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눈빛
신인 배우 조형균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에게서는 모처럼 살아 있는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신인 배우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 어떤 표정을 짓거나 어떤 몸짓을 하면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계산 없이 온전히 캐릭터에 몰입한 눈빛 말이다.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나서 정말로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충격이랄까.” 조형균은 고교 시절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게 됐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에 심취해 있던 연극부 학생에게 뮤지컬은 연극의 허전함을 채워 줄 수 있는 무엇이었으리라. “뮤지컬 배우?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나도 성악을 배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사랑은 비를 타고>를 봤더니 거긴 발성이 또 다르더라고요. 이거면 나도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갖게 된 시절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던 조형균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는다. “제가 출발은 좋았어요.” 이 배우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궁금해지는 참에 그가 말문을 연다. “출발이 좋았다는 게, 시작부터 배역을 맡아서 ‘난 잘되나 보다’라고 생각했거든요. 상당히 거만했어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은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고, 데뷔작 <찰리 브라운>(2007) 이후 그가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배역은커녕 앙상블 오디션에서도 번번이 떨어졌어요. 나는 여기까지인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봤어요. 그런데 그런 시기가 없었으면 전 여전히 겸손함을 몰랐을 거예요. 나, 잘하잖아? 자아도취에 빠진 최악의 배우가 됐겠죠.” 내 안의 벽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으로 얻는 교훈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는 법 아닌가. 무대에 설 수 없었던 지난날은 그를 외적인 목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연기에 집중하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런데 자기애가 대단했던 젊은 배우가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결코 배우이길 포기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종의 오기였던 걸까? “이건 제가 선택한 길이고 뭐든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친형처럼 믿고 따랐던 한 선배 때문이기도 해요. 제게 <오페라의 유령> 티켓을 선물해 줬던, 함께 배우가 되길 꿈꿨던 형이 불의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식물인간이 돼버렸어요. 하루는 형이 제 꿈에 나타나 내가 정말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제 할 수 없으니 너라도 뮤지컬 배우가 되어달라 그랬는데…, 다음 날 형이 죽었어요. 그때 전 내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2년여 동안 자중의 시간을 보내며 아름다운 칼을 갈았다. “이십대 배우가 후반을 넘어가면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돼요. 빨리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지죠. 그런데 어떤 선배가 그러시더라고요. 성냥개비가 되지 말고 장작이 되라고. 한번에 확 타버리지 말고, 천천히 타오르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대요. 제가 정말로 열심히 하면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저를 빛나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믿음은 들어맞았다. 우연히 만난 <그리스>에서 1년간 앙상블을 맡다 이듬해 두디라는 배역을 따낸 것이다. 그리고 기회는 계속 이어졌다. <렌트> 공개 오디션에서 남자 배우들의 로망인 로저 대신 자신과 어울리는 마크를 택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두 작품이 이력의 전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마크를 연기해낸 이 신인 배우를 주목하는 사람이 전과 다르게 많아졌으니 말이다. 마크가 극을 이끌어 가는 내레이터 역할이었다고 해도 여러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면, 이번에 맡게 된 <달고나>의 세우는 말 그대로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주인공을 맡았다는 사실보다는 함께 작업한 스태프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말한다(<달고나>의 오디션은 <렌트> 때 함께 한 안무가의 권유로 보게 된 것이다). “관객의 평가도 중요하죠. 하지만 저에게는 함께 작업한 동료 배우와 스태프에게 인정받는 게 더 중요해요. 다음 작품도 같이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고 항상 그 마음으로 공연에 참여해요.”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 집중하게 됐던 순간은 그가 눈물 없이는 듣기 힘든 성장담을 늘어놓거나 진지한 태도로 자신이 그리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이 배우에게 가장 흥미를 느꼈던 때는 얼핏 다른 얼굴을 목격하게 된 찰나였으니까. 조형균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됐을 때의 당혹스러움, 그리고 그만큼 더 커지는 호기심. 소년처럼 열정적이고 화사하다가도 세상만사 다 겪은 듯한 피로함과 차가움이 느껴지는 얼굴까지, 다양한 얼굴이 공존하는 그를 보면서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무대 위의 연기를 보는 것이 조형균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재미있는 게 똑같은 능력을 가진 배우라고 해도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캐릭터가 나오잖아요. 연기에 답이 없듯이 공연에도 정답이 없는데 오히려 그런 점이 재미있어요.” 불과 1년 사이에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리며 또래 배우들 중 가장 흥미로운 한 사람으로 떠오른 조형균. 우리는 소위 말하는 ‘주인공과’와는 확실히 다른 공기를 가진 이 개성파 배우에게서 앞으로 어떤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2호 2012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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