차의 배우였다. 어느덧 선배보다 따르는 후배가 훨씬 더 많아졌지만 ‘형’ 또는 ‘오빠’라는 호칭이 여전히 자연스럽고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작년에 <오페라의 유령> 할 때 갑자기 주위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깜짝 놀랐어요. 아직 누굴 가르쳐본 적도 없는데 나이 많다고 호칭까지 바꾸면 쓰나요.(웃음) 근데 올해부터는 학교에 나가게 될 것 같아요. 진짜 선생님이 되는 거죠.” 올해부터 복이 들어오는 시기로 나왔다는 그의 사주 풀이가 실제로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아닐까. 역시 같은 마음인지 서영주는 “이제는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을 고수하고 싶다”는 조금은 뜻밖의 바람을 덧붙였다. 지난 20여 년을 뮤지컬 배우로 살아오면서 한 가지 이미지에 국한되기보다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역할에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나. “연기를 하는 데 도움도 많이 됐고 성취감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서영주라는 배우를 떠올렸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 제가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싶어요. 서정성 있는 멜로 이미지, 베르테르나 도미, 고종 같은 역할들 말이죠. 아, 뮤지컬뿐만 아니라 영화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연기 영역도 넓히고 연기자로서 인정도 받고 싶고…. 그동안 너무 하나밖에 모르고 살았지만 이제는 좀 바꿔보려고요.(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0호 2011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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