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박은석
무대에서 존재하기
올겨울 관객과 처음 만날 신작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은 드래그퀸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공연을 즐겨 보는 관객들에게 드래그퀸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지만, 드래그퀸을 꿈꾸지 않았던 남자가 드래그퀸으로 꿈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는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한 남자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박은석이 찾게 될 페르소나는 무엇일까.
성장을 위해 필요한 도전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이하 <조지아>) 공연 이야기는 언제 처음 들었나요. 지난봄 <어나더 컨트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 작품 공연 초반에 출연 제안을 받았는데,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죠. 노래와 춤 같은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많은 연극이라 저에게는 새로운 영역처럼 느껴졌거든요. 작품 유형이 거의 뮤지컬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저희끼리는 연습하다 잠깐 쉴 때마다 “이거 연극 아닌데? 뮤지컬인데?” 그래요. 드라마를 잡아가는 연습뿐만 아니라 노래 연습도 해야 하고, 춤 연습도 해야 하고, 게다가 기타 연습도 해야 하니까 처음엔 고민이 됐어요.
그런데 결국 출연하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 이유는 뭐예요? 어떤 작품이든 출연을 결정할 때까지 항상 제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요. 그런데 스스로 혹사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늘 오랜 고민 끝에 도전 같은 작품을 선택하죠. 예를 들면 <카포네 트릴로지>랑 <벙커 트릴로지>는 3부작 공연 장르가 다 달랐고, <프라이드>나 <엘리펀트 송>은 대사량이 엄청 많았어요. 지금까지 속된 말로 빡센 작품을 주로 해왔다고 할까요. 제 자신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발전하려면 작품이 편하게 느껴지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쪽은 불편함을 느껴야 해요. 편안한 작품에 안주하지 말자, 이전에 해보지 못한 걸 해보자, 이런 주의예요.
이번 작품의 주인공 케이시는 뜻하지 않게 드래그 쇼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되는 인물이잖아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이 이야기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뭐라고 생각했어요? 케이시는 작은 바에서 유명인 모방 쇼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분명한 자기 꿈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게 되죠. 월세를 밀린 상황에서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고 거기에 갑자기 해고까지 당하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사람인데, 우여곡절 속에서 뜻밖의 기회에 드래그 쇼로 새롭게 살길을 찾는 거예요. 케이시를 볼 때면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싶죠. 어쨌든 전 이 작품은 아이덴티티 찾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케이시가 처음에 드래그 쇼를 할 때는 조금 부끄러워하는데, 그건 드래그퀸으로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드래그퀸이라는 자신이 몰랐던 세상을 통해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배워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게 되는 거죠. 유쾌함 속에 뭉클함이 있는 작품이에요.
케이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성격상 특징은 뭐라고 생각해요? 케이시는 무한대로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이런 점은 저랑 좀 비슷한데, 저도 매번 공연할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든요. 공연은 어떻게든 올라간다고, 우리 작품 좋으니까 잘될 거라고요. 케이시의 문제는 대책이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건데, 공연 막바지에 그런 긍정의 힘이 발휘돼요.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자신을 입증해서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내거든요. 그래서 저희 작품은 철없는 아이 같은 어른이 책임감 있는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어요. 너무나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라 왜 이제야 우리나라에 왔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케이시처럼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했는데, 혹시 지금까지 연습하는 동안 긍정의 힘을 잃을 뻔한 순간이 있었을까요? 기타 연습할 때요. 저는 제가 이 작품에서 진짜 기타를 치게 될 줄 몰랐어요. 그리고 몸이 고장 났는지 웨이브가 안 돼요! (웃음) 둘 다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긴 한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상이는 기타를 잘 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춰요. (강)영석이는 기타는 아직 잘 못 치지만 노래랑 춤은 돼요. 근데 저는 셋 다 안 돼요. 쇼노트 관계자분들께 저는 아무래도 미스 캐스팅인 것 같다고, 상이랑 영석이가 더블 캐스트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농담으로 그러고 있어요. 하하. 요즘 매일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서도 기타 연습을 하는데, 기타 치면서 노래를 한다는 게 정말 어려워요. 이러다 저만 기타 장면이 빠지는 게 아닐까요. (웃음)
그럼 세 사람 중에서 누가 이번 공연 연습을 제일 즐기고 있나요. 상이는 와…. 그 친구는 케이시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상이한테 제가 맨날 그래요, 케이시가 네 인생 캐릭터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저, 상이, 영석이, 셋의 드래그퀸 색깔이 다 달라요. 상이의 드래그퀸은 남성에, 영석이의 드래그퀸은 여성에 가깝다면, 저는 중성적인 느낌이죠. 그래서 제 생각에 <조지아>는 아예 안 본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한 번만 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저희 셋 중 한 사람 공연만 보고 이 작품을 봤다고 할 수 없을 거라 전 캐스트 공연을 다 봐야 해요. (웃음) 저는 뮤지컬을 안 해봐서 모르지만 다른 배우들이 저희 연습을 두고 뮤지컬 연습 같다고 그러는데, 내가 언제 남들 앞에서 이런 걸 또 해보겠냐고 생각하면 몸이 좀 힘들어도 힘이 나요. 즐거운 경험이죠.
새로운 페르소나를 찾아
드래그퀸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을까요? 최근에 저희 <조지아> 팀이 다 같이 이태원에 가서 드래그 쇼를 보고 왔는데, 흔히 생각하는 예쁘장한 남자가 여장을 하고 나오는 공연이 아니었어요. 키는 19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200 킬로그램이 넘는 커다란 남자가 수염도 안 밀고 나와서 공연을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드래그 쇼는 결국 자기 안에 숨겨진 페르소나를 끄집어내는 일이구나 싶더라고요. 왜냐면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사회성이란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숨기면서 살잖아요. 남들과 비슷해 보이기 위해서, 무리에서 튀지 않기 위해서요. 그런데 드래그 쇼는 내 안의 나를 과감하게 다 표출하는 거죠. 드래그퀸들에게는 그래서 드래그 쇼가 일종의 해방구가 되는 것 같아요. 저희 작품이 드래그퀸의 삶에 깊게 비집고 들어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관객분들이 공연을 보시면서 드래그퀸에 대한 선입견을 깰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극 중 드래그퀸 멘토가 등장하는데, 연기 생활을 하는 데 비슷한 존재가 있었을까요. 저는 혼자 동굴에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누군가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작품 할 때는 항상 내적 전쟁을 겪기 때문에 혼자 고민을 많이 하죠. 대신 부모님께 많이 의지해요. 특히 저희 어머니는 저한테 항상 ‘괜찮다’고 해주시는데, 그게 참 저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돼요. 예를 들어 제가 어머니께 이런 작품을 할까 고민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럼 저희 어머니는 너는 어차피 잘할 건데 뭘 고민하냐고 그러세요. “나 오늘 또 사고쳤어. 이런 걸 또 사버렸어” 그러면 어머니는 “그러려고 일하는 거잖아” 이러시죠. 제 긍정의 에너지는 항상 부모님으로부터 나와요.
박은석이란 배우도 처음부터 연기자를 꿈꿨던 게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케이시처럼 생각지 못한 기회에 자기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잖아요. 이번 작품을 통해 옛날 생각을 해보기도 했어요? 저는 타고난 성격이 지나간 일을 잘 기억 못해요. 왜, 친구들끼리 모이면 옛날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몇 년 전에 어디를 가서 뭘 했었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요. 그럼 전 항상 ‘우리가 그때 같이 거길 갔다고?’ 하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반응해요. 오늘이 지나면 기억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모든 일에 미련이나 후회가 없는데, 이게 어떻게 보면 되게 슬픈 거래요. 안 좋은 일을 쉽게 잊는 대신 좋은 일도 기억을 잘 못하니까요. 근데 어머니 권유로 연기 학원에 처음 갔던 날, 그날은 생생히 기억나요. 좁은 교실에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종이 한 장을 주시면서 앞에 나가 읽어보라고 하셨거든요. 낯선 공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 서 있으니까 종이가 막 떨리면서… 살아 있음을 느꼈어요. 그때 생각했죠. 나는 연기자가 될 것이다! (웃음)
연기자가 되고 나서 연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예요? 배우로서 큰 희열을 느낄 때요. 배우가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맡은 인물이 느끼는 감정 상태에 이르러야 하잖아요. <레드>의 켄으로 예를 들자면, 켄이 극 중 부모님이 살해당한 이야기를 할 때 연기적으론 그 감정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서 공연을 해요. 하지만 솔직히 저는 실제 부모님이 제 눈앞에서 살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인물만큼 감정을 느끼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싶을 때가 많아요. 켄이 느끼는 감정의 세기가 10이라면 저는 5정도 경험하고 켄의 마음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은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그 감정이 마음에 쿵 하고 올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때는 희열과 공포가 동시에 몰려와요. 이러다 내가 이 상태에서 못 벗어나면 어떡하지 싶어서요. 너무나 진부한 말이지만,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인물로 존재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어요.
두 시간짜리 공연에서 단 몇 초라도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제일 짜릿하죠.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짜릿함을 경험하게 되길 기대하나요. 제가 제 자신을 확실히 내려놓는 거요. 나이를 먹을수록 제 자신을 내려놓기가 힘들어지는데 그래도 연기할 때는 그 캐릭터가 되려고 집중하는 과정에서 제 자신을 잊게 되는 것 같아요. 단지 이번 공연에서는 노래와 춤을 보여줘야 하다 보니 집중력이 거기에 쏠릴까봐 조금 걱정이에요. 노래든 춤이든 감정을 느끼는 대로 하면 되는데, 처음 하는 거다 보니 ‘음이탈을 하면 어떡하지?’, ‘안무를 틀리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에 스스로 제 자신을 의식하게 될까 봐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과감하게 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배우들도 배우들이지만, 이번 공연은 관객분들도 자신을 내려놓고 100퍼센트 즐겁게 즐기고 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도록 저희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겠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5호 2019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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