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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리지>​, 우리에겐 또 다른 도끼가 필요하다 [No.200]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쇼노트 2020-05-15 5,065

<리지>
우리에겐 또 다른 도끼가 필요하다 

 

 

록 뮤지컬의 마이크

겉모양 때문에 괜히 오해하게 되는 것은 단지 사람뿐만이 아니다. 록 뮤지컬이 그렇다. 록이라는 음악의 자유분방함과 강렬함 때문에 록 뮤지컬도 그만큼 ‘센’ 장르로 생각되게 마련이다. 물론 록 뮤지컬치고 세지 않은 작품은 없다. <헤어>의 파격이든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참신함이든 <록키호러쇼>의 황당함이든, 록 뮤지컬은 서사에서나 형식에서 장르의 선을 넘나드는 데 맨 앞자리에 있다. 이 센 기세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답은 주인공들에게 있다. <렌트>의 젊은이와 <헤드윅>의 소수자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청소년. 이들의 공통점은? 말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록 뮤지컬의 중심에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록 뮤지컬의 강한 ‘샤우팅’은 이들의 목소리에 다름 아닌 거다. 
 

이렇게 보자면 록 뮤지컬은 여성주의의 상상력에 가장 충실한 장르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의 목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사실, 이 당연함을 일깨우는 상상력은 여성주의의 것이기 때문이다. 록 뮤지컬의 강한 에너지는 현실에서 마땅히 말할 권리를 가져야 하지만 자기의 목소리를 갖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따뜻함이다. 이런 역설이야말로 록 뮤지컬이 발휘하는 최고의 덕목일 터. 가장 세 보이는 장르의 바탕에 가장 여성적인 상상력이 깔려 있는 셈이다. 록 뮤지컬의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가 극 중 인물의 대사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세상을 향해 날것으로 외치는 목소리에 가까운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 목소리는 증폭되어야만 한다. 록 뮤지컬의 무대 한가운데에 놓인 마이크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록 뮤지컬을 표방하는 <리지>의 무대에 마이크 네 개가 서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의 말이 네 배로 크게 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근친 성폭력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도끼를 휘두르는 여자와 그 살인의 테두리에 기꺼이 가담하는 여자들이니 말이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아이들이 품에서 꺼내들었던 마이크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라면, <리지>의 여자들이 붙잡는 스탠드 마이크는 이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수단이다. 배우들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극’이라는 틀은 깨져야 할 것이고, 그들의 노래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마이크는 서사와 장르에서 여성주의의 교집합을 구현하는 매개체이다. 공연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오브제인 것이다.     


 

과잉이지만 괜찮아?

이 공연은 상징적인 오브제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으니 바로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너무 세게 활용하는 바람에 마이크는 서사적 거리 두기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극 중 인물들의 일상이 펼쳐질 때도, 자기의 내면을 토로할 때도, 서로 대화할 때도, 그들은 예외 없이 스탠드 마이크를 향한다. 모든 대사에 강조의 방점이 찍히는 셈이다. 이럴 거면 배우들의 무선 마이크와 무대 위의 스탠드 마이크를 구분할 필요가 뭐가 있나. 극이 흘러가는 시간과 현실을 폭로하는 순간마저 구분되기는커녕 아예 섞여버리니 마이크의 퍼포먼스 효과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이크는 배우의 록커 변신을 위한 평범한 소품에 불과할 뿐이다. 마이크가 만들어낸 효과는 오직 하나, 과잉이다.  
 

과잉은 이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조명 음향 영상을 막론하고 과한 에너지가 여기저기서 넘쳐난다. 조명은 무대를 향해 눈을 뜨기 힘들 만큼 강하게 반복되고, 영상은 대사와 상황을 부지런히 설명하며, 음량은 언제나 최대치의 볼륨을 자랑하는 식이다. 강약약 중강약약은 없다. 강강강강의 연속이다. 시종일관 고조된 시청각의 언어에 눈과 귀가 지칠 지경이다. 이런 과잉에 설득이 되는 이유는 공연의 바깥에 있다. ‘n번방’ 사건의 끔찍함과 주인공 리지가 겪는 삶의 끔찍함이 뭐가 다른가. 성폭력에 갇혀 고립되어버린 리지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이런 리지가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아버지)에게 마흔한 번 도끼를 내리찍는다니! 이것은 복수의 판타지일 뿐 아니라 같은 폭력에 갇힌 사람들에게 건네는 생존의 공감이요 역설적인 위로이다. 불을 품고 있는 이 작품에 기름을 붓는 건 지금 이곳의 현실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의 맥락을 잠시 걷어냈을 때 이 공연이 흥분하느라 간과한 부분은 확연해진다.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 스며든 장르물로서의 재미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막은 1892년 매사추세츠의 한 마을에서 젊은 여성인 리지 보든이 살인을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이고 2막은 리지의 살인을 지지하는 여자들이 리지를 도와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의 과정이다.   1막의 분위기는 어둡고 우울해서 현실적이다. 하지만 2막으로 가면 이야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살인에 동의하는 여자들의 연대는 탄탄하고, 그들의 증언은 기가 막히도록 뻔뻔하며, 진실을 말하려는 자와의 생각지도 못한 동맹은 반전인 만큼 통쾌하다. 막이 바뀔 때 이들은 드레스를 벗어던지며 록커의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런 설정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진짜 이 옷이 어울리려면 그들은 비장하기보다는 여유로워야 한다. 법이라는 규칙과 사회라는 제도를 훌쩍 뛰어넘어 그것의 뒤통수를 치는 차갑고 능청맞은 도발일 때 이들의 짧은 상의와 핫팬츠는 단단한 여성성의 장르적 표현일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런 거리와 여유를 갖기에 이 작품은 그저 뜨겁고 강하기만 하다. 

 

진짜 도끼를 찾아서 

이런 뜨거움의 뒷면에서 언뜻 보이는 것은 기시감이다. 살인과 동성애, 공모된 범죄 등 이 작품을 이루는 재료는 지금껏 봐왔던 남성 서사의 한 부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서사에 과잉으로 점철된 표현은 왠지 낯설지 않다. 사실 이 공연의 곳곳에는 깜짝 놀랄 만큼 무신경하게 만들어진 장면들이 많다. 예를 들면 아버지에게 당한 성폭력을 암시하는 리지의 몸짓과 리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앨리스의 몸짓이 크게 다르지 않은 식이다. 폭력과 사랑은 성애의 공통분모로 절대 엮일 수 없다. 앨리스의 손길은 아버지의 폭력과는 전혀 다른 어루만짐이어야 한다. 여성의 사랑에 대한 시각적 상상력의 빈곤함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뒤집은 남성 서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같은 구도라도 남자가 주인공일 때 이야기는 판타지가 될 수 있지만, 여자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모든 사건은 현실의 맥락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리지가 처한 상황은 리얼리티이고 리지가 잡아 든 도끼는 은유가 아니라 실용이다. 이 공연을 향해 관객의 반응이 뜨거운 것은 성장형 여성 서사와는 완연히 다른 맥락의 현실적 서사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젠더밴딩을 통해 성별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여성을 재발견하는 시도(성과가 아니다!)는 많지만 여성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이야기는 드물었던바,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좀 더 잘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단지 흥행을 위해서가 아니다. 의미를 품은 공연은 사회를 깨우는 도끼가 된다. 이토록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리지처럼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지가 도끼를 쥐지 않아도 되도록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닐까. 폭력을 단죄하는 도끼는 리지가 아니라 법의 손에 있어야 한다. 법이 법답게, 공연이 공연답게 자기의 일을 하는지 도끼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바라건대 n번방의 가해자들에게 도끼의 처벌이 있기를.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0호 202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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