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진 브로드웨이
극장 문이 닫히기까지
2020년 3월 1일 뉴욕주에서 코로나19 첫 번째 확진자가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열흘이 지나면서 인구 밀도가 높은 뉴욕에서는 바이러스 확산의 불안감이 점차 고조됐다. 그리고 3월 12일 낮 화제작 <식스>의 정식 개막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에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의 일일 브리핑에서 새로운 방침이 발표됐다. “학교, 병원, 대중교통, 요양원을 제외하고는 500명 이상의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한다.” 여기에는 500석 이상 규모의 극장을 일컫는 브로드웨이 극장들도 포함됐다. 이 조치는 이튿날부터 효력이 발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브로드웨이는 예외적으로 즉각 적용을 받게 되어, 그날 오후 5시를 기점으로 브로드웨이의 41개 극장이 32일간 문을 닫게 되었다.
한창 상연 중이던 30개 작품이 중단되었으며 개막을 앞두고 있던 16개 작품도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유행에도 문을 닫지 않았던 브로드웨이 극장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전례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브로드웨이의 공연 중단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파업, 폭풍, 9.11 테러 등 여러 이유로 극장이 불가피하게 문을 닫아야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이틀 만에 공연을 재개했을 만큼 대부분 극장 폐쇄는 일시적이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극장이 문을 닫는 것은 파업으로 20여 일간 공연이 중단되었던 1975년과 2007년 이래로 처음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주 정부의 극장 폐쇄 명령이 있기 전부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선제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이러스 확산 조짐이 보이자 프로듀서 및 극장주를 대표하는 조직인 브로드웨이 리그 차원에서 극장 로비에 손 세정제를 비치하고 객석 청소 및 소독 횟수를 늘리는 등 위생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외에도 극장 내 매점에서 음료를 리필할 경우 컵을 재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공연 후 배우와 관객의 접촉 역시 엄격하게 관리했다. 시나 주 단위의 행정 명령 없이 공연을 자발적으로 중단하면 보험사 규정에 따라 보상을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은 공연을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예방 조치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3월 11일, 연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와 뮤지컬 <식스> 프리뷰 공연 극장에서 일했던 안내원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1,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이는 브로드웨이 공연의 규모, 그리고 관객 다수가 바이러스에 취약한 고령층인 것을 고려하면 아찔한 소식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조금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연일 확진자 수가 가파르게 늘어났다. 대표적인 다중이용시설인 브로드웨이 극장 폐쇄는 시간 문제였을 뿐,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공연계의 반응과 대책
브로드웨이 리그의 분석에 따르면, 브로드웨이는 지난 시즌 뉴욕 일대에 9만 6천9백여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연간 147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함으로써 뉴욕 경제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공연 중단으로 티켓 매출 수익은 통째로 사라졌고 계약직 프리랜서로 일하는 배우와 연주자를 비롯한 스태프대부분이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공연의 갑작스러운 중단으로 모두가 위기에 처했지만 우선은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고통을 분담하는 모양새다. 3월 20일 브로드웨이 리그와 브로드웨이노조연합(Coalition of Broadway Unions and Guilds, 브로드웨이 피고용인들을 대변하는 14개 노조의 연합)은 공연이 중단된 날을 기준으로 30개 상영작과 공연을 준비 중이던 3개 작품에서 일하던 조합원들을 위한 단기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공연 중단이 결정된 주간에 한해 정상 임금을, 이후 2주간은 계약서상 최저 임금을 받게 됐다. 건강보험 및 연금 관련 혜택 역시 이 기간에 온전히 유지되며, 그 이후 4월 12일까지는 건강보험 혜택만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들에게 어떤 지원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배우조합(Actors’ Equity Association)은 3월 24일자로 조합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커튼 업’ 펀드를 조성하고 50만 달러(약 6억 원)를 내놓는 한편, 기부자들로부터 추가로 25만 달러를 모금하는 중이다. 프로듀서들 역시 브로드웨이 케어즈/에이즈에 맞서는 배우조합(Broadway Cares/Equity Fights AIDS)과 함께 코로나19 긴급 지원 자금 조성을 위해 백만 달러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일반인 후원자들의 기부금 1달러당 프로듀서들이 최대 백만 달러까지 기부하는 형식으로, 힘을 합쳐 기부 금액을 두 배로 늘리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이 기금은 불과 며칠 만에 목표 금액 2백만 달러(약 24억 원)를 달성했으며, 뒤늦게 합류한 프로듀서들이 백만 달러를 추가 모금하는 중이다.
이처럼 노조와 리그는 공연계 차원에서 자구책을 마련하는 한편 일반적인 고용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 및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이 실직 수당과 건강보험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의회에 적극적인 구호를 요청했다. 공연이 중단돼 일자리를 잃은 이들의 경우 단기적으로 임금의 일부라도 보장받게 됐지만, 연습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 제작이 유예 혹은 취소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구제가 더욱 절실하다. 다행히 3월 25일 상원에서 통과된 2조 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 패키지를 통해 이들처럼 자칫 구호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었던 예술인들도 재난 수당 수급자가 될 수 있을 전망이다.
앞으로 브로드웨이는?
이번 공연 중단은 투자자들과 예술가들을 비롯해 관련 산업 종사자들에게 수천만 달러 이상의 금전적 손실을 안길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규모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번 폐쇄 조치는 그 기간이 전례 없이 길 뿐 아니라 브로드웨이가 한 시즌 마무리를 앞둔 시점에 내려졌다는 점에서도 타격이 크다. 통상 브로드웨이는 관객이 몰리는 연말연시가 지나면서 다소 정체되었다가 3월 중순 무렵부터 다시 분주해진다. 이때부터 토니상 후보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프로덕션들이 줄지어 브로드웨이에 둥지를 틀고, 흥행을 결정지을 리뷰가 나오고, 토니상 후보작들이 거명되는 한 해 중 가장 바쁜 시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2019-2020 브로드웨이 시즌은 4월 23일이 마감이어서, 폐쇄 조치가 내려진 3월 12일 부터 줄지어 신작 개막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폐쇄 조치가 발표되자, 비영리 단체인 라운드어바웃 시어터 컴퍼니, 맨해튼 시어터 클럽, 링컨 센터는 브로드웨이 개막을 준비 중이던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Caroline, or Change)>, <벌스데이 캔들(Birthday Candles)>, <운전 배우기(How I Learned to Drive)>, <플라잉 오버 선셋(Flying Over Sunset)>을 다음 시즌으로 미루었다. 아예 일찌감치 재오픈을 포기한 작품들도 있다. 연극 <행맨>은 극장 폐쇄 조치가 발표된 날 13회차 프리뷰 공연을 앞두고 있었는데, 공연 중단 기간에 치르게 될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공연을 내린다고 밝혔다. 10회차 프리뷰 공연을 앞두고 있던 연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도 폐막 소식을 전했다. 프리뷰 단계에서 막을 내리는 공연들이 나오는 것은 브로드웨이 상업 공연들이 위기에 얼마나 취약한지 잘 보여준다. 조기 폐막은 관련자들에게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힐 뿐 아니라 오랜 시간 공들여 공연을 준비한 이들과 공연을 손꼽아 기다려온 관객 모두에게 마음 아픈 일이다.
그렇다면 공연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당초 브로드웨이 리그는 3월 12일부터 한 달여간 극장 문을 닫고 4월 13일부터 공연을 재개한다고 공지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4월 8일 성명을 통해 극장 폐쇄 조치를 6월 7일까지 8주 연장했다. 이로써 사실상 이번 시즌은 조기 마감하게 되었고 원래 6월 6일 정식 폐막 예정이던 뮤지컬 <비틀주스>는 폐쇄 기간 중 막을 내리게 됐다. 4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바이러스 확산세가 좀 꺾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뉴욕은 미국 내에서 코로나19의 피해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다. 따라서 필수 사업장만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상태로, 공연 재개 여부 역시 관련 행정 부처의 지시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뉴욕 매거진>의 기사 ‘브로드웨이는 어떻게 이 팬데믹에서 회복할 수 있을까?’에 따르면, 이번 사태가 공연계에 미칠 영향이 더욱 우려되는 이유는 뉴욕의 대표적 관광 자원인 브로드웨이의 간판 공연들까지도 휘청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누구나 ‘브로드웨이’ 하면 떠올리는 작품들은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며 뉴욕의 뮤지컬 시장을 지탱해 왔다. 하지만 공연 중단이 장기화되면 브랜드 공연들의 기반이 흔들리게 될 수 있다.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많아도 이미 주기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수익이 분배된 상태에서 장기간 티켓 판매 없이 손실을 감당하기란 이들에게도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브로드웨이 관객을 분석한 연간 보고서를 살펴보면, 극장을 찾은 전체 관객 가운데 뉴욕 일대에 사는 이들은 대략 35%에 불과하며 나머지 관객의 46%는 미국 내 관광객, 19%는 해외 여행객이 차지한다. 결국 브로드웨이의 맥박을 뛰게 하는 것은 관광객이다.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여러 시즌을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관객이 공급돼야 하기 때문에, 수십 년째 장기 공연 중인 <시카고>, <오페라의 유령> 같은 작품들의 수입은 관광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관광업이 사실상 마비된 가운데 이들이 팬데믹의 여파를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례 없는 경기 악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적게는 수십 달러, 많게는 수백 달러에 달하는 공연 티켓을 살 수 있는 물질적, 심리적 여유를 언제쯤 되찾게 될까? 바이러스가 잦아들면 대부분이 고령인 브로드웨이 관객이 다시 마음 편히 극장을 찾을 수 있을까? 이처럼 수많은 물음표가 답 없이 허공에 맴도는 가운데 공연이 재개한다 해도 무려 1,480만 명이 극장을 찾았던 지난 시즌과 같은 활기를 회복할 수 있을지,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불투명해진 토니 시상식
브로드웨이 공연이 전면 중지된 가운데, 제74회 토니 시상식 역시 잠정 연기되었다. 4월 8일자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시상식 일시를 조정하는 몇 가지 선택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후보 자격을 주는 기한을 연장하고 시상식을 하반기로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극장이 언제 문을 다시 열지 모르는 시점에서 유권자들이 후보작들을 다 보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 안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다른 대안으로는 조기 마감하게 된 2019-2020년 시즌을 대상으로 시상식을 진행하는 방안이 있다. 이 경우 3월 12일과 4월 23일 마감일 사이에 오픈 예정이었던 16개 공연은 자동 탈락되면서 후보군이 대폭 축소된다. 이 밖에 이번 시즌과 다음 시즌을 합쳐서 내년에 시상식을 진행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결정된 바가 없고, 시상식 일시는 브로드웨이가 문을 다시 여는 시점에 맞추어 조정될 전망이다.
한편 공연계의 다른 시상식들 역시 행사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등 다양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이 중 오프브로드웨이, 오프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대상으로 하는 오비 어워드는 온라인 시상식으로 진행하는 대신 절약된 행사 비용을 개별 예술인을 지원하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재원이 바닥날 때까지 신청자에 한해 예술인 한 명당 500달러를 지급할 예정이다.
극장의 불은 꺼졌지만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3월 25일자 브리핑에서 뉴욕이 모두에게 열려 있고 인구 밀도가 높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바이러스에 취약한 곳이 되었지만, 바로 그 약점이 뉴욕의 강점이기도 하다면서 뉴욕 특유의 강하고 끈끈한 공동체를 통해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했다. 앞서 소개한 리그와 조합이 주도하는 공연계 내 자구책과 더불어, 유명 배우들 역시 공연계 동료들을 위해 자선기금 마련에 앞장서고 있다. 이처럼 브로드웨이는 공동체 중심으로 작동하며 이러한 공동체 의식과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의 연대감은 브로드웨이의 자부심이기도 한데, 어려움 속에 브로드웨이가 뉴욕이라는 더 큰 공동체와 어떻게 연대하고 있는지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3월 말, 마스크와 의료 가운을 비롯한 의료진의 개인보호장비가 절대 부족하다는 주지사의 호소에 공연계가 팔을 걷고 나섰다. 공연 의상 팀의 기술을 동원해 마스크와 의료용 가운을 제작하기로 한 것. 이에 타임스퀘어에서 연습실을 임대하는 오픈 자 스튜디오(Open Jar Studios)의 대표 제프 와이팅과 <해밀턴> 출연 배우 하비에르 무뇨즈가 주지사 사무실, 뉴욕시와 협조해 브로드웨이 구호 프로젝트(Broadway Relief Project)를 조직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물랑루즈!>, <미세스 다웃파이어>, <컴퍼니>, <비틀주스> 등의 의상 팀을 포함한 수백 명이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이들을 위한 보호 장구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재봉 기술을 가진 사람만 참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의 공연을 만드는 데 수없이 많은 백스테이지 인력이 투입되듯이, 평소 무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공연계의 깊고 단단한 네트워크 전체가 앞장서 힘을 보태고 있는 중이다. 공연용 의상 및 커튼 원단을 취급하는 업체들이 규정에 맞는 자재를 공급하면, 오픈 자 스튜디오에서 키트로 제작해 뉴욕 곳곳에 퍼져 있는 의상 팀 자택으로 보낸다. 자재 키트와 완성품 배달은 1908년부터 브로드웨이 의상 세탁 및 수선을 책임져 온 어네스트 윈저 세탁소(Ernest Winzer Cleaners)가 맡았다. 또 무대 자동화 설비를 제작하는 업체 PRG의 경우 20만여 개의 의료용 안면보호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실직 상태에 놓였던 공연계 종사자들은 급여를 받으며 일을 할 수 있게 됐고(이 급여를 배우 지원 기금으로 내놓는 이들도 있다) 의료진의 경우 장비 걱정을 덜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다. 보호 장비를 만드는 공연계 종사자들의 모습은 총동원 전시 체제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뉴욕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는 뉴욕을 지키는 강한 공동체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코로나19는 나쁜 소식을 가져오지만 여기에 맞서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덕분에 뉴욕의 상황은 천천히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공연은 잠시 멈췄지만 다시 막이 오를 날을 기다리며 공연계는 여전히 분주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0호 202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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