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김소현, 순백의 드레스를 벗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청초한 히로인. 강렬했던 데뷔작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 초연을 함께했던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 이후 관객들은 당연하게 김소현에게서 공주님 이미지를 떠올리고 또 기대해 왔다. 하지만 김소현은 그러한 대중의 시선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춤출 줄 알았다. 화려하지만 비극적인 삶을 산 황후 엘리자벳으로, 코믹하고 발랄한 마녀 글린다로, 나라와 황실을 지키기 위해 굳은 의지를 다지는 명성황후로. 뜻밖의 역할에서 개성을 살려 영리한 줄타기를 펼치면서 자신의 무대를 확장해 온 김소현. 이제 그 여정의 최전선에 안나 카레니나가 놓였다.
과감한 변신
“<더뮤지컬> 커버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을 받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어요. 오 마이 갓! 사랑합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커버 촬영을 해왔지만 배우에게, 그것도 타이틀롤을 심심치 않게 맡아온 뮤지컬 스타에게 이렇게 솔직한 기쁨과 감사의 인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꾸밈없는 말투에 웃음이 많은 조금은 말괄량이 같은 모습. 김소현의 실제 성격은 그가 무대에서 곧잘 연기해 온 우아한 상류층 아가씨와는 다르다. “데뷔하고 5년쯤 됐을 때, 젊은 남자 관객이 공연 끝나고 절 만나러 왔어요. 팬이라며 초상화와 꽃다발, 편지를 가져오셨는데, 제 실제 모습에 충격을 받으셨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서시더라고요. 그걸 보니 죄송했지만 평소에도 무대 위에서처럼 꾸며진 이미지대로 살 순 없잖아요. 전 숨기지 않아요. 왜 숨겨요? 나는 난데!” 그러고는 깔깔 웃던 그가 문득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덧붙인다. “그렇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이런 모습을 다 버려야 해요.”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사교계의 여왕 안나가 고위층 관료의 아내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위험한 사랑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그에 맞춰 이번 화보 촬영도 꽤 도전적인 컨셉을 잡았다. 깨끗하게 드러낸 이마, 등이 파인 드레스, 활짝 웃지 않는 얼굴. 모두 이전까지 김소현이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다. 그럼에도 김소현은 이런 컨셉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전에 보여드리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안나를 연기한다는 소식에 ‘김소현이?’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오디션장에서 만난 러시아 연출님도 같은 걱정을 하셨어요. 첫인상만 봐서는 밝고 여린 이미지인데, 네 안의 어두움과 카리스마를 끌어내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제가 앞서 연기한 엘리자벳, 명성황후도 그런 면이 있었잖아요. 걱정 마시라고 ‘아임 베리 스트롱!’이라고 말씀드렸죠. (웃음)”
그의 말대로 초연 캐스트와는 확연히 다른 색깔의 배우 김소현이 안나 역에 캐스팅된 사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소현은 자신만의 안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어떤 공연이든 초연 캐스트가 정석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도 원래는 성악 전공자를 위한 역할이 아니었는데, 제가 초연에서 엠마를 맡으면서 그게 정답인 것처럼 인식되었죠. 하지만 연기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전작 <엘리자벳> 때도 세 배우의 엘리자벳이 각각 개성이 뚜렷해서 관객분들이 더 좋아하셨거든요. 선입견을 내려놓고 온전히 김소현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러 오시면 좋겠어요.”
현실과 무대의 거리
촬영과 인터뷰가 이뤄진 날은 아직 공연 연습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김소현은 이미 철저한 사전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원작 소설을 읽고, 작품에 관련된 자료와 논문을 읽고, 영화는 그레타 가르보, 비비언 리, 소피 마르소,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버전을 모두 섭렵했다. “공연이라는 건 100점이 없잖아요. 그래서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최대한 많은 공부를 하려고 해요. <명성황후> 때는 조선 시대 복식과 예법을 공부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때는 왜 그 시절에 향수와 가발이 유행했는지 공부했고… 별별 걸 다 찾아봤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항상 두꺼운 자료집을 만들고 끝나요. 지금은 그 시작 단계에 있어요.”
아직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인 만큼 캐릭터를 열어둔 상태지만, 그가 혼자 공부하며 생각하고 느낀 점을 통해 김소현의 안나가 어떤 모습일지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왜 바람을 피우게 됐을까? 제 생각에 안나는 지나치게 안정된 삶에 자기도 모르게 답답함을 느낀 것 같아요. 매일 쳇바퀴 돌듯 똑같은 일상에 숨이 막혔던 거죠. 그래서 더 파티를 즐긴 게 아닐까요.”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채워지지 않았던 내면의 갈증. 그런 안나의 욕망은 브론스키를 만나면서 비로소 터져 나온다. “카레닌은 흔히 말하는 이상적인 남편의 기준에 딱 맞는 사람이에요. 안전하고 든든하죠. 뿌리가 깊은 고목나무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반면 브론스키는 야생화처럼 느껴져요. 독이 있는 걸 알면서도 꺾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꽃이요. 안나가 그 욕망을 완강하게 거부하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싶어요.”
불륜을 저지르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히 부도덕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른 인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짓을 저지른 인물이라도 공연장 안에서 만큼은 연민의 정이 느껴지게끔 만드는 게 배우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흔히 ‘악녀’로 치부되는 인물을 관객이 공감하고 함께 눈물 흘릴 수 있게 연기하려면 대사 하나하나의 뉘앙스까지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해요. 이전에 연기한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 명성황후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지닌 역할이었죠. 그중에서도 <안나 카레니나>가 유독 어려운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관객이 안나에게 공감하게 만들려면 그의 욕망만이 아니라 내적 갈등과 고통, 가족에 대한 죄책감, 브론스키에 대한 배신감 등 겹겹의 마음이 잘 표현돼야 할 것 같아요.”
실제 김소현의 삶은 안나 카레니나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놓여 있다. 그와 남편 손준호는 뮤지컬계가 낳은 대표적인 스타 부부로, TV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단란한 가족의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다. 김소현도 현실과 무대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을 인정했다. “캐릭터와 부딪치는 지점이 있어요. 일단 저는 브론스키 같은 연하 남편과 살고 있어서 안나에게 공감하기가 참 힘들고요. (웃음) 또 실제로 여덟 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는 만큼, 아이를 등지고 떠나는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상상이 안 돼요. 게다가 저는 일할 때 말고는 살림과 육아에만 매달리고 사교 모임에도 잘 안 나가거든요. 이 거리감을 극복하는 게 저에게 주어진 큰 숙제예요. 그 어느 때보다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있어요.” 김소현은 팬들과 함께 원작 소설을 읽고 독서 토론회도 가질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자기 삶의 틀에서 벗어나 다각도에서 안나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여러 연령대와 성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만큼 다양한 견해를 들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요.” 팬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는 처음이라는 김소현의 말에서 새로운 역할을 대하는 그의 진지함과 설렘이 묻어났다.
여성 배우의 삶
김소현에게도 안나처럼 주위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질주한 경험이 있다. 바로 이 뮤지컬 무대를 향해서 말이다. 성악가를 꿈꾸던 그는 2001년 오디션을 통해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 역에 발탁되어 파격적인 데뷔를 했다. 이후 그는 성악가 대신 뮤지컬배우의 삶을 선택했다. “부모님은 무척 반대하셨죠. 하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이쪽을 향해 달렸어요.” 주변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이라는 낯선 세계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김소현은 질문을 받고 첫 무대에 대한 회상에 잠겼다. “12월 4일, 커튼콜 무대에서 박수 소리를 들으며 느낀 전율을 아직도 기억해요. 말할 수 없이 벅차고 살아 있는 기분이었죠. 커튼콜은 언제나 제게 큰 의미가 있어요. 3시간 가까이 무대에서 에너지를 쏟아낸 뒤, 관객의 대답을 듣는 순간이잖아요. 지금도 커튼콜에 나가기 전에는 심장이 떨리고, 터져 나오는 박수가 들리면 눈물이 나요. 그건 몇천 번, 몇만 번을 해도 똑같아요.”
데뷔 19년 차. 그동안 여성 캐릭터의 입지가 약한 뮤지컬계에서 김소현은 여러 차례 비중 있는 타이틀롤을 책임져 왔다. 지난해에는 <명성황후>와 <엘리자벳>에 각각 3년, 5년 만에 다시 참여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작품이지만 두 번째 서는 무대는 또 새로웠다는 게 그의 소감이다. “인생에서 1년의 경험이 무대 위에서는 더 값지게 다가오더라고요. 이해의 폭이 넓어진 만큼 캐릭터를 표현할 때 더 과감하고 용감해졌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과 감성이 풍부해지는 반면, 여성 배우로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는 게 아쉬워요.” 인터뷰 전 김소현의 SNS를 살펴보다 인상적인 글을 발견했다. 평소 추천글을 잘 올리지 않는 그가 최근 영화 <더 페이버릿>을 보고 열띤 감상평을 남긴 것이다. 여성의 권력욕과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이 작품을 그가 재미있게 봤다는 데 조금 놀랐다. “그 영화의 모든 게 좋았어요. 세 여성 캐릭터 모두 매력이 넘치고 배우들이 온전히 캐릭터에 빠져 있는 게 보였죠. 그 여배우들이… (혼잣말로) 아냐, 여배우라는 말 자체를 쓰면 안 돼. 배우들이 어떤 마음으로 연기했는지 알겠더라고요. 몸을 던져서 연기하는 그들을 보며 이 작품이 무대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이 이야기의 전면에 나서 그들끼리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는 게 <더 페이버릿>의 흥미로운 포인트. 뮤지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만날 기회가 흔치 않아 아쉽다는 기자의 말에 김소현은 그래도 자신은 운 좋게 그런 작품을 많이 만났다고 답했다. “<위키드>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출연했고,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여자 듀엣곡 ‘In His Eyes’를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여자와의 듀엣이 남자와의 듀엣보다 훨씬 강렬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자 배우끼리 만날 때 생기는 시너지가 있듯, 여자 배우끼리 만날 때 생기는 시너지가 확실히 있거든요. 전 그게 좋아요.”
오랜 기간 무대에 서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법도 한데 아직도 뮤지컬에 대해 얘기하는 김소현의 눈에서는 열정이 반짝였다. “사실 데뷔한 지 10년쯤 됐을 때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어요. 실제로 그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무대에서 멀어졌죠. 그런데 막상 잃고 나니 무대의 소중함이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를 낳고 1년도 안 돼서 <엘리자벳>으로 컴백한 거예요. 그 상실감을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무대에 서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저는 누군가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온전히 제 이름으로 무대와 연습실에 설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에요. 그래서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제 모든 걸 바치고 싶어요.” 김소현의 하루는 매일 아침 5시에 시작된다. 대부분이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을 이른 시간에 김소현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누군가와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9시 무렵이면, 사실 그는 자신의 할 일을 대부분 끝마친 상태다. 항상 5시에 일어나다 보니 이제는 알람도 필요 없어졌다는 김소현. 그 바지런한 열정이 지금의 김소현을 만들었고, 또한 앞으로도 그의 이름이 무대 위에서 오래도록 빛나게 만들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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