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화, 어디에나 있는 꽃
쉴 틈 없이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한 정동화. 그를 한마디로 비유하기에 좋은 표현은 ‘어디에나 있는 꽃’ 아닐까. 그는 지난 한 해 동안 일곱 작품에 참여했고, 올 상반기에는 <더 캐슬>의 벤자민 핏첼과 <니진스키>의 니진스키로 출연한다. 빡빡하게 잡힌 일정이 힘들 만도 한데, 무대에 오를 때면 감사함이 전해진다며 힘껏 연기하고 노래하고 싶다는 배우 정동화. 그와 그의 아홉 분신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어봤다.
* 이 기사는 정동화 배우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색했습니다.
20180301~20180422 <존도우> 윌러비
20180609~20180708 <라흐마니노프> 니콜라이 달
20180710~20180930 <인터뷰> 싱클레어
20181009~20190224 <트레이스 유> 이우빈
20181023~20190113 <랭보> 랭보
20181127~20190217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앨빈 켈비
20190308~20190407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20190415~20190630 <더 캐슬> 벤자민 핏첼
20190528~20190818 <니진스키> 니진스키
정동화_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함께 만나는 건 처음 같아요. 많은 분들께 저의 분신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다는 말을 들어서 큰마음을 먹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다들 한 번쯤은 서로의 이름을 들어보셨죠? 간단히 인사도 하고 이야기들도 좀 나눠볼까요.
우빈_ 나는야, 이 동네 최고 핫한 핵인싸. 클럽 드바이의 기타리스트 우빈이라고 해. 너희를 위해 내가 노래를 준비했어. 들어보라구. “오늘 밤~ 이곳에서 우리 둘이 함께해~”
니콜라이 달_ 실례지만, 지금은 낮입니다. 낮이라고요. 당신은 수면 부족과 과도한 음악 작업으로 인해 스트레스성 위염 증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저는 의사입니다. 당신을 고쳐줄 수 있어요.
우빈_ 아! 금발 머리 당신은 뭐야. (짜증) 당신, 내가 약 좀 줄까? 쏘라진, 쎄로켈, 프롤릭션, 리스페달. 골라봐. 아주 많이 있어!
앨빈_ 저기요. 싸우지 말아요~ 우리는 지금 추억을 나누려고 모인 거잖아요, 좋은 이야기만 나눠요. 어? 어! 지금 당신 머리 위로 나비가 날아가고 있어요! 네 날갯짓에 세상이 변해~ (흥얼흥얼)
랭보_ 앨빈이라고 했나? 당신에게서는 작가적 천재의 기운이 묻어나는군. 부럽네. 난 시를 쓰는 랭보야. 내 소개를 하자면, 문학계의 이단아? 삼단아? 그런 말을 많이 듣고 있지. 좋았던 기억을 말하는 자리니까, 내가 먼저 시작해 보지. 나의 가장 행복했던 추억은 바로 내 시를 읽는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내 시에 공감해 줬던 거야. 아마 그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 이 자리를 빌려 내 입에서 낭독되던 나의 시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초록빛 고마움을 전하고 싶군.
니진스키_ 아, 랭보. 당신은 행운아네요. 난 매일 눈을 감으면 무수한 움직임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발레리노의 삶이 그렇죠, 뭐. 그래서 난 발레 안무에 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담았어요. 내가 가진 아픔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내게 돌아오는 말은 내 발레가 음악과 관객을 모독했다는 비난이더군요. 이젠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요?
랭보_ 니진스키, 나도 그랬어. 자네에게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면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군. 계속 당신이 걸어가고 싶은 길을 걷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럼 분명 사람들이 당신의 아픔과 슬픔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니진스키_ 이런 말은 처음 들어요. 고마워요. 당신의 말 덕분에 외로움이 조금 사라졌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삶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은 ‘왜 나를 몰라줄까’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윌러비_ 두 분의 이야기는 마치 과거의 나와 같네요. 그때 내겐 희망이라곤 아주 조금도 없었어요. 날 위로해 준 건 단지 콘콩샐러드와 야구공뿐이었죠.
생텍쥐페리_ 윌러비, 당신만 그랬던 건 아니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 또한 할 말이 많지. 사람들은 내가 어느 상공에서 홀연하게 사라졌다고 하더군. 난 사라진 게 아니라네. 영원히 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선 거야. 그곳이라면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앨빈_ 저도 외롭다는 게 뭔지 알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는 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책방에 틀어박혀 혼자 덩그러니 있는데, 생텍쥐페리 작가님처럼 외롭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몰려왔어요. 그리고 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거죠.
우빈_ 뭐가 이렇게 외롭고 슬프고 질질 짜고 난리야! 모두 같이 소리 질러! 렛츠 락앤롤!
싱클레어_ 아까부터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당신은 누구죠…? 당신 속의 또 다른 당신과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당신도 친구가 없나요?
랭보_ (끼어든다.) 친구라…. 내겐 친구가 있지, 베를렌느라는. 내 곁에 그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니진스키_ 많은 사람이 내 후원자 디아길레프와 나를 당신과 베를렌느의 관계처럼 생각하더군요. 두 사람은 애증 관계였다면서요? 여기서 밝혀두죠. 난 디아길레프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우빈_ 아니, 왜? 디아길레프가 당신에게 집착했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어.
싱클레어_당신이 누구인지 말 좀 해봐요. 왜 계속 반말인가요?
니진스키_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까. 이건 곧 무대에서 보여주죠. 그동안의 사건을 알게 된다면 다들 내가 왜 그를 좋아할 수 없는지 이해하게 될 거예요.
윌러비_ 여기에 있는 모두가 외로움을 알고 있네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고,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될 거예요.
우빈_ 푸흡. 윌러비 선생. 너무 오글거리는 거 아니야?
윌러비_ 아니, 우빈 씨.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웃어도 되나요!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건넨 사람과 건네지 않은 사람이 도움을 청했을 때, 결과가 다르게 되돌아온대요.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훨씬 많은 도움이 받을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어요. 정말 신기하죠? 그러니까 사람은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말을 건넬 때, 비로소 관계가 생긴다는 거예요. 전 그걸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앨빈_ 윌러비의 말이 맞아요. 저도 어느 날 문득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특히 전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가족은 가깝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기 쉬운데, 서로 가장 의지하고 격려해 줘야 하는 관계잖아요. 전 제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일깨워 주고 싶었어요.
생텍쥐페리_ 맞아, 앨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갑자기 부럽군. 앨빈은 가족도 있었고, 친구 토마스도 있지 않나. 그런데 난 철저하게 혼자였거든. 어렸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가 뭔지 아나? ‘생텍쥐페리는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라는 차가운 말이었네. 물론 이런 철저한 외로움 덕분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어린왕자』가 세상에 나오게 됐지만 말이지. 아,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한 고마운 사람이 한 명 있다네. 바로 그는 나의 벗인 레옹 베르트였지.
윌러비_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사소하지만 끈끈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달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니콜라이 달_ 잠시만요. 제가 지금 라흐마니노프 씨의 약을 처방 중이라 조금 바빠요. 뭐라 하셨죠? 아, 기억났어요! 소중한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마주치며 다정한 말을 건네봐요. 전 늘 누군가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해요. 뻔한 말인 것 같지만 이 말이 지닌 힘은 엄청나거든요.
우빈_ 이런 분위기 정말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지. 가만있자, 싱클레어와 벤자민 선생은 나랑 같은 종 아닌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서운 사람들인가?
벤자민_ 오해가 좀 있었네요. 난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캐슬에 발을 들인 이후에 변하긴 했지만요.
니콜라이 달_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군요. 더 말해 줄 수 있나요? 괜찮아요. 털어놔 보세요.
벤자민_ 우리끼리인데 괜찮겠죠? 사실 그 살인의 범인은 제가 아니었어요. 그저 전 다른 누군가의 순간적인 충동을 막고 싶었죠. 그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없었어요. 그녀를 지키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죠. 지금도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싱클레어_ 아, 저는 할 말이 없군요. 전 잘못된 사랑을…, 잘못된 사랑을 했던 거예요. 내 이야기 대신 벤자민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군요. 당신의 그 끔찍한 이야기는 진짜였나요?
벤자민_ 난 19세기 시카고에 살고 있어요. 아마 내가 경험한 일을 듣는다면 다들 산소가 결핍돼서 숨이 턱 막힐 겁니다. 장담하건대 내가 이야기를 하면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몰입할 거예요.
우빈_ 그럼 난 여기서 해결하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볼일을 보려고 한다.)
앨빈_ 안 돼요! 멈춰요! (눈을 가린다.)
랭보_ 와우! 저게 바로 예술이지! 나도 파리에서 시 대신 쉬를 한 적이 있었어!
싱클레어_ 시 대신 쉬를 했다고요? 맙소사. 당신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니콜라이 달_ 벤자민 씨, 궁금하군요. 그 캐슬에서는 정말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겁니까.
벤자민_ 내가 만난 의사 선생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호텔을 지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호텔에서는 수많은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그의 살인은 정말….
우빈_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벤자민_ 소문을 듣자 하니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의사 선생이 책을 읽다가 218페이지에서 멈추잖아요? 그러면 ‘아, 오늘은 218호
사람을 죽여야지’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 살인을 벌였대요.
앨빈_ 아, 이런 끔찍한 이야기라니. 저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저런 내용의 소설책이라면 저 뒤에 책장에 꽂아놓을 거예요.
윌러비_ 자자, 여러분. 이제 무섭고 끔찍한 살인 이갸기는 넣어두어요. 그래도 우리 오늘 나누었던 희망적인 이야기를 잊지 말자고요.
정동화_ 너무나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되었네요. 저는 오늘 여러분 덕분에 크나큰 위로를 받았어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제가 잊고 있던 것들이 생각났거든요. 매일 아침 바삐 집을 나서고, 치열하게 무대에 섰어요. 그리고 늦은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일상 속에서도 당신들을 통해 소중한 것을 깨달았죠. 그 소중한 선물을 놓치지 않으려고 난 당신들을 열심히 빚으며 연습실에서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무엇보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졌어요. 여기에 있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관객 여러분에게도 감사함을 전해요. 우리 언젠간 또 만나요. 꼭 그럴 수 있겠죠?
우빈_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다시 만나야지. 그런데 나 당신에게 궁금한 게 있었어. 이렇게 바쁘게 활동하는 게 힘들지는 않아? 약 좀 줄까? 쏘라진, 쎄로켈, 프롤릭션, 리스페달. 골라보라구.
정동화_ 마음만 받을게요. 고마워요. (미소) 제가 이렇게 많은 작품과 무대에 지치지 않고 설 수 있는 것은 작품을 사랑해 주는 관객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 목표는 뮤지컬배우로 오랫동안 무대에 서는 것이죠. 백발이 되어서라도 활동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계속 당신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우빈_ 반가운 소리군. 근데 말이야.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운데 내가 운영하는 클럽 드바이에 가서 진탕 놀아볼까?
정동화_ 어…, 내일 아침부터 연습이 있어서… 말만이라도 정말 고마워요.
앨빈_ 저도,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하러 신기하고 신비로운 책방에 가야 하는데.
윌러비_ 아쉽지만 뉴욕 존도우 클럽에서 ‘김장 김치 담그기 행사’가 있어요. 거길 꼭 가야만 해요.
생텍쥐페리_ 나도 마침 오늘 야간 비행을 하기 딱 좋은 날이라 비행기에 연료를 꽉 채워놨지. 흠흠.
니진스키_ 저도 지금쯤이면 연습실에 아무도 없을 거라 텅 빈 연습실에서 ‘봄의 제전’ 안무를 마무리하려고요.
우빈_ 다들 아주 바쁘구먼. 바빠. 설마 나랑 놀기 싫어서는 아니겠지? 흥.
정동화_ 그럴 리가요. (미소) 바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뜻이고 그것은 곧 사랑받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달 박사_ 동화 씨, 늘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배우입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했습니다. 우리 모두 또 만납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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