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앤 하이드>, 뉴 캐스트 캐릭터 탐구
지난 3월 <지킬 앤 하이드>에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 민우혁과 전동석. 상반된 두 인격을 오가야 하는 이 작품에서 두 배우는 어떤 캐릭터 해석을 내놓았을까.
나도 몰랐던 나, 민우혁
민우혁은 단순하고 순박함이 느껴지는 지킬을 보여준다. 그가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로 결심하면서 부르는 ‘지금 이 순간’은 위험을 무릅쓴다는 비장함보다는 드디어 오랜 꿈이 이뤄진다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반면 실험에 실패하고 하이드에게 휘둘리게 된 후에는 두려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낸다. 이처럼 희로애락이 꾸밈없이 드러나는 민우혁의 표정은 지킬을 순진한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지게 한다.
실험을 반대하는 병원 이사회와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지킬의 순진함이 잘 드러난다. 이 회의는 지킬이 그동안 서면으로 제출한 안건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해명을 하는 자리다. 민우혁의 지킬은 이것이 ‘처음’으로 주어진 기회라는 점에 주목한 듯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회의 시작 전, 연구 자료만 내려다보는 전동석과 달리 민우혁은 얼굴을 들고 자신이 설득해야 할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러곤 마치 인내심 많은 선생님처럼 나긋한 목소리와 큰 손동작으로 친절하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이처럼 의욕적인 태도는 자신이 나서서 잘 설명하기만 하면 이들도 이해하리라는 순진한 희망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 희망이 깨지고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민우혁의 지킬은 ‘이렇게까지 설명하는데 왜 이해를 못 하나’라는 당혹감과 답답함을 내비친다.
마냥 순진할 것만 같은 지킬의 이면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레드렛 클럽에서다. 클럽에 들어선 그는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바닥만 쳐다보지만, 이내 그 시선은 무대에 선 루시를 향한다. 어터슨의 성화에 마지못해 따라 치던 박수는 루시에게 집중하느라 홀린 듯 멈춰버린다. 이뿐인가, 얼굴을 들이미는 루시의 도발에 입이라도 맞출 듯 바짝 다가가는 지킬의 몸짓은 장난이라기보단 유혹에 가깝다. 클럽을 빠져나오면서 어터슨이 ‘꽤나 즐기는 것 같아 보이던데’라고 하자 그는 인정하며 진저리 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하이드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여기서 한차례 자신의 이면을 발견한 셈이고, 이것이 지킬의 죄책감을 자극했다면 그 순간 퍼뜩 자신을 선악 분리 실험의 대상으로 삼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다가온다. 하이드가 된 뒤에도 그는 루시에게 특별한 애정을 드러낸다. 루시에게 누군가 찾아온 건 아닌지 의심하는 장면에서 전동석의 하이드가 지킬에 대한 견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 민우혁의 하이드가 루시에게 ‘날 기다린 게 아니었나?’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진심 어린 배신감이 배어 있다.
체격이 큰 민우혁은 하이드로 변하면 누구보다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뽐낸다. 솔직히 조끼에 꽉 맞는 근육질의 몸을 지닌 지킬은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숨이 막히는데, 하이드가 된 그는 그제야 봉인에서 풀려나 제 모습을 찾은 듯 마음껏 에너지를 뿜어낸다. 맹수처럼 그르렁거리며 포효하고, 뛰어올랐다가 쿵 떨어지며 솟구치는 힘과 생명력을 과시한다. 가사 속 ‘막을 수 없는 이 넘치는 힘’, ‘살아 있는 강한 느낌’을 그대로 형상화한 모습이다. 민우혁의 하이드는 살인을 저지를 때도 흥에 겨워 ‘크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다. 술에 취한 듯 건들거리는 발걸음에서는 쾌활함마저 느껴진다. 살인을 오락처럼 즐기는 하이드의 모습은 그가 사적인 원한보다 인간 본성에 잠재된 원초적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세상 무해해 보이는 지킬 안에서 튀어나온 위협적이고 탐욕적인 하이드는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세상에 대한 복수, 전동석
이번 시즌 지킬 역을 맡은 배우 가운데 가장 막내인 전동석은 청년다운 반항적인 기질을 지닌 지킬을 보여준다. 기성세대에 대한 적대감이 크지만, 그만큼 자존심도 강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전동석의 지킬이 느끼는 분노와 무력감은 종종 비틀린 냉소로 표출된다. 무언가 얘기하다 말고 ‘픽’ 하는 웃음을 내뱉는 그의 독특한 버릇은 세상은 물론 그 세상에 속한 자기 자신조차 비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지킬의 예민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가면’ 장면에서 전동석이 보여주는 적극적인 리액션은 마치 이 곡 전체가 지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무대 한구석에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는 어터슨이 ‘사실 인간들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라고 노래할 때 자기 생각인 양 고개를 끄덕이고, 앙상블이 코웃음 치듯 ‘하!’라는 구호를 뱉는 순간에 딱 맞춰 손을 들어 올린다. 노래를 부르는 건 앙상블이지만, 그 내용은 마치 지킬 내면의 목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주변 사회에 대한 지킬의 뿌리 깊은 불신은 병원 이사회와 만나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댄버스 경은 이 자리가 지킬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전동석은 ‘마지막’에 방점을 찍는다. 연단에 선 지킬은 연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오랜 시간 이 문제로 신물 나는 싸움을 해왔고 이제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 있다. ‘연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격려하는 댄버스 경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민우혁과 달리 전동석은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다. 마치 실패를 예감한 사람처럼 말이다. 애써 점잖게 시작한 그의 연설은 점점 초조하고 격앙된 어조로 변해가고, 병원을 ‘감옥’에 비유하는 대목에서 증오심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전동석의 지킬은 이사회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토록 경멸하는 상대 앞에서 자존심을 굽히는 모습은 이 자리가 정말로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결국 반대에 부딪힌 지킬은 댄버스 경이 일으켜 세울 때까지 사망 선고를 들은 듯 바닥만 내려다본다.
전동석이 연기하는 지킬에게서는 하이드와 대비되는 ‘선량함, 상냥함, 따뜻함’보다는 연구자로서의 열정과 위선적인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강조된다. 레드렛 클럽에서 전동석의 지킬은 민우혁처럼 쩔쩔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루시의 쇼를 지켜보고, 심지어 도중에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손을 맞잡으며 흥미를 표한다. 그런데 이 흥미란 관능과는 종류가 달라 보인다. 마치 과학자가 실험 대상을 관찰하듯 그는 쇼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닌 게 아니라 루시가 부르는 달콤한 노래는 사실 위선자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 아닌가. 상류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과 통하는 상대를 발견한 지킬은 픽 웃음을 터트린다. 다음 장면에서 지킬은 루시에게 ‘그 모습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웃는데, 이때 그가 보여주는 호감은 호기심 또는 동질감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루시가 ‘사랑’을 언급하는 순간 그는 돌연 정색한다.
지킬의 냉소에서 자존심과 도덕관념을 걷어내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는 오롯이 웃음기 없는 싸늘한 분노만이 남는다. 그래서 전동석의 하이드는 음침하다. 높낮이 없는 억양과 뻣뻣한 몸짓에서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소리를 지르고 셔츠를 찢어도 어딘가 축 가라앉은 분위기다. 민우혁의 하이드가 호쾌한 액션 장르의 빌런이라면, 전동석의 하이드는 섬뜩한 스릴러 장르의 범인이다. 단호하게 살인을 해치우는 하이드에게서 느껴지는 건 가벼운 흥분이 아니라 무거운 적의다. 이로 인해 하이드가 지킬의 원한에서 비롯한 또 다른 자아라는 점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첫 살인의 희생자가 될 주교 앞에서 ‘아니, 비유가 틀렸어’라고 말할 때 불현듯 톤이 달라지는 전동석의 목소리는 하이드가 아닌 지킬의 자아가 튀어나온 건 아닐까 하고 상상하게 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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