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 이경수
뭉클한 전율을 담아
2016년 오페라 <리타>를 끝으로 한동안 휴식기를 가졌던 뮤지컬배우 이경수. 지난해 <여명의 눈동자>로 오랜만에 돌아온 그는 <1976 할란카운티>,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세종, 1446>에 연달아 출연하며 한 해를 꽉 채워냈다. 그리고 새해 초 재연을 앞둔 <여명의 눈동자>에 일찌감치 이름을 올렸다.
다시 돌아온 무대
3년 정도 휴식기를 갖는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쉬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고 휴식기에 들어갔던 건 아니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고, 육아를 이유로 한두 작품을 고사했더니 서서히 일이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2018년부터는 오디션도 꽤 많이 봤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믿기 힘들 정도로 오디션에서 계속 고배를 마시니까 지도자의 길로 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일을 쉬면서 육아에 전념하긴 했지만, 꾸준히 노래 연습을 하고 레슨을 받은 덕분인지 지난해 <여명의 눈동자>부터 다시 무대로 돌아오게 됐죠.
의도치 않게 휴식기를 가지면서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아마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연습하면서 극복하게 된 것 같아요. 저 연습 진짜 많이 했어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요. 피아노 앞에 하루라도 앉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요. 이게 습관이 되다 보니 아침 식사 후에 제 방으로 들어가서 발성 연습부터 하게 되더라고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만 하고.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고등학생 때도 이렇게 열정적이지 않았는데! (웃음) 앉아서 묵묵히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다 가고, 그럼 제 자신이 뿌듯하더라고요. 그렇게 행복하게 보냈어요.
그 휴식기가 이경수라는 배우를 채우는 시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와서 그동안의 시간이 빛을 발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그건 공연을 보신 분들이 판단하실 몫이 아닐까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쉬고 돌아왔더니 오히려 무대가 조금은 편해졌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꾸준히 노래와 연기를 공부해 온 이유를 알게 됐죠. 무대에서 그걸 느낀 순간이 많아요.
<여명의 눈동자>는 오랜만에 참여한 작품에다가 창작 초연작이었죠.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어느 날 노우성 연출님께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 물으시기에 다음 날 바로 만났죠. 전부터 <여명의 눈동자> 공연 소식은 들었고, 중간에 벌어진 우여곡절까지 다 알고 있었어요. 작품을 위해 모인 모두가 열정이 넘쳤고, 꼭 공연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그래서 합류하게 됐죠. 연습 기간에도 배우들이나 스태프들 모두가 이 작품에 참여하고, 공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 했어요.
초연 당시 런웨이 형식의 무대를 사용한 것도 화제였어요.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과 마주한 소감은 어땠나요? 그동안 익숙했던 액자 형식의 무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죠. 무대 위 동선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는데, 무대 형식상 관객에게 뒤통수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낯설었어요. 동선을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부분들이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된 거 포기할 건 빠르게 포기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전 이런 세세한 부분의 정리가 확실하게 이루어져야만 캐릭터의 감정에 빠르고 깊게 들어갈 수 있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작품에 빠져들다 보니 오히려 빈 무대가 편했어요. 혹시 몰라 덧붙이지만 초연 당시엔 무대만 비어 있는 상태였고, 동선이나 안무, 조명 같은 부분은 완벽하게 짜인 상태였어요.
그런 초연에 비해서 재연은 많은 변화가 예고됐어요. 아직 외부에 공개된 부분이 거의 없는데, 힌트를 조금만 줄 수 있나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으로 공연장을 옮기면서 무대 자체가 넓어졌어요. 그래서 거대한 무대를 굉장히 넓게 쓸 것 같아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직 스태프와 배우 들이 여러 의견을 나누고 있어요. 뮤지컬 넘버에서 새로 추가되는 곡도 있고, 솔로곡에 앙상블의 합창이 더해지는 정도의 변화가 있을 텐데, 초연 당시 관객들이 기억하는 멜로디가 크게 바뀌진 않을 것 같아요. 아마 대본이나 노래에는 큰 변화가 없을 듯싶어요.
초연은 공연 중후반으로 갈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점점 객석이 채워졌어요. 맞아요. 작품이 지닌 힘을 알아봐 주신 관객들이 서서히 공연장을 찾아주셨죠. 정말 짜릿했어요. 전율이 일었죠. 작품의 메시지가 워낙에 강렬하고 슬프잖아요. 이렇게 말로 설명하기엔 추상적이지만 마음을 뭉클하게 건드리는 작품이었어요. 게다가 모든 장면에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에 배우로서 중압감이 꽤 컸어요. 연습하면서 한순간도 허투루 참여할 수가 없었고요. 일제강점기 마루타 실험 장면에서는 여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많은 관객들이 저희 작품에 공감해 함께 눈물을 흘려주시고 가슴 아파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번 공연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작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꼽아줄 수 있나요? 초연 때 좋았던 노래는 여전히 다시 연습하면서도 좋더라고요. 하나 아쉬운 점은 요즘 그 노래를 부르기 힘이 든다는 것? (웃음) 지금도 좋아하지만, 초연 당시 하림의 ‘행복하길’을 정말 좋아했어요. 얼마 전에 녹음할 일이 생겨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힘들더라고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때보다 체력이 떨어졌나? 하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초연 당시에는 스스로가 전투적이었어요. 공연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했고, 작품을 구성하는 것들을 해내기에도 벅찼거든요. 지금은 조금 달라요.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이야기에 다가가려고 해요. 게다가 <여명의 눈동자>는 모든 장면마다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소리에 욕심을 부리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좋아하는 작품인 만큼 진짜 잘 해내고 싶어요.
이경수의 하림에게는 어떤 모습이 강조될까요? 여옥을 보호해 주는 장면이나 법정 장면에서 지난번과 또 다른 감정이 느껴지더라고요. 대치가 여옥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스타일이라면 하림은 먼저 생각하고 이후에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나의 행동과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렇게 고민하고 행동하죠. 게다가 여옥을 만난 하림도 삶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옥을 보호하고 그녀의 가족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게 돼요. 마치 보디가드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하림과 이경수가 비슷한 점이 있다면 뭘까요?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
만약 본인이 하림이었다면 대치에게 여옥을 보냈을 것 같나요? 어휴, 당연히 안 보내죠. 사실 하림을 연기하면서 살짝 답답했어요. 최근 다시 대본을 천천히 읽으면서 느꼈는데 여옥에게는 대치와 함께 보낸 시간이 큰 위로가 됐다고 느껴지더라고요. 대치는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여옥에게 꼭 살아야 한다고 건빵을 가져다 준 사람이고, 결국 사랑하게 된 사람이니까. 게다가 여옥은 그의 아이를 가졌고요. 자신의 목숨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여옥이 버텨왔던 삶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극적이에요. 얼마 전 노우성 연출님과 캐릭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또 한 번 여옥은 정말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여옥의 인생에서 대치를 만났던 순간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하림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우성 연출가와 캐릭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인물 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개인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때 제일 어려운 과정은 인물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부분이에요. 그래야 캐릭터에 이입해 감정이 깊어지는 편이거든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인물의 관계나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죠. 아쉽지만 초연을 준비하면서 이런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작가, 작곡가, 연출님과 깊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탄탄하게 준비하고 있어요.
인물 간의 관계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작품을 만나면 쉽지 않겠네요. 일단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에요. 무엇보다 그런 작품을 만나면 무사히, 잘, 다치지 않고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죠. 사실 이런 경우에는 제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현명하게 잘 판단을 해서 최선을 다하려 해요.
<여명의 눈동자>는 엔딩 장면에서 많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인데, 하림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아마 정상적인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했을 거예요. 눈앞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고, 세상의 불합리함을 직접 마주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요. 세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멀리 외국에 나가서 살았을 것 같아요.
나를 채운 시간
지난 2019년에는 <여명의 눈동자>, <1976 할란카운티>,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하 <스웨그에이지>), <세종, 1446>까지 정말 많은 작품에 참여했어요. 감사하게도 전부 다 먼저 연락이 왔어요. 처음에는 무리하고 싶지 않다가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올해는 달려볼까? 사실 지난해에 많은 작품에 참여한 만큼 모든 것이 쉽지 않았어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하니까 신경도 많이 썼고요. 게다가 작품이 모두 창작뮤지컬이었는데, 특히 <스웨그에이지> 같은 경우는 매 장면을 다듬는 작업이 섬세하게 이뤄져야만 했어요. 함께하는 배우들이 젊은 친구들이라,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부분도 챙겨줘야 했어요. 춤도 난이도가 있어서 고생을 많이 했죠. 물론 즐겁고 뿌듯했는데 기를 쪽 빨렸다고나 할까요? (웃음)
스스로 가장 만족한 작품은 뭐였나요? 단연 <스웨그에이지>요. 주저 없이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작품이에요. 만족이라는 표현보다 아쉬움이 없었어요. 마지막 공연이 끝나자마자 후련하고 시원했어요. 물론 이렇게 빨리 다시 재공연될 줄은 몰랐지만요.
다시 돌아오는 <스웨그에이지>에도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리던데요. 에너지가 힘찬 작품이라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참여한 작품이 거의 다 역사극이었는데 그 와중에 <스웨그에이지>는 성격이 조금 달랐죠. 전 이 작품이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서울만 한 조선이랄까, 상상의 세계 속에 있는 작은 나라라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요. 애착이 큰 작품이라 망설임 없이 다시 하겠다고 했어요.
새해 계획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맡은 공연을 열심히 하고 싶어요. 얼마 전 태어난 둘째 아이도 잘 키워야 하고요. <스웨그에이지> 이후로 어떤 작품에 참여하게 될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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