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서 10년은 해야 그게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다.” 선배들이 흔들리는 후배들에게 격려 차원에서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마냥 사탕발림만은 아닌 것이 10년을 버티면 그 조직에서 필요한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10년이란 시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버틴 자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10년을 유지하기란 그것이 어떤 일이든 결코 녹록치 않다. 오디뮤지컬컴퍼니가 올해 10주년을 맞는다. 10주년을 맞아 음악극 <미드 썸머>를 시작으로 2인극 중심의 페스티벌을 펼치고, 5월에는 LG아트센터에서 1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다. 지난 10년간 오디뮤지컬컴퍼니는 대형 뮤지컬 제작사 틈바구니에서 용케 현재의 위치를 구축했다. 국내 제작자들의 꿈인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진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단체인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신춘수 대표와 지난 10년을 돌이켜보았다.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
공식적인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첫 작품은 2001년에 만든 <사랑은 비를 타고>(이하 <사비타>)이지만, 그 전에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이름으로 올린 작품이 있다. 바로 신춘수 대표의 첫 데뷔작인 <안녕, 비틀즈>(1999)이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신 대표는 프로듀서 1세대인 김용현, 설도윤 대표가 운영한 서울뮤지컬컴퍼니에서 기획 일을 배우다가 본인의 이름을 단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면서 인생의 행로가 변경됐다.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 <안녕, 비틀즈>였다. 작품은 흥행에서 실패했고, 함께했던 팀들과 꾸렸던 사무실도 잃고 뿔뿔이 헤어져야 했지만, 첫사랑이 그렇듯 첫 작품은 신춘수 대표에게 강렬한 경험이 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올리면서 창작의 희열을 느꼈고, 제작자로서 책임감을 배웠다. <안녕, 비틀즈>는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쳐준 셈이다. 그런 면에서 <안녕, 비틀즈>는 실패했지만 실패한 작품이 아니다. <안녕, 비틀즈>는 오디의 앞으로 행보를 예견하게 해준다.
<안녕, 비틀즈> 이후 <사비타>를 올리기까지 신 대표는 큰 수술을 받아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흥행 실패로 정신적인 아픔도 겪었지만 자유로웠다. 꿈이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비타>를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오디뮤지컬컴퍼니를 가동했다. <사비타>로 큰 성공을 거두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크박스 뮤지컬 형태로 만든 창작뮤지컬 <더 리허설>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사비타>를 통해 벌었던 그 이상의 손실을 안겨주었다. 신 대표는 실망하지 않고 일단 뮤지컬 제작 노하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창작뮤지컬 제작에서 라이선스 제작으로 전환했다.
라이선스라고 만만치 않았다. 이미 신시뮤지컬컴퍼니와 설도윤 대표가 있었던 제미로가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수입을 주도하고 있던 때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불법 카피 작품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라이선스에 대한 세부적인 개념들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2003년 <아가씨와 건달들>을 일본의 라이선스 매니지먼트회사인 IMI를 통해 들여오면서 라이선스에 대해 밑바닥부터 배워야 했다. SJ엔터테인먼트와 공동제작한 <싱잉 인 더 레인>으로 한번 더 라이선스 뮤지컬 제작을 경험한 후 조금씩 자신이 붙었다. 그러나 그 수업료는 비쌌다. 신 대표는 흥행 실패로 막대한 제작비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 <사비타>가 꾸준히 인기를 얻어 다음 도전을 위한 시드 머니(seed money)를 마련하는 구실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수업료를 지불하고 드디어 오디의 효자 콘텐츠인 <그리스>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스>는 이미 신시와 서울뮤지컬컴퍼니에서 제작했던 작품이었다. 신 대표는 이전 선배들이 만든 것과는 다른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다. 그 나름대로 작품에 대한 방향성을 세워 놓고, 젊은 배우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스>가 지금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신 대표의 승부사적인 기질이 발휘됐다. “폴리미디어 씨어터(현 이다 1관)에서 초연한 후 토월극장에서 재공연을 했어요. 두 공연 다 반응이 좋았어요. 토월 다음에 폴리미디어에서 재공연 대관이 잡혀있었는데 마침 동숭아트센터가 비어, 당시에는 1억 원이라는 적지 않은 위약금을 물고 공연장을 바꿨죠. 당시는 리미티드 런(종영일을 정하고 하는 공연)이었는데 그때 동숭에서 장기 공연이 가능했거든요. 그걸 시험하고 싶었어요.”
제작, 제작 또 제작
오디의 대표작은 뭐니뭐니해도 <지킬 앤 하이드>이다. 이 작품 이후로 오디의 행보는 좀 더 촘촘해지고 빨라진다. <지킬 앤 하이드>의 라이선스 취득은 비교적 쉬웠다. 브로드웨이 장기 흥행작이 아니고 일본에서 흥행에 실패한 작품이어서 국내 제작사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스릴러란 장르가 뮤지컬과 잘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초반에는 제미로와 공동 제작으로 <지킬 앤 하이드>의 라이선스 공연을 추진하던 중에 제미로가 공연 사업 자체를 중단하기로 결정하는 돌발 상황에 부딪혔다. 오디 단독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이 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제미로가 빠지면서 예술의전당 대관도 취소되었다. “그때 제도권에 인정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어요.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결국 공연장도 아닌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공연을 올려야 했다. 우려가 있었지만 당시 떠오르는 신예 조승우를 캐스팅한 이 공연으로 오디는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둔다.
2001년 본격적으로 오디뮤지컬컴퍼니가 출범한 후 지금까지 30여 작품을 제작해왔다. 한 해 평균 세 작품을 소개해온 것이다. 재공연을 포함하면 한 해 평균 예닐곱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 제작 편수로만 따진다면 국내 뮤지컬 제작사 중 탑에 해당하는 엄청난 제작력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주류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크레딧을 쌓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기술이나 노하우도 부족했으니까 직접 경험하면서 습득해 나간 것이죠.” 오디는 성공한 작품보다 실패한 작품들이 훨씬 많지만 실패를 통해 학습하고 그것을 성장으로 이어왔다. 오디의 크레딧이 많아질수록 공연계에서 위상은 높아졌다. 신 대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한 시도를 이어갔다. 2005년 뮤지컬 열전을 기획한 것도 시대를 앞선 도전이었다. 제작사들이 대중들에게 인지도 높은 대형 뮤지컬을 들여오려고 경쟁하는 와중에 오디는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들을 모아 뮤지컬 열전을 기획했다. 애초 계획에는 <헤드윅>이나 <벽을 뚫는 남자>도 프로그램에 포함하려 했으나 제미로의 사업 중단으로 프로그램 구성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뮤지컬 열전에는 손드하임의 <암살자들>이나 <리틀 숍 오브 호러스>같이 비주류이고 컬트적인 속성이 강한 작품들이 공연됐다. 신 대표는 당시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용감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흥행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하기 힘들었던 <나인>이나 <컨택트>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오디는 끊임없이 도전을 거듭하여 <사비타>, <그리스> 이외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올 슉 업> 등 흥행성이 보장된 오디 라인업을 구축해 나갔다.
지난 10년, 앞으로 10년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지속하면서 2006년부터는 해외 시장 개발을 서서히 추진한다. 우선 오디의 대표작인 <지킬 앤 하이드>로 일본 시장에 노크를 했다. 궁극적으로 신 대표가 노린 것은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 시장이었다. 해외 진출의 대표 사례인 <명성황후>, <난타>처럼 보통 자사의 콘텐츠로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 대표는 브로드웨이 작품을 재가공해 일본에 진출했다. 브로드웨이 역시 같은 전략을 썼다. 2009년 <드림걸즈>의 리바이벌 공연은 이전과는 다른 기획과 제작 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브로드웨이 인기 작품의 리바이벌 공연을 한국에서 공동 제작해서 미국으로 역수출한 것이다. 신 대표가 이러한 제작 방식을 먼저 시도해보고 싶었던 작품은 <그리스>였다. 제작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러나 이 제안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리고 몇 해 후 <드림걸즈>의 공연권을 가진 존 브릴리오를 만나 같은 제안을 했을 때, 그는 놀랍고 의심스러우면서도 그런 제안을 해준 것에 대해 반갑다는 반응을 보였다.
<드림걸즈>는 대규모의 제작비, 화려한 LED 영상 사용, 브로드웨이 히트작 리바이벌 공연 공동 제작 등 수많은 이슈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지나치게 제작비가 많이 들었고 금전적으로는 실패했다. 브로드웨이 진출을 기대했으나 미국 투어 공연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드림걸즈>로 인해 오디는 브로드웨이 진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것의 무형의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다. “크레딧이 생기면서 오는 차이는 정말 상상하지 못할 정도예요. <드림걸즈>가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저에게 상상할 수 없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어요. 크레딧으로 사람들에게 신뢰가 생겼고 해외에서 굉장히 많은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만큼 해외에서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거죠.”
<닥터 지바고> 역시 <드림걸즈> 이후 해외 프로듀서로부터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고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호주와 미국의 프로듀서와 <저지 보이스>의 연출가가 참여하는 프로덕션이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신 대표는 많은 것을 배웠다. “프로듀서는 함께하는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거 같아요. <드림걸즈> 할 때는 그런 마음이 약했어요. 예전에는 내 직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들을 믿고 내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경계를 알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호주에서 <닥터 지바고>를 하면서 굉장히 행복했어요. 나이 지긋한 프로듀서들이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교감하면서 나를 믿어준다는 것을 느꼈어요.” 공연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한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 내의 교감과 에너지는 어느 장르의 예술보다도 중요하다. 보통 이러한 이야기는 상업예술을 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듣기 힘들다.
예전 신춘수 대표를 두 단어로 정리하면 ‘열정’과 ‘꿈’이었다. 그는 꿈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달려드는 제작자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신뢰’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앞으로의 10년이 이전과는 다를 것 같다고 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1999년 <안녕, 비틀즈>의 흥행에 실패하고 10여 년 만에 해외 시장을 무대로 창작뮤지컬 <과속 스캔들>을 제작한다. 한국에서 트라이아웃을 거치지만 최종 도전지는 브로드웨이가 될 것이다. 국내 콘텐츠를 해외 아티스트들이 제작하는 <과속 스캔들>의 제작 방식은 이미 <댄싱 섀도우>나 <천국의 눈물>에서 시도된 적이 있다. 두 작품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드림걸즈>와 <닥터 지바고> 작업을 거치면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정리가 된 거 같아요. 해외 창작자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있고요. 정공법이긴 한데 저희는 대관을 먼저 하지 않고 워크숍이나 리딩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면 그때 공연을 올릴 거예요.”
시스템 면에서도 오디는 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매니징 회사인 오디이컴을 별도 회사로 분리하는 등 시스템을 갖추어 나갔다. “지금 제작사를 차린다면 프로듀싱만 전문으로 하고 제너럴 매니징 회사에게 나머지 일을 아웃소싱으로 맡길 거예요. 제가 시작할 때는 그런 환경이 안됐죠. 지금 오디의 규모가 프로듀싱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프로듀싱과 매니징 역할을 함께 병행해 나갈 거예요. 해외 작품의 라이선싱이나 국내 시장에 유통, 국내 작품의 경우는 오디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더라도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으로 만들려고 해요.” 그가 구상하는 오디뮤지컬컴퍼니의 대략적인 그림을 예상할 수 있었다. 프로듀서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신 대표는 자신이 해온 (실패를 통해 배우는) 방식은 그때니까 가능한 것이라며, 충분히 준비한 상태에서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을 올리는 것이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후배들이 해야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어느덧 뮤지컬계에 중견 제작사로 성장한 오디뮤지컬컴퍼니가 공연계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들의 앞으로의 10년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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