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우혁
또 다시 마주한 터닝 포인트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무대를 종횡무진한 민우혁이 오랜만에 휴식기를 가졌다. 고작 6개월일 뿐이었는데도 무대를 향한 그리움에 더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고 웃는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차기작은 초연 창작뮤지컬 <광주>다. 민우혁이 무대에 펼쳐낼 굳건한 신념은 어떤 울림을 전할까.
마음을 울리다
<광주>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뮤지컬이에요.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처음엔 창작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끌렸어요. 게다가 우리의 역사인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이라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를 것 같더라고요. 대본을 처음 읽으면서 한국판 <레 미제라블>이 연상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박한수라는 캐릭터도 욕심났어요.
좋은 창작진과 배우들의 시너지에 기대감이 높아요. 얼마 전에 모든 배우가 광주로 내려가 홍보용 트레일러 영상을 촬영했어요. 제 촬영 순서를 기다리면서 현장에 앉아 있는데 문득 ‘어떻게 이렇게 멋있고 대단한 배우들이 한 작품에 모였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리딩 연습을 하면서도 감탄했는데 다들 순식간에 몰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매번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 배우들로부터 받는 에너지를 기대해요. 제가 상대 배우들에게 어떤 에너지를 줄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하고요. <광주>에서는 제가 상대 배우들에게 좋은 힘을 받고 있으니, 저 또한 작품과 동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인 바람을 덧붙이자면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고요.
연습실 분위기는 어떤가요? 고선웅 연출님이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상견례 때도 활기차게 연습실에 들어오시더니 배우들을 한 줄로 세우시고, 그 앞에 스태프들을 한 줄로 서서 마주 보게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함께 파이팅합시다’라면서 맞절하고 끝났어요. 한바탕 우르르 인사를 마쳤죠. 그날 연출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길,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나 작품이 많지만, <광주>는 그 이야기의 종결판이 되길 바라신대요.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든 멋진 작품을 많은 관객에게 알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이셨죠. <광주>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뤘어요. 무조건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에요.
작품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나마 줄 수 있어요? 연습실 분위기는 무겁지 않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라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조심스럽죠. 다만 연습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다가온 느낌은 정말 좋은 작품이 탄생할 거란 예감이에요. 무엇보다 음악이 정말 좋아요. 음악 스타일이 굉장히 새로운데 어느 정도냐면 처음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니까요. 연습 전에 음악 팀에 연락해서 ‘먼저 연습할 수 없냐’고 요청했을 정도예요. 저는 저만 그런 줄 알았거든요? 알고 보니 모든 배우가 저처럼 미리 음악 연습을 시작했더라고요. 그도 그럴 게 최우경 작곡가님은 주로 오페라를 작곡하셨던 분이라, 뮤지컬 형식에 맞추기보다 작품의 메시지와 감정을 생각하면서 곡을 만드셨대요. 상당히 클래식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아름다운 뮤지컬 넘버를 기대하셔도 좋아요.
2018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렀어요. 그리고 지금은 <광주>에 참여하게 됐네요. 제 생각이지만, 2018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무대에 선 제 모습이 이 작품 캐스팅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해 특별한 노래를 부른 거라 많이 연습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거든요. 지금 우리는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당연해서 고귀한 희생을 쉽게 잊고 살잖아요. 이 희생은 절대 당연한 일이 될 수 없어요. 그 무대에 오르면서 숭고한 정신을 다시 가슴속에 새기게 됐어요.
오프닝 장면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제곡처럼 불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멜로디가 나온다고 들었어요. 대본을 읽자마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어요. 아까 <레 미제라블> 이야기를 했잖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이 노래를 합창하면 ‘원 데이 모어’처럼 강렬한 감정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겠죠. 그런데 <광주>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멜로디만 흘러나오고, 그래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한 마음이 들어요. 저는 듣자마자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저는 리딩 공연에 참여하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무런 무대 세트나 의상 없이 조명 하나와 보면대를 앞에 두고 일어나서 연기하고 노래를 부르잖아요. 그렇게 잔잔하게 오는 감동도 마음을 울려요. 분명 ‘님을 위한 행진곡’도 많은 관객의 마음에 파동을 전할 거라 생각해요.
<광주>에서 마음을 울리는 장면이나 노래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한수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점이자 작품에서 중요한 장면인 ‘아니 아니야’라는 곡이요. 시민군에 위장해 들어간 편의대원 박한수는 초반에 ‘내가 선택한 일이야. 어쩔 수 없어. 나는 군인의 신념을 지니고 해야 할 일을 해낼 거야’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그에게 이 임무는 전역 전 마지막 임무라 더욱 완벽하게 마무리하겠다고 결심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광주 시민들 사이에 들어가니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과 직접 부대끼죠. 결국 박한수가 마음을 바꿔요. 아무리, 수천 번을 고민해도 이건 아니라고요. 내 신념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는 중요한 걸 깨달아요. 이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라요.
사람이 먼저인 세상
개막은 10월이지만 벌써 작품에 완벽히 몰입한 것 같은데요. 어제 음악 연습을 진행할 때 갑자기 예고도 없이 연출님이 오신 거예요. 음악 연습을 마치고 연출님과 남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작품에 대한 사소한 부분부터 제가 만들어가고 있는 박한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놨죠. 다행히도 제가 생각한 부분과 연출님의 생각들이 비슷하게 맞물리더라고요. 실제로 무대에 오르면 지금까지 맡았던 그 어떤 캐릭터와도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작품에서는 감정의 변화나 캐릭터의 성격을 대놓고 보여주려고 했어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마지막에 가장 강렬한 모습으로 터트렸거든요.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캐릭터를 주로 맡았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박한수의 내면 변화에 집중해야만 해요. 지금 저의 목표는 박한수의 감정을 이해하고 관객들이 그 감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연기하는 것이죠.
박한수라는 캐릭터를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빠르고 강하게 애정이 생기는 캐릭터는 처음이에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깨닫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캐릭터예요. 초반에는 군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죠. 주변에서 박한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에게 잘 어울리겠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제가 연기했던 지난 캐릭터들과 비슷한 색을 지닌 탓도 있어요. 지금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번 <광주>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일 거란 점이에요. 지금까지 <벤허>, <지킬 앤 하이드>, <안나 카레니나> 등을 보면 사랑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외적으로 발산하는 캐릭터를 맡아왔어요. 그런데 박한수는 자신의 정체를 감춰야만 하는 인물이라 내면에 숨겨진 감정을 응축해야만 그가 앞에 둔 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혼란 등을 잘 표현할 수 있어요. 터닝 포인트가 되는 지점도 흥미로워요. 어떤 사건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이 인물이 참상을 목도하면서 변해요. 그가 변하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까 얼마 전에는 이 작품이 제게 큰 도전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더라고요. 앞으로 민우혁이라는 뮤지컬배우 방향성에 있어서 중요한 캐릭터가 될 것 같아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캐릭터에는 본인의 색깔이 담기잖아요. 박한수라는 캐릭터에 어떤 모습을 담을 건가요? 민우혁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최대한 제 색깔을 넣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제가 느낀 감정이나 성격을 다 보여주면 관객들이 흥미를 못 느낄 것 같더라고요.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연기나 노래 스타일을 아예 바꾸려 하고 있어요. 아마 큰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야 박한수의 내면을 보고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본인이 박한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작품 속 박한수는 자신의 신념을 깨닫고 변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것 같아요. (원래 불의를 보면 잘 참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죠?) 네, 조금 그래요. 요즘에는 아무래도 공인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정말 큰일을 제외하고는 눈을 질끈 감는데, 예전에는 사소하더라도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정말 저도 모르게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자유로운 삶을 영유하다
작품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오면 즐기라’라는 대사가 나와요. 혹시 뮤지컬배우로서 그렇게 견뎌낸 사건이 있나요? 뮤지컬배우로 살면서 행복한 이유는 이 작업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웬만한 상황에도 지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온다면 즐겨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기도 해요. 어려운 작품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어쩌지? 진짜 어렵고 힘드네.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럴 때면 불평이나 불만을 표현하기보다 묵묵히 연습하는 편이죠. ‘이 작품은 왜 이렇게 양이 많을까’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대본과 악보를 펼쳐요. 전 제게 주어진 모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사람이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사람이에요. 얼마 전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1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 천억을 준대, 어떻게 할래?’ 저 혼자만 유일하게 ‘싫어. 1년도 싫어’라고 답했어요. 1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 가족도 못 보고, 운동도 못 하잖아요. 그 엄청난 1년의 가치와 돈을 어떻게 비교해요 아, 제 취미가 바로 운동이에요. 웨이크서핑, 볼링, 골프까지 좋아하는 스포츠가 많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는 운동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거더라고요. 운동을 핑계로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사람과 쉬면서 에너지를 채우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유형인가요? 저는 쉬면 에너지가 빠져요.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회사에서도 쉬는 게 어떻겠냐고 걱정할 때마다 괜찮다면서 일을 계속했어요. 가장 바빴던 시기엔 <지킬 앤 하이드>와 <벤허>에 무대에 오르면서 드라마 촬영을 했고, 이어 <영웅본색>의 연습에도 들어갔어요. 그런데도 목이 안 쉬었어요. 성대가 그만큼 단련이 되어 있어서 적응을 한 거죠. 그런데 지난 2월 <영웅본색> 공연이 갑작스럽게 폐막한 이후로 힘이 들었어요. 3개월째 쉬면서 오히려 목 컨디션이 안 좋아졌어요. 그때 갑자기 마음의 갈피를 못 잡겠더라고요. 결국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서 혼자 노래를 불렀어요. 이러다가 앞으로 노래를 못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거든요.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다시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어서 마음이 가뿐합니다.
무대 외에도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추고 있어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놓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가 뮤지컬배우라는 점을 잊지 않게 해준다는 사실이에요. 저는 무대를 사랑하거든요. TV에서 민우혁이라는 존재를 아신 분들이 저로 인해 뮤지컬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행복해요. 단순히 인지도를 높이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뮤지컬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민우혁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유로운 사람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하고 싶은 것만 해요.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하고요. 종종 주변에서 ‘민우혁은 배려도 많고 참는 것도 많아’라는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사실은 아니에요. 제 모든 행동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요. 감정에 솔직하기도 하고요. 속상하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바로 표현하는 편이에요. 다만 뒤끝은 없죠. 제 장점을 말하자면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데 힘든 친구들에게 저도 모르게 제 에너지가 힘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친구들 말로는 제가 늘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라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제 타고난 성격이 배우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저의 에너지를 줄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광주>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고 싶은가요? 제가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느껴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 드리고 싶어요. 한국판 <레 미제라블>이 탄생했다는 말도 듣고 싶고요. 사실 제가 <레 미제라블>을 하면서 뮤지컬배우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뮤지컬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던 작품이거든요. 당시 한 관객에게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레 미제라블>을 보면서 희망을 얻었어요. 앞으로 용기를 내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전까지는 뮤지컬배우는 멋있게 무대에 서서 노래를 잘하면 그걸로도 충분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펑펑 울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됐어요. 제 생각에는 <광주>도 관객에게 이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건네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 많은 분들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잖아요.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도 싶고요. 꼭 무대에 서서 이 큰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4호 2020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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