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형 동욱의 마흔 번째 생일, 바쁘다는 핑계로 동생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아직 외롭게 혼자인 동욱 앞에 칠년 만에 막내 동생 동현이 나타난다. 여기에 갑작스런 방문으로 형제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유미리가 더해져, 창작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이하 사비타)>가 완성된다. 올해로 17주년을 맞으며, 곧 4,000회 공연을 앞두고 있는 <사비타>가 일년여의 휴식 뒤에 앙코르 공연되고 있다. 그간 <사비타>를 빛냈던 역사적인(?) 배우들을 비롯해 풋풋함과 신선함으로 무장한 뉴페이스들이 참여해, 이번 <사비타>에는 숙성된 맛과 아삭한 맛이 골고루 담겼다. 특히 원조 동욱, 김성기와 김장섭, 두 배우가 돌아와 <사비타>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어서 그들의 어제와 오늘, 또 내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기자 오랜만에 뮤지컬 무대에 서니 기분이 어떠세요?
김장섭 배우로서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죠. 저는 사실 연출가로서 외도를 좀 길게 해서 무대에 서는 게 3~4년만인데, 연출보단 배우가 나은 것 같아요. 속 편하고. (웃음)
기자 2009년까지 롱런했던 <사비타>가 잠시 휴식기를 가졌는데, <사비타> 앙코르 공연에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김장섭 글쎄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웃음)
김성기 전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사비타>에서 물러난 지 7년 정도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내가 이걸 해도 되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극 중 동욱의 나이가 마흔인데, 저는 이제 마흔 중반을 넘었고. 하긴, 뭐 유미리 역의 배우는 이미 서른 중반이 되었으니, 저도 할 수 있겠네요. (웃음) 시간이 많이 흘러서 감도 많이 떨어진 것 같지만, 연습하면서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좋아요.
기자 연습실에서 예전에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도 만나고, 또 처음 함께하는 배우들도 있죠?
김장섭 기존의 멤버들은 연기하던 틀이 정해져 있어서 편하고, 새로운 배우들과 연기하다보면 또 다른 무언가가 나와서 재밌어요. (최)성원이랑 (백)민정이와 있으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짐작되니까 서로 편해요. 그런데 새로운 배우들에게선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긴장되고 재밌죠.
김성기 요즘 젊은 배우들은 표현력이 좋아요. 습득 속도도 빠르고. 예전에 함께했던 배우들은 서로를 정말 잘 알기 때문에 쉽게 풀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신인 배우들과 연습하다보면 ‘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고 배우기도 하죠.
김장섭 오랜만에 <사비타> 연습을 하다보니까 ‘아, 예전에 이랬지’ 하고 잃어버렸던 기억을 하나씩 찾게 돼요. 상대 배우들이 갖고 있던 습관도 보이고. (최)성원이는 아직도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갖고 있더라고.
그땐 그랬지
기자 두 분 모두 <사비타> 공연을 오래 하셨죠?
김성기 저는 <사비타>에 참여하기 위해 10년 동안 몸담고 있던 서울예술단을 나왔어요. 그때 쌍둥이를 키우는 데 돈이 엄청 들어갈 때여서 서울예술단을 박차고 나오기가 정말 힘들었는데(일동 웃음), 새로운 배역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어요. 그렇게 이 작품을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사비타>를 통해서 성장한 것 같아요.
김장섭 저는 이 작품으로 남우주연상도 받았으니 개인적으로는 참 고마운 작품이죠. <사비타> 공연을 하면서 철든 것 같아요. (웃음)
김성기 제가 공연 중에 허리 부상을 당한 적이 있어요. 그때 동욱 역은 나 혼자였어요. 그러니 나 대신 무대에 설 사람이 필요한데, 당장 공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장섭이밖에 없었어요.
김장섭 그래서 제가 그 다음 날 바로 <사비타>에 투입됐죠. 저는 2002년에 <사비타>에 처음으로 참여했어요. 이후 유씨어터와 인켈아트홀에서 (성기)형님이 공연할 때 저는 쉬었는데 형이 다쳤다고 해서…. 형님께 인수인계받고 거의 일 년을 저랑 김정민 배우가 동욱 역할을 맡았죠.
김성기 그때 동현 역의 배우는 일곱 명이었고 동욱은 나 혼자였으니, 동생을 바꿔가며 계속 공연한 피로가 누적되었던 거죠. 별것도 아닌, 전화 받는 장면에서 허리가 삐끗한 바람에….
기자 당시에 주로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은 누구인가요?
김성기 초창기에는 서범석과 양소민.
김장섭 제 첫 번째 파트너는 박건형이었고, 가장 많이 함께한 건 최성원과 엄기준.
김성기 저도 유씨어터랑 인켈아트홀에서 (최)성원이랑 많이 했어요. (김)다현이도.
김장섭 이제 이름도 다 기억 안 나요. 정말 많은 배우들이 <사비타>를 거쳐 가서.
기자 오래 공연한 만큼 에피소드도 무척 많겠어요.
김성기 다 에피소드 같아서 뭘 꼽아서 말할 수가 없어요.
김장섭 저 같은 경우는 엄기준, 양소민과 공연할 때, 우리가 얼마나 호흡을 빨리 잘 맞추는지 기록을 세워본 적이 있어요. 등퇴장 사이에 틈을 주지 않고, 제가 퇴장하자마자 기준이가 들어와서 대사하는 식으로, 한번 맘먹고 으다다닥 끝내본 적이 있죠. 러닝 타임이 90분인데 그때 30분 정도 일찍 끝냈던가?
김성기 관객들이 내용을 이해하긴 했어?
김장섭 대기록을 세우고 엄청 혼났죠.
김성기 예전 기억들, 너무 오래 돼서 다 잊어버렸어요. 그 당시에는 배꼽을 쥐고 웃거나 또 심각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리가 참 많이 웃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장섭 참, 공연 초반에 요리 노래가 있어요. 소라 조림 만드는 법을 노래로 설명하는 건데, 어느 날은 가사를 잊어버려서 감자도 넣고 뭐도 넣고 모든 재료를 다 넣은 짬뽕탕을 만들어버린 적이 있죠.
김성기 피아노 배우는 데 한 세 달 걸렸나? 연주가 잘되면 뿌듯하지만, 피아노 연주가 너무 어려워서 정말 잠도 못 잤어요.
김장섭 정말 피아노 연주 신만 아니면 더 편하게 연기할 수 있을 거야. 바이올린 연주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죠. (일동 웃음)
기자 생일 파티 장면에서 보여주는 개인기도 때때마다 유행을 따르죠?
김장섭 아유, 그것도 스트레스예요. 처음에 룰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이유 3단 고음까지 합니다.
김성기 유일하게 시대가 변해도 안 바뀌는 분이 있어요, 나훈아! 그분은 꼭 등장해, 국민 대표 가수니까.
김장섭 그날그날에 맞춰서 동욱과 동현이 요즘은 누가 이슈인가를 찾아서 아이디어를 내서 정하곤 해요.
김성기 정작 이거 하자고 약속해놓고 딴 거 하기도 하고.
<사비타>와 함께한 시간
김장섭 <사비타>를 거쳐 간 배우 리스트를 뽑아보니 60명이 넘더라고요. 그리고 그 배우들이 대부분 잘됐어요. 정말 작품의 힘인 것 같아요. 젊은 배우들이 <사비타>를 통해서 스타의 대열로 올라선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 동현 역을 맡았던 친구들은 지금 거의 주연 배우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모임을 한번 가지려고요. 역대 <사비타> 배우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한번 해볼까 하고요.
김성기 공연 문화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가서 콘서트를 한다든가, 뭐 그런 걸 구상하고 있어요.
김장섭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다든지 여러 가지 생각은 있는데, 일단은 한번 모여 보려고요. 형님과 저는 나이가 있으니까 이사직 정도로 물러서고, 재력이 있는 홍록기를 회장으로 두고. (웃음) 근데 동욱 역할을 한 배우가 제일 적더라고요. 열 명 정도? 동생 역할이 멋있으니 젊은 배우들은 그 역을 좋아하죠.
김성기 나는 동현과 유미리가 함께 부르는 ‘언제나 그땐’이 지금도 참 좋아요. 그 곡의 반주가 나오면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 같고. 그런 추억을 노래하는 동생 역이 탐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동생 역을 할 수가 없었어요. (웃음)
기자 그런 점이 아쉽겠어요. ‘내가 조금만 더 젊었을 때 이 공연을 했다면’ 하고요.
김성기 그렇죠.
김장섭 나이가 있는데도 동생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도 있어요. 정찬우나 서범석! 동현 역을 했던 배우들이 십년 후엔 동욱 역할 하는 거지. 사람은 다 늙는 건데.
김성기 그런데 범석이는 안 하려고 한다니까. (일동 웃음)
김장섭 지금 저는 동욱 역할이 더 좋아요. 하면 할수록 저도 모르게 연기가 깊어지는 것 같아요. 극 중 동욱의 나이가 마흔이긴 하지만, 그의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우리가 쉰 살은 되어야 동욱이 지닌 깊은 마음이 진정 연기로 우러나올 것 같거든요. 우리 쉰 살까지 아직 많이 남았어. 더 해도 돼. (웃음)
기자 극 중 동욱은 동생들에게 부모 같은 존재죠?
김장섭 그렇죠. 그리고 공연이 아닌 현실에서도 그래요. 저희가 많은 동생들을 다 연습시키다보면 동욱과 같은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니까요.
김성기 정말 나이가 들다보니, 동욱을 통해 그런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가정적으로 동생들을 돌보기만 하면서, 왜 꿈을 포기하고 살았는지. 이래서 나이 먹었다고 하나 봐요.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예전에는 좋은 애드리브로 더 많이 웃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김장섭 정말 그래요. 예전 같았음 그냥 흘려보냈을 것을 이젠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놓치지 않고 보게 돼요. 그리고 더욱 작품 안으로 내려앉아서 진실된 자세를 갖게 되고요.
김성기 이게 세월이 주는 교훈 같아요. 예전에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 못했을 거예요. 그동안은 재미와 테크닉만 추구했다면, 지금은 테크닉은 조금 떨어졌더라도 진실성을 찾고 싶어요.
김장섭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는 ‘셋 중 누가 더 잘할까, 내가 더 잘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른 두 사람이 더 잘했으면 좋겠어요.
김성기 저희 둘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없거든요. 지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우리 둘이 같은 마음이네요. 동생들 편하게 해주고, 저는 제 자리를 잘 지키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김장섭 이게 예전과의 차이죠. 늙었다는 것.
김성기 우리 자꾸 이러지 말자. 우리도 갈 길이 멀어.
김장섭 예전엔 솔직히 샘도 나고 그랬죠. 똑같이 열심히 하는데 동현 역의 배우들에게만 팬들이 와서 선물 주고…. 그런데 지금은 뭐, 애들 것 뺏어먹으면 돼요. (일동 웃음)
김성기 <사비타>가 참 재밌지만 힘도 많이 들어요. 농익게 잘 놀아야 하고, 형제애도 느낄 수 있게 해야 하고, 90분 동안 표현할 것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한 시간 반 동안 조명 받고 있는 것도 힘들어요.
김장섭 그래서 나 머리도 빠지고 있고. (웃음)
김성기 대극장은 조명이 좀 멀리 있는데, 소극장은 정말 뙤약볕에서 공연하는 것 같아요. 주근깨가 많이 생겨. (웃음)
김장섭 괜찮아, 주근깨가 많을수록 연륜도 느껴지고, 좋은 거야. 아, 갑자기 우울해지네. (일동 웃음)
함께 서는 무대
김장섭 참, 이번에 우연찮게 <몬테크리스토>에서 파리아 신부 역에 더블 캐스팅되고, 우리 인연이 있나봐.
김성기 각자 서로의 일을 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어서 오랜만에 만났어요. 요 근래 자주 만나고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 친구 하나 얻은 것 같아요.
기자 두 작품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 듣고 어떠셨어요?
김성기 정작 우린 무덤덤한데 외부에서는 재밌게 보는 듯해요.
김장섭 우리 나이의 배우가 많이 없어서 그래.
김성기 저는, 욕심 같아선, 20년 더 연기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제 연배의 배우들이 몇 명 더 있는데 그들과 무대 생활을 오래 같이하고 싶어요. 우리가 빨리 그만뒀으면 하는 배우들도 있을까?
김장섭 에이. 제가 연출을 해보니까 선배 배우들이 무대에 있어줘야 작품에 무게감이 있고, 후배들도 보고 배울 수 있어요.
김성기 저의 바람도 그거예요. 조역이든 뭐든 열심히 하고 싶고, 관객들이 ‘아, 저 배우가 나왔구나’ 하고 알아봐주시고 믿어주신다면 얼마든지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자 두 분이 같은 역할을 연기해도 다른 색깔일 것 같아요. 서로에게서 본 장단점을 이야기해주세요.
김성기 저희는 서로의 연기를 봐주고 이야기를 많이 해요. 예전 같았으면 내 연습만 하고 갔을 텐데, 지금은 많이 변했죠.
김장섭 캐릭터에 대해서 많이 논의해요. 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도 비슷해요. 그런데 그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저와 형의 컬러가 다른데, 그 둘을 섞으려고 하기보다는, 형이 가진 좋은 아이디어를 제게 맞도록 바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경쟁심을 갖고 상대보다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 서로의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받아들여요.
김성기 각자가 갖고 있는 목소리나 말투 등의 차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서로의 좋은 점은 내 것으로 흡수해야죠. 다른 사람의 장점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장점들이 보여요. 과거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해서인지 사람들을 대충 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공연에서든 일상에서든 자세히 살펴보게 돼요. 장점도 많이 찾게 되고…. 장섭이는 노래도 볼륨감 있게 잘하고, 무대에서 늘 여유롭고, 또 잘생겼잖아요.
김장섭 형은 성악을 전공했지만 20년 넘게 연기를 한 덕에, 이번에 새삼 느낀 것이지만, 노래와 연기에서 참 많은 걸 갖추고 있는 선배예요. 그리고 무대에서 여유롭고 재미있고.
김성기 그리고 장섭이는 후배들 통솔력이 있어요. 난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부러워.
기자 지금 앙상블 하는 후배들과는 나이나 경력 차가 정말 많이 나는데,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이고 싶으세요?
김장섭 우리가 무대에서 열심히 하면 후배들이 알아서 보고 배울 거라고 생각해요. 후배들을 가르친다거나 그럴 게 아니라, 저 스스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선배의 모습이겠죠. 나이가 들면서 맡을 수 있는 배역에 한계가 있을 테지만, 더 깊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무대에만 올라가면 좋더라고요. 무대에서 내 인생을 즐긴다면 그걸로 좋은 거죠.
김성기 저는 지금이 시작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까, 그걸 표현해내야 할 것 같아요. ‘지금부터다.’ 더 건강해지고 싶고 더 오래오래 무대에 살아 숨 쉬고 싶어요.
김장섭 운동도 하고 말이죠. 그나저나 우리 둘 표지 모델은 언제 하는 거예요? 만날 젊은 배우들만 하고 속상해. (일동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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