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 투모로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쏘아 올린 꿈
김유신과 김춘추, 이황과 이이, 성삼문과 신숙주 등 우리 역사에는 항상 쌍으로 기억되는 이름들이 있다. 김옥균과 홍종우 역시 그중 하나다. 격동의 개화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조국의 근대화라는 같은 꿈을 꾸었던 조선의 청년들. 그러나 그들이 쏘아 올린 꿈의 방향은 너무나 달랐고, 그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김옥균과 홍종우의 서로 다른 인생과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 짊어져야 했던 삶과 죽음의 무게를 되짚어본다.
비범했던 청년의 무모한 혁명
우리 근현대사를 통틀어 김옥균처럼 상반된 삶과 죽음을 겪고,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안동 김씨 명문가 출신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옥균은 타고난 총명함과 재능으로 약관의 나이에 장원급제를 이뤘고, 이후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탄탄한 출세 대로를 달린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태평성대에 태어났다면 명관으로 이름을 떨친 뒤 편안한 노후를 보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나랏일에 뛰어들 무렵 조선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위로는 청나라, 아래로는 일본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개항 이후 밀려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도 야욕을 드러내며 조선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학문적 호기심과 조국의 현실에 대한 위기감으로 일찍이 신문물을 접하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눈뜬 김옥균과 그의 동료들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개혁과 근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대로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청년 개혁가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쿠데타 ‘갑신정변’이다. 1884년 12월 4일, 거사를 실행한 김옥균과 그의 무리들은 수구파를 처단하고 신정부 수립과 새 정책을 공식적으로 공포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지만, 새 내각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충분한 시간과 치밀한 준비 없이 시작된 개혁이다 보니 허점도 많았고 왕실과 민중의 지지도 얻지 못했으며, 적극적인 개입을 약속했던 일본군의 배신 역시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으로 손꼽힌다. 결국 개화의 주역들은 철저히 몰락했고, 김옥균은 가까스로 일본으로 피신해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모진 목숨을 이어가게 된다.
뒤늦게 꽃핀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생사 기록이 명확한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어떤 책에는 1850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어떤 책에는 1854년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랐고, 1890년 무렵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지천명의 늦은 나이에 그가 머나먼 유럽으로 떠난 이유는 프랑스의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조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일찍이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혁을 서두른 일본이 갈수록 강대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홍종우는 더 늦기 전에 조선을 개화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늦깎이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그는 혼자서 프랑스어와 서양 문화를 배우느라 고군분투했지만, 그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한 건 아니었다. 파리 기메 박물관에서 연구 보조로 일하기도 하고, <춘향전> <심청전>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조선을 알리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홍종우는 근대적 개혁을 위해 서구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종묘사직과 전통이야말로 조선을 굳건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인 근대화를 꿈꾸었고, 이런 점에서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김옥균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상하이에서 마주한 엇갈린 운명
이처럼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두 사람은 1894년 상하이 뚱허양행 여관에서 운명적으로 마주한다. 바로 김옥균 암살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에서부터 의도적으로 김옥균에게 접근해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던 홍종우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날 때 동행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운명의 3월 28일, 혼자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김옥균에게 그는 3발의 총을 쏘았고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프랑스에서 귀국하던 홍종우가 왜 김옥균 암살에 가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로 분분하다. 귀국 후 빠른 출세를 위한 제물이었다고도 하고, 갑신정변 당시 죽은 홍영식과 가문의 복수를 위해서였다고도 하며, 순수한 정치적 견해차라는 의견도 있다.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생각한 홍종우에게 전복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김옥균은 위험한 방해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어떤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 김옥균은 대역죄인으로 부관참시를 당하고 잘린 시신이 전국 팔도로 보내지는 수난을 겪었다. 이에 비해 홍종우는 역적을 처단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황실 중심의 개혁에 앞장섰다. 그러나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일본의 지배력이 강화되자 중앙에서 밀려나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으며,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시대에 따라 엇갈리는 시선과 평가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이어온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미묘하게 엇갈렸다. 조선 말기 김옥균은 친일파 역적이고 홍종우는 그를 처단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는 김옥균이 시대를 앞선 선각자로 추앙받고, 홍종우는 출세를 위해 그를 살해한 악당으로 전락했다. 독립 후에는 또다시 평가가 엇갈렸고, 현대에 와서는 두 사람 모두를 단일한 시선이 아닌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일본에 기대어 나라를 뒤집은 야망가로 비난받는 김옥균은 탄탄히 보장된 미래를 버린 채 조국 개혁에 목숨을 건 엘리트였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머나먼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홍종우 역시 단순한 암살자로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방향에서 치열하게 행동하며 조국의 근대화에 인생을 건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둘의 꿈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자주적인 근대화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고 만 것이다. 역사는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 없기에 여전히 누구의 선택이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대립되는 상황에 놓여 죽고 죽이는 입장이었던 두 사람이, 조금 더 먼 시선에서 바라보면 결국 하나의 꿈을 향해 달려갔던 치열한 인생이었다는 것은 그들 개인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김명섭 저, 추수밭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조재곤 저, 푸른역사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8호 2022년 1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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