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캐릭터에게 보내는 편지
예로부터 일 년 사계절 중 유일하게 ‘독서’와 함께 설명되는 가을이 왔습니다. 맹렬하게 내리쬐던 햇볕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시기, 가을은 독서만큼이나 글쓰기가 어울리는 계절 아닐까요. 그래서 이제 곧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나는 당신과 이 책을, 이 영화를, 이 드라마를, 함께 나누고 싶노라고.
진실이 그대를 아프게 할 때
인생이란 워낙에 뜻한 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잘 없지만 지금의 공주님께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인생의 반려이자 함께 국가를 경영할 동반자라고 믿었던 남자, 그리고 드물게 진정한 우정을 느낀 시녀가 당신을 배신했죠. 이집트의 왕녀든 벽돌공의 딸이든 그런 일은 견디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분노와 슬픔을 의연하게 이겨내고 그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공주님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빛났답니다. 그 사실이 지금 울고 있는 공주님에게는 별 위로가 되지 않더라도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너 그때 꽤 괜찮았어’라고 칭찬할 수 있게 해줄 겁니다. 믿어보세요.
사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하는 말인데, 능력 있고 믿음직한 남자를 데릴사위 삼아서 나라를 맡겨놓고 만인에게 사랑받는 왕국의 마스코트로 살아가려던 계획은 썩 안전해 보이지 않았어요. 공주님, 명심하세요. 능력 있는 남자는 흔치 않고 믿을 만한 남자는 더욱더 희소하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공주님과는 다른 시대, 다른 대륙에 살았던 두 사람의 여성 군주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삶을 살펴보시라고 권하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때까지 그 흘려보냄을 좀 더 수월하게 할 만한 일을 찾아보는 것도 힘든 시간을 버티는 괜찮은 방법이니까요. 각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동시대를 살았고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던 두 사람을 다룬 책도 많지만 아무래도 공주님께서는 최근에 나온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를 흥미로워하실 것 같습니다. 일단 시대적인 특성을 살리면서도 과감하게 변형한 아름다운 의상들이 엄청나거든요.
솔직히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평범한 수준입니다만 결혼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안 하는 게 낫다는 교훈만큼은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작품이지요. 왕권을 지키기 위해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1세도 늙고 쇠약해진 후 젊은 애인이 반역죄를 저질러서 참수형을 내리는 비극까지 겪게 됩니다. 하지만 제 자신과 왕국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거듭할수록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다가 끝내 참수형을 ‘당한’ 메리 스튜어트의 인생과 비교하자면 월등히 낫지 않습니까.
트렌드에 맞게 넷플릭스에서도 소개해 드릴 만한 작품이 하나 있네요.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재위한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더 크라운>입니다. 공주님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일 겁니다. 실권도 주어지지 않았고 정치적 개입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군주라니, 괴상하게 느끼시겠지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군주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군주의 근본적인 의무가 무엇인지를 끝없이 자문하고 답을 찾아 나가야 하는 근현대 여성의 삶이 그 드라마에 있습니다. 여왕이라는 세습된 직업과 한 가장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은 의외로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2차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그 결과 식민지를 잃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기와 맞닥뜨린 국민들 앞에서 25세의 어린 여왕이 군주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나가는 긴 싸움이 이 드라마에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공주님의 소중한 이집트가 중요한 갈등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있답니다. 젊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세 아이의 엄마이자 관록이 느껴지는 국가의 수장이 되는 시즌2의 마지막 회까지 정주행하신다면 지금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실 겁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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