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속 LGBT
<베어 더 뮤지컬>, <렌트>, <제이미>, <펀홈>, <킹키부츠>. 8월에 공연되는 이들 뮤지컬의 공통점은? 바로 LGBT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어느덧 흥행의 열쇠로 회자되는 LGBT. 이들은 어떤 역사를 거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일까? 과연 이들은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무대 위 그들의 자리를 점검해 보았다.
국내 뮤지컬 속 퀴어의 계보
쇼의 주인공, 드래그 퀸
한국에서 드래그 퀸 뮤지컬의 대표주자는 두말할 것 없이 <헤드윅>이다. 트랜스젠더 록커 헤드윅의 이야기를 그린 <헤드윅>은 2005년 초연 당시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소극장 뮤지컬의 신화로 자리매김했다. 작년까지 열두 번의 공연을 올리는 동안 인기에 힘입어 700석 규모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작품의 흥행에는 오만석, 조승우 등 스타 캐스팅도 한몫했다. 공연 때마다 여장한 배우의 미모가 화제가 되었는데, 한국 프로덕션은 매 시즌 각 배우의 개성에 맞춰 다른 가발과 의상을 준비하며 이러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헤드윅>의 성공 이후 국내에 소개된 드래그 퀸 뮤지컬 <라카지>, <킹키부츠>, <프리실라>, <제이미>에는 공통의 테마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라카지>의 앨빈과 <프리실라>의 틱은 아들을 향한 모성애/부성애가 강조된 캐릭터다. <킹키부츠>의 롤라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화해하며, <제이미>에는 게이이자 드래그 퀸을 꿈꾸는 아들 제이미를 열렬히 지지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렇듯 드래그 퀸이라는 도발적인 존재는 가족애라는 온건한 울타리 안에서 대중성을 확보한 덕에 대극장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또한 <라카지>와 <킹키부츠>에 연달아 출연한 정성화는 이전까지 드래그 퀸 역할에 기대되었던 ‘예쁘장함’과는 거리가 먼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음에도 탁월한 개그감과 친근한 이미지를 살려 큰 사랑을 받았다.
게이 혹은 브로맨스
<헤드윅>과 함께 소극장 뮤지컬 흥행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쓰릴 미>가 있다. 이 작품은 1924년 시카고에서 벌어진 네이슨 네오폴드와 리처드 로브의 살인 행각을 모티프로 삼았는데, 2007년 초연 당시만 해도 유괴, 살인, 동성애를 다룬 뮤지컬을 공연한다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관객은 두 남자의 몸과 마음을 건 주도권 다툼에 열광했고, 캐스팅 조합에 따라, 또 그날그날의 호흡에 따라 달라지는 이들의 관계성을 확인하기 위해 공연을 반복 관람하는 독특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쓰릴 미>의 성공은 이후 대학로에 두 남자의 관계성을 내세운 2인극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동성애를 다룬 뮤지컬이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주로 청소년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묘사하고 부당한 사회적 억압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자나, 돈트!>는 동성애가 정상인 세상에서 이성애에 빠진 두 학생을 통해 현실의 고정 관념을 풍자했다. 성에 눈뜬 청소년들의 모습을 그린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는 남학생 에른스트와 한센이 입을 맞추고, 현재 네 번째 시즌을 맞은 <베어 더 뮤지컬>에서는 고등학생 게이 커플 피터와 제이슨이 커밍아웃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창작뮤지컬은 어떨까.
<풍월주>에서 진성여왕의 질투를 살 만큼 죽고 못 사는 사이인 열과 사담을 게이 커플 1호로 꼽고 싶지만, 극 중에서 이들의 관계는 결코 연인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세 인물이 전형적인 치정극에서의 삼각관계 구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들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언제나 관객 몫이다. <랭보>와 <니진스키>는 동성애 관계로 유명했던 실존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뮤지컬 속에서 이들의 관계 역시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딘가를 헤맨다.
이성애일까 동성애일까
창작뮤지컬 속의 모호한 동성애 코드는 이성애의 탈을 쓴 방식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번지점프를 하다>에는 죽은 애인의 환생처럼 느껴지는 남학생 현빈에게 끌리는 남교사 인우가 등장한다. 이들의 사랑은 동성애로 지탄받고 비극으로 끝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인우는 현빈에게서 아른거리는 죽은 여자 태희의 그림자를 사랑하고 있으니 그를 동성애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2016년 초연 이후 인기리에 세 시즌을 공연한 <팬레터>에서도 비슷한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 지망생 세훈이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보낸 팬레터를 받은 소설가 김해진이 그를 여성으로 오해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세훈과 해진의 서로를 향한 애끓는 마음은 세훈의 분신 히카루를 경유해서만 표현되며, 현실에서 두 남자의 관계는 존경하는 스승과 사랑하는 제자의 선을 넘지 않는다. 뮤지컬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성애는 더 이상 금기시되는 소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국내 창작진에게 동성애는 여전히 이성애로 포장하지 않고는 꺼내놓기 조심스러운 무언가이다.
늦게 조명된 레즈비언
뮤지컬 무대에 브로맨스 바람이 부는 동안 여성 커플은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라이선스 뮤지컬 가운데서는 <렌트>의 모린과 조앤, 창작뮤지컬 가운데서는 일제 강점기 경성에서 벌어진 홍옥임과 김용주의 동반 자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콩칠팔새삼륙>의 용주와 옥임 정도가 그나마 눈에 띄는 커플이었다. (죽은 레베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도 성지향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극 안에서 설명된 바 없으니 차치하자.) 이러한 분위기를 바꿔놓은 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2017년 미투 운동과 함께 촉발된 페미니즘의 물결이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의 필요성이 논의되면서 뮤지컬 무대에도 하나둘 레즈비언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8년 <금란방>의 남장여자 이자상과 그를 흠모하는 매화, 2019년 <해적>의 앤과 메리, 2020년 <리지>의 리지와 앨리스가 그들이다. 최근에는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벡델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토니상 수상작 <펀홈>이 국내에서 막을 올려, 앨리슨과 조앤이 레즈비언 커플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 새로운 바람이 얼마 동안 이어질지, 그리고 국내 뮤지컬이 퀴어를 그리는 방식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3호 2020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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