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캐릭터에게 보내는 편지
예로부터 일 년 사계절 중 유일하게 ‘독서’와 함께 설명되는 가을이 왔습니다. 맹렬하게 내리쬐던 햇볕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시기, 가을은 독서만큼이나 글쓰기가 어울리는 계절 아닐까요. 그래서 이제 곧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나는 당신과 이 책을, 이 영화를, 이 드라마를, 함께 나누고 싶노라고.
집안의 천사, 집안의 괴물
친애하는 드 윈터 부인. 존함을 몰라 드 윈터 부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어디서 읽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지금도 바다가 보이는 작은 호텔에서 맨덜리 저택의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나곤 하시나요? 어두운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묻어둔 채 살아가기란 쉽지 않겠죠. 어쩌면 부인께도 지나온 시간을 차분하게 돌아볼 기회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책 몇 권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사람들은 종종 당신을 소설 『제인 에어』의 주인공과 비교하곤 합니다. 가난한 고아 소녀가 대저택을 소유한 돈 많은 (나이도 많은) 귀족 남자와 결혼했다는 점, 그 남자가 알고 보면 전처와 얽힌 말 못할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비밀이 결국에는 저택을 불태우는 충격적인 결말을 초래했다는 점이 당신의 삶과 평행 이론처럼 닮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부인이 누군가의 복제품이라는 생각에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표절이라기보다 고딕 로맨스 장르의 법칙에 가깝거든요. 미로 같은 거대한 저택 안에서 펼쳐지는 악령, 살인, 방화, 위장, 광기의 이야기. 문학의 세계에 당신을 닮은 수많은 쌍둥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면 그런 불행하고 오싹한 사건을 겪은 게 부인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제인 에어』는 부인이 살고 있는 시대보다 한 세기 앞서 출판된 책이니 어쩌면 벌써 읽어보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부인과 닮은 제인에게 이입해 그가 시련을 딛고 로체스터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에 감동하며 책을 덮으셨겠지요. 하지만 저는 부인께 『제인 에어』보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소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제인이 아닌 로체스터의 전처 버사 메이슨의 시점에서 쓰인 소설입니다. 자메이카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가 자신의 재산과 성적 매력을 탐한 영국인 로체스터와 결혼해 저택 다락방에 감금되는 이야기는 『제인 에어』에서 미친 여자로 매도당한 버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죠. 저는 부인께서 이 책을 읽고 죽은 레베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과연 레베카가 남편의 말대로 교활하고 문란하다는 표현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죽어 마땅한 여자였는지에 대해서요.
레베카와 비교당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던 부인에게 그녀를 새롭게 이해해 달라는 제 말이 무례하고 부당하게 들리리란 걸 압니다. 버사와 레베카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한 남자에게 종속되어 살 수밖에 없었다는 점, 남자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숨겨지고 제거돼야 했다는 점에서 저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비평서를 함께 읽으신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우시겠지만, 벽돌만큼 두꺼운 책이라 쉽게 권하기 힘든 만큼 핵심만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가부장제가 억압한 여성의 욕망과 분노를 ‘미친 여자’로 형상화했다고 말합니다. 그들 작품에 나타나는 감금과 탈출의 이미지는 남성주의 사회에 갇혀 있던 작가 자신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란 거죠. 제가 부인께 레베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를 당부드리는 것도 결국 그녀의 자리를 대신한 당신의 삶을 돌아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드 윈터 부인으로 살게 된 것이 정말로 해피엔딩인지에 대해,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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