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앤 폴> 김드리 작곡가
음악으로 물든 풍경
아름드리나무에서 따온 한글 이름, 김드리. 신인 작곡가 김드리는 <줄리 앤 폴>, <붉은 정원>, <뱀파이어 아더>를 통해 그 이름처럼 감성적인 음악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뽐내듯 요란하지 않지만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한 그의 음악은 클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학에서 클래식을 공부한 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친절한 음악책』, 『왠지 클래식한 사람』 같은 클래식 입문서를 쓰기도 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그는 어떻게 뮤지컬이라는 낯선 길로 들어서게 됐을까.
2017 <줄리 앤 폴> 시범 공연
2018 <붉은 정원>, <뱀파이어 아더>
2019 <줄리 앤 폴>
대학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고백하자면 우연이었다. 대학 졸업 후 주로 동요나 합창곡을 쓰다가 오페라에 관심이 생겼다. 오페라 작곡을 배우려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 창작과에 지원했는데, 합격하고 보니 뮤지컬 작곡을 배우는 곳이더라. (웃음) 당시 나는 뮤지컬을 본 적도 없고 관련 지식도 전무한 상태였다. 잘못 찾아왔구나 싶어 낙담했지만, 당시 멘토였던 이지혜 작곡가님이 내게 가능성이 있다며 뮤지컬의 길로 이끌어주셨다. 오페라와 뮤지컬 모두 음악이 있는 극이지만, 아리아가 중요한 오페라와 달리 뮤지컬은 드라마를 살리는 게 중요하다. 하나의 뛰어난 독창곡이 아니라 캐릭터와 드라마를 살리는 곡을 쓰는 데 재미를 느꼈다.
뮤지컬에 뛰어들기 전에 각종 창작 동요제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더라. 가사가 있는 노래를 만드는 걸 좋아해서 가곡이나 합창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어린이 합창단의 노래를 듣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아이들 목소리에 반해 동요를 쓰기 시작했다. 동요 작곡의 어려운 점은 한 번에 기억되는 멜로디를 써야 한다는 건데, 그런 면에서 동요 작업 경험이 뮤지컬 작곡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반면 동요는 아이들이 부르기 쉽게 써야 하지만, 뮤지컬은 그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서 좋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뮤지컬은 무엇인가? 이지혜 작곡가님이 번안한 <벽을 뚫는 남자>를 보러 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작품이 있다니! 프랑스에서 만든 성스루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는 전형적인 브로드웨이식 뮤지컬과는 다른 점이 많지만 오랫동안 클래식을 공부해 온 내게는 오히려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뮤지컬 음악이 그처럼 독특한 색채를 품을 수 있다는 걸 안 뒤부터 뮤지컬이란 장르에 더 깊게 빠져들었다.
<줄리 앤 폴>은 어떻게 탄생한 작품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 창작과에 있을 때 쓴 첫 뮤지컬이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면 음악을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말에 김유정 작가님이 에펠탑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를 써주었다. 내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는 라벨, 드뷔시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의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음악은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고 오묘한 화성을 써서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라벨은 그 안에서도 멜로디 라인이 분명한 곡을 써서 좋아한다. <줄리 앤 폴>을 작곡할 때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클래식뿐 아니라 샹송도 많이 들었다. 공연을 본 관객들이 잠깐 동안 다른 세계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곡했다.
프랑스의 정취가 묻어나는 아코디언 등 악기 편성에도 공들인 느낌이다. 악기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작년에 ‘슈퍼밴드’라는 TV 프로그램에 아코디언 연주자가 출연한 걸 보고 직접 연락을 취해 공연에 섭외했다. 이 작품은 처음에 멜랑콜리한 느낌을 주는 중저음 현악기 비올라 위주로 작곡했는데, 이번에 제작사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악기가 더 늘어났다. 기존의 비올라 파트를 첼로와 바이올린이 나누어 맡아 한층 풍성한 사운드를 들려드릴 수 있게 됐다. 또 비브라폰이라는 신비한 음색의 타악기를 더해 판타지적인 느낌을 살렸다.
지난 공연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또 있을까? 지난 공연 때는 줄리 혼자 감정을 정리하고 폴과 이별했다면, 이번에는 줄리와 폴이 함께 감정을 정리하는 노래 ‘사랑, 두려움’이 추가됐다. 직전까지 한껏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는 장면이라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줄 만한 노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지난 공연 때부터 아쉬웠던 부분인데 이번에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곡을 써야 할지 분명해졌다. 줄리와 폴이 재회하는 장면에서도 이 곡이 리프라이즈된다.
다른 인터뷰에서 ‘있어 보이기 위한 고음을 쓰지 않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멜로디로 줄리와 폴의 성격을 보여주려 했다’고 얘기한 바 있다. 뮤지컬 넘버가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려면 화려한 고음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난 작법이라 인상 깊었다. 물론 뮤지컬배우의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뮤지컬 넘버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줄리 앤 폴> 같은 따뜻하고 소박한 이야기에 고음이 난무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이 작품은 대사가 많지 않아서 노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가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다고 음악이 단조롭거나 심심해도 안 되니까 합창곡은 고음을 쌓아 풍성하게 표현했다.
공장이나 쥐의 움직임을 음악으로 표현한 점도 재미있다. 평소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해서 음악을 쓸 때도 가사에 쓰인 단어에서 영감을 얻곤 한다. ‘공장’이라는 단어는 받침으로 이응이 두 번 쓰여서 발음하는 것만으로 분주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그 느낌을 살려 위트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나폴레옹 7세의 편지’는 사람이 아닌 쥐가 부르는 노래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쥐의 특성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즐겁게 작곡했다.
뮤지컬 음악을 쓸 때 작업 순서와 스타일은? <줄리 앤 폴>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과제로 만들었던 작품이라 첫 곡부터 차례대로 일주일에 한 곡씩 써 내려갔다. 평소에는 작가와 상의해서 꼭 필요한 테마곡부터 미리 작곡한다. 창작 과정에서 이야기가 계속 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사에 맞춰 작곡하는 걸 선호하지만 수정 대본이 완성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서 분위기에 맞춰 곡을 먼저 쓰기도 한다. <줄리 앤 폴>에서는 ‘세느강의 연인’과 ‘안녕, 파리’가 가사보다 음악이 먼저 나온 경우다.
지금까지 매번 다른 작가와 작업을 해왔는데, 그럼에도 작품에 공통적으로 순수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다. 작곡가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까? <줄리 앤 폴>과 <붉은 정원>은 학교에서 만든 작품을 발전시킨 것이고, <뱀파이어 아더>는 한정석 작가님이 대본을 보고 내 음악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해 주셔서 참여했다. <붉은 정원>과 <뱀파이어 아더>는 꽤 어두운 이야기지만 음악의 다양성을 위해 너무 어둡게만 풀어내지 않았다. <붉은 정원>을 작업할 때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이반의 순수함을 살리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뱀파이어 아더>는 대본에 어두운 장면과 밝은 장면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앞으로 어떤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나?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뮤지컬 만들고 싶다. 아이들 특유의 맑은 목소리를 정말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뮤지컬은 교육용이나 이벤트용으로 공연되는 경향이 있어서 웰메이드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아역 배우를 돌보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웃음) <젠틀맨스 가이드>처럼 코믹한 이야기나 치명적인 이야기에도 끌린다. 잔잔하고 따스한 작품을 경험해 봤으니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도 만나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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