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데레우스> 신성민, 그가 그리는 우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한 우주가 다른 우주를 만나는 것과 같다. 인터뷰 중 신성민이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데, 배우가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것 역시 어쩌면 우주를 만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데레우스>라는 세계를 만난 그의 우주는 어디까지 확장될까.
무리하지 않는 즐거움
지난해에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활동 영역을 한 뼘 넓혔어요. 연극, 뮤지컬, 드라마, 다양한 장르 활동을 경험하면서 신성민이라는 배우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드라마는 경험 정도 했다고 할 수 있지, 크게 무언가를 한 건 아니라서…. 아, 물론 무대에서도 크게 무언가를 한 건 아닙니다. (웃음) 배우는 어쨌거나 선택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활동 범위가 넓을수록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장르마다 연기 테크닉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각각 연기하는 재미도 다르고요. 하지만 지금 저한테 어떤 장르가 가장 재미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무래도 무대 공연이에요. 연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에게 그 인물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무대에서는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저만의 리듬을 만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드라마를 계속하다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요.
활동 이력을 쭉 살펴봤을 때 개인적으론 한 번에 한 작품씩만 하는 게 좀 신선했어요. 요즘 배우들은 다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 싶기도 했고요. 저도 제 능력이 욕심을 따라줬으면 좋겠어요. 근데 안 되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저는 한 작품에 최선을 다했을 때의 기쁨이 더 큰 것 같아요. 다른 두 작품을 오갈 때의 카타르시스가 분명히 있겠지만, 저는 하나에 집중했을 때 개인적 만족감이 더 커요. 아, 근데 저도 <유도소년> 때 <킬 미 나우>를 겹쳐서 해본 적이 있어요. 원래 보통은 공연 시기가 겹치면 ‘내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포기하는 편인데, <킬 미 나우>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영영 못할 것 같더라고요. 다행히 <유도소년> 막바지 한 주만 겹치는 일정이기도 했고, 마침 <킬 미 나우>에 의지할 동료 배우들이 많아서 믿고 갈 수 있었죠.
2010년 데뷔 이후 매해 무대에 섰지만, 뮤지컬은 거의 4년 만이잖아요. 연극보다 뮤지컬을 선택할 때 더욱 신중했던 걸까요? 아뇨, 꼭 그렇진 않아요. 그런데 의도치 않게 연극 한 편을 할 때마다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연결 고리가 생겼어요. 그렇게 몇 편 하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더라고요. 2015년에 공연한 연극 <나무 위의 군대>가 그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생긴 인연으로 <카포네 트릴로지>, <벙커 트릴로지>, <유도소년>, <킬 미 나우>까지 쭉 이어졌어요. 그동안 뮤지컬 제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미 결정된 작품이 있다 보니 번번이 고사할 수밖에 없었죠.
최근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작품을 선택할 때 함께하는 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요? 저는 기본적으로 배우는 선택하는 쪽보다 선택받는 쪽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 제안을 받을 때마다 감사한데, 몸이 하나다 보니 불가피하게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가 있어요.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이런 상황에서 대본이나 캐릭터를 우선적으로 봤다면, 지금은 같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나 신뢰가 좀 더 중요하게 작용해요. 좋은 작품이 나오려면 다 같이 ‘파이팅’할 수 있는 팀워크가 중요한 것 같거든요. 특히 초연인 경우에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서 답을 찾아가는 게 좋아요. 그래야 제 자신도 무언가 배우면서 단점을 보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것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에요. 모든 일이 그렇듯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 그리고 제 상태예요. (웃음)
<시데레우스> 출연을 결정하는 데도 타이밍이 중요하게 작용했을까요?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출연했던 연극 작품들을 다 너무 재미있게 했는지 뮤지컬 무대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새가 많이 없었어요. 연극도, 뮤지컬도, 큰 맥락에서는 같은 무대 공연이라 두 장르를 따로 구분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팬분들은 제가 뮤지컬에 출연하는 걸 보고 싶으셨나 봐요.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어요’라는 말로 상황을 넘겼는데, 문득 내가 너무 내 개인적인 행복만 추구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 뮤지컬로 배우 생활을 시작해서 뮤지컬 덕분에 과분한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팬분들이 열어준 작년 생일 파티에서 올해는 뮤지컬을 꼭 하겠다고 했다가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때 마침 이 작품을 제안받게 된 거예요. 대본을 읽어보니 새로운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참여하게 됐죠.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된 부분은 없었나요? 아무래도 초연이다 보니까 작품이 완성형이 아니잖아요. 어떤 방향으로 작품이 완성되어 갈지, 그 안에서 내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은 들었죠. 아, 그리고 이 작품 대본을 읽었을 때 더욱 마음에 들어왔던 이유는 전작 <벙커 트릴로지>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전쟁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다루는 작품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좀 피폐해져 있었다고 해야 하나. 차기작으론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더라고요. 물론 <시데레우스> 역시 사회에서 금기하는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마냥 따뜻한 작품이라곤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작품의 톤 자체는 따뜻한 면이 있어요. 긍정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작품이에요.
심플함이 주는 행복
작품을 정할 때 오래 고민하는 편이 아닌가 봐요? 이 작품은 내가 할 수 있다, 또는 할 수 없다, 대본을 보면 이런 판단은 빨리 서는 편이에요. 왜냐면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제가 생각하는 기준선을 넘는 작품이라면 나머지 결과는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거든요. 그래서 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죠. 다만 회사에 소속된 입장에서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빠른 회신을 할 수 없을 때는 제작사에 양해를 구해요. 근데 작품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고민을 잘 안 해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고민을 해서 고민이 해결되면 세상에 고민은 없을 거라고.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살면서 고민을 안 할 순 없겠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게 좋을 듯싶어요. 괜히 이것저것 고민하면 해야 할 일에 집중도 못하고 엉뚱한 스트레스만 생기잖아요.
이번에 연기할 케플러는 수백 년 전에 실존했던 인물이잖아요. 배우는 흔히 다양한 인생을 사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케플러가 17세기 독일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건 맞지만, 역사적 고증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좀 새로워요. 연습을 시작한 지 이제 3주 정도 됐는데, 앞으로 캐릭터가 어떻게 완성될지 솔직히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 작품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 무게를 둘 것 같아요. 저희 작품 속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천동설이 지배하고 있던 중세 사회에 금기시되던 지동설의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본 갈릴레오와 케플러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 왔는지 묻는 거죠. 저 역시 이번에 제가 가진 세상을 향한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어요.
케플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뭐예요? 케플러는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연구에 갈릴레오를 끌어들이는 인물이에요. 갈릴레오도 처음에는 지동설을 묵인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무엇보다 케플러가 우주 체계를 연구하려는 이유가 뭔지 관객들에게 확실히 설명돼야 할 것 같아요. 극 초반, 수학자가 왜 그렇게 별에 집착하느냐는 질문에 케플러가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 말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관객들이 그 말에 설득돼야 이후 전개될 이야기를 쉽게 따라갈 수 있거든요. 케플러가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갈릴레오와의 관계성,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 중이에요.
특정 분야가 배경이 되는 작품을 할 때, 만약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작품에 어떻게 접근해 가요? 제가 속해 있는 소모임 ‘하고 싶다’ 배우들이 우주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레 조금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은데… 솔직히 우주나 별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은 없어요. (웃음) 요즘 최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이 작품은 단순히 자료를 많이 찾아봐서 될 게 아닌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이, 갈릴레오와 케플러라는 인물을 통해 세상과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니까요.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드라마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죠. 만약 관객분들이 저희 공연을 보면서 ‘유클리드 기하학? 코페르니쿠스? 그게 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저희는 실패한 거예요. 천문학이나 수학에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어야 성공인 거죠. 물론 저는 연기하는 입장에서 케플러라는 학자와 그의 삶에 대해 알고 있어야겠지만요.
관객들이 보게 될 케플러와 신성민 사이에 닮은 점과 다른 점이 있나요? 케플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연기했던 모든 인물들이 저랑 맞닿아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되게 달라요. 아이러니한 말인데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터뷰 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을 잘 못하겠어요. 저는 항상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제 자신에 대한 정의를 잘 못 내리겠더라고요. 왜냐면 사람은 보통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럴 땐 이렇다가, 저럴 땐 저렇다가. 특히 저는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이런 질문이 되게 어려워요. 게다가 케플러는 아직 연습 초반이라 더 많은 인물 연구가 필요하고요.
누군가를 정의할 때 그 결과 값은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나라는 사람의 성질이 있다면 뭘까요? 아, 진짜 어렵다. 뭐가 있지. 주위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는, 착하다? (웃음)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려니까 좀 우습지만, 아마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근데 예의를 지키려다 오히려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봐요. 깊게 알고 봐야 착하다는 이야기를 듣죠. (웃음) 사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저라는 사람은 ‘오픈형’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경험이 쌓이다 보니 공연이 누군가에겐 비즈니스라고 해도 이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감정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분명히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서로 교감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점점 오픈 마인드가 되어간 것 같아요. 공연 하나를 끝냈을 때, 다른 것보다 작품하고 사람이 남는 게 좋아요. 그것만큼 재산이 되는 게 없죠.
그럼 질문을 바꿔서,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때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있을까요? 저도 제 자신한테 이런 질문을 참 많이 해봤어요. 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끝까지 지키고 싶은 가치는 뭔지 등등. 그런데 아직 제 자신을 찾아가는 단계인지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어쩌면 그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도 못 하지 않을까요. 생각에는 완료형이 없잖아요. 물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신념도 있지만, 확고한 신념, 이런 말은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요. 어떤 하나의 정의에 저를 가두는 대신 아직은 좀 더 열려 있고 싶고, 좀 더 자유롭고 싶어요.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하고 싶은 작품은 항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요. 기존에 했던 작품을 다시 하거나 아예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는 작품이거나. 어떤 작품이든 끝나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거든요. 그래서 타이밍이 맞는다면 기존에 했던 작품을 아쉬움 없이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전에 해보지 않은 작품은 대본을 읽었을 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못 해봤던 새로운 거다’라는 느낌이 드는 게 좋아요.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제 나름대로는 변주를 해왔지만, 확실한 도전 같은 작품을 만날 때 재미있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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