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맞는 길을 오래도록 가겠다
밤에는 두 작품의 주인공을 맡아 공연장을 번갈아 오가고, 낮에는 다른 작품의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이 바쁜 일정의 주인공은 이준혁이다. 지난 한 해를 꼬박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한영범으로 살았던 그는 <빨래>와 <트루시니스>로 2014년을 열었고, 이번 달부터는 <정글라이프>에 투입된다. ‘한 번에 한 작품’의 원칙을 10년 넘게 지켜온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강행군 속에서 완성되고 있는 이준혁의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났다.
오랜 갈증을 풀어준 캐릭터, 오레오
무인도에서 돌아온 한영범 대위가 낙하산을 타고 ‘오레오 상무’로 부임했다. 지난해 <정글라이프> 리딩 공연에서 오레오 상무를 맡았던 이준혁이 이번 본 공연에서 같은 캐릭터로 돌아왔다. 사장 아버지를 둔 ‘빽’으로 상무가 된 오레오는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부서원을 이용하는 비열한 인물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카인즈나 <빨래>의 솔롱고, 그리고 한영범처럼 그동안 이준혁이 주로 맡아왔던 따뜻한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유형인 셈이다.
처음 경험하는 인물이라 적응하기 어려울 법하지만, 이준혁은 오히려 신이 나 있다.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이 주로 착하고 순수한 역할들뿐이라 사실 굉장히 답답했거든요. 실제 저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역할은 ‘철저하게 나쁜 놈’이었어요. 사람들이 쌍욕을 할 만큼요.”
이준혁에게 오레오는 그런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 지난해 리딩 공연에서 처음 오레오와 만난 이준혁은, ‘평소 모습대로 하라’는 연출가의 농 섞인 디렉션을 충실히 수행하며 이 역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내친김에 연말 트라이아웃 공연에도 나설 계획이었지만, <빨래>의 지방 공연과 스케줄이 겹쳐 아쉽게 참여를 포기해야 했다. 올해 예상보다 빨리 잡힌 본 공연도 사실 지금의 이준혁의 스케줄이라면 무리한 일정이지만, 그만큼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컸기에 출연을 강행하게 됐다.
오레오는 이준혁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캐릭터이지만, 이미 그와 상당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선 둘 사이에는 공통적인 코드가 있다. 바로 ‘사자’다. 오레오는 극 중에서 홍호란 부장과 함께 각각 사자와 호랑이를 상징하는 캐릭터다. 이준혁 또한 주변 선배들로부터 ‘새끼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겁 없이 덤비는 막무가내의 성격이 닮아서다. 그래서 그가 연기하는 오레오는 평면적인 악역 이상의 생동감을 보여준다.
극 속에서 제멋대로 활개치고 다니는 오레오의 모습은 이준혁의 직업관과도 연결돼 있다. 어느덧 11년 차 배우가 된 이준혁도 한때 이 생활이 힘들어 직장인 생활을 잠깐 상상해본 적이 있다. 고민은 몇 초 만에 끝났다. “정말 못할 것 같더라고요. 배우는 의사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직장에서는 그게 안 되니까요.” 평소 바른 말 잘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의 그가 오레오처럼 마음껏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은 무대뿐이었다. 위계질서로 무장된 곳은 그에겐 감옥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군대에서 의견을 표출하며 흥분하다 영창에 갈 뻔한 적도 있다. “그래서 오레오가 참 재미있어요. 내 거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물론 실제로 그런 힘이 제게 있다면 그렇게 안 하겠지만요. (웃음)”
소극장 창작뮤지컬을 이끄는 주역
<정글라이프>는 언뜻 오피스 뮤지컬처럼 보이지만 실은 경쟁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의 모습을 풍자한다. 경쟁이 심한 건 배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가 배우다. 신인부터 기성까지 모든 배우들은 오디션을 거치고, 명문화된 기준은 없어도 경력이나 흥행 파워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이준혁은 배우의 등급을 1~5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자신은 3급이나 4급 정도라고 자평한다.
“어릴 때는 솔직히 1급이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1급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고개가 숙여지더라고요. 얼마 전 <트루시니스>를 연습할 때는 펑펑 울었어요. 내 존재가 하찮은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항상 개구쟁이 같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이준혁이 털어놓는 이런 속내는 의외다. 하지만 그가 이런 자기 평가의 시간을 통해 초심을 다지는 건 이미 20대부터 이뤄졌다. 다른 남자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군대가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노틀담의 꼽추>에서 콰지모도 역을 맡아 많은 주목을 받던 그에게 주변 선배들은 ‘군대행’을 권유했다. 벌써 스타가 된 양 자만하던 그를 철들게 하려는 당부였던 셈. 그런데 당시 이준혁에게는 이런 결정조차도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공백이 있어도 잘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역을 앞두고 그도 서서히 배우 생활의 위기감을 느끼는 계기가 생겼다.
“친하게 지냈던 (이)석준 형이 “너보다 잘생기고 노래, 연기 다 뛰어난 배우들이 많아졌다”며 걱정해주는데, 조정석, 김무열, 이신성, 이율 같은 배우들이었죠. 휴가 나오자마자 검색을 해봤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웃음)” 고민하던 그가 선택한 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였다. 전역 후, 친분이 있던 장유정 연출이 그에게 <오! 당신이 잠든 사이>의 주역을 권했지만, 그는 대신 초연작 <형제는 용감했다>의 앙상블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낮췄다. 천방지축 같았던 이준혁의 변화에 주변 선배들도 그를 기특하게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때 가장 큰 성과는 이준혁이 뮤지컬에 대한 애정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됐다는 것이었다. “앙상블의 매력을 다시 맛보게 되니까 소극장 작품이 정말 좋아지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뮤지컬을 하게 된 거였지’ 하는 초심도 느껴지고.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드라마가 강한 작품을 계속하게 됐어요.” <빨래>와 <여신님이 보고 계셔> 같은 작품에서 그의 존재가 유독 돋보이는 까닭도 여기서부터 비롯됐다.
지난해 연기 경력 10년째를 맞으며 이준혁은 다시 한 번 배우의 길을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이를 기점으로 소극장 창작뮤지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고히 다졌다. 그것은 대극장에 서는 배우가 아니면 ‘뮤지컬 배우’라고 여기지 않는 풍토에 관한 것이다. “가끔 특강에 나가서 보면 뮤지컬학과 학생들마저 대극장용 배우들만 동경하고 스타로 추앙하거든요. 그래서 전 오히려 소극장용 창작 작품에 애착이 가요. 그리고 거기에서 활동하면서 좋은 배우가 돼서, 배우의 길에 다양한 경로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물론 그는 ‘스타’가 아니다. 또래 배우들이 대극장 무대와 TV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그는 묵묵히 소극장과 창작뮤지컬의 한편을 지켰다. 스타가 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 리셋 버튼을 눌러 굳이 먼 길을 돌아왔다. 그것은 자신이 말한 대로 언젠가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포부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나 대극장에 대한 조바심이 없다. “뭐든 무리하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내게 맞는 걸, 오랫동안 하면서 이뤄내고 싶어요.” 뭔가를 상상하듯,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이 꽤 행복해 보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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