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씽로튼> 윤지성
행복이 나를 찾아올 때
인터뷰를 하는 동안 윤지성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행복’이었다. 그는 <썸씽로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말했고, 뮤지컬을 보는 관객이 행복하길 바랐다. 눈을 반짝이며 행복을 이야기하는 윤지성에게서는 무대에 대한 진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만나다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셰익스피어보단 나이젤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저도 많이 놀랐어요. 나이젤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맞냐고 되물어 봤을 정도니까요.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워낙 재미있게 본 작품이라 갈등했죠. 그때 제작사 관계자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셰익스피어 캐릭터에 지성 씨가 적합한 것 같으니 꼭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해 주셨어요. 그 말이 저한테 큰 용기가 됐어요.
<썸씽로튼>은 이전부터 알고 있던 작품인가요?
저와 함께 <귀환>에 참여했던 최수진 누나가 초연에 출연했어요. 아쉽게도 극장에서 공연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하이라이트 영상을 챙겨 봤어요. 근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는 누나가 나오니까 의리로 챙겨 봤는데, 점차 작품에 푹 빠져서 영상을 계속 찾아보게 됐어요.
공연을 준비할 때 어려움은 없었어요?
드라마 막바지 촬영하고 뮤지컬 연습 기간이 좀 겹쳤어요. 그때는 “나가 버렸네. 정신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너무 바빴어요.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드럼 연습을 해야 했는데, 뮤지컬에서는 탭 댄스를 새로 배워야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연습 부족의 핑계가 될 순 없잖아요. 나중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서 손으로는 드럼을 치고 발로는 탭을 췄어요. (웃음) 연습실에서는 무작정 선배님들한테 가서 도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다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흔쾌히 가르쳐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특히 같은 역할을 맡은 서경수 선배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셰익스피어 대사들을 따로 정리해 주시기도 하고 작품이나 캐릭터 분석에 도움이 될만한 배경지식도 많이 알려 주셨어요. 무엇보다 초연에 참여했던 경험자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눠 주셨어요. 연기나 노래에 포인트를 줘야 할 곳을 꼭꼭 짚어 주셔서 공연 준비에 큰 도움이 됐어요.
기존 공연에서 그려지는 셰익스피어는 록스타에 가까운데 지성 씨의 셰익스피어는 케이팝 아이돌처럼 보였어요.
초연 때 셰익스피어를 연기하셨던 선배님들과 좀 달라 많이 걱정했어요. 내가 선배님들만큼 할 수 있을까, 선배님들이 잘 만들어 놓은 캐릭터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이지나 연출님이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너만의 셰익스피어를 만들면 된다”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는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캐릭터의 기본 틀은 연출님이 만들어 주셨고, 저는 거기에 맞춰서 제 나름대로 인물 분석을 하면서 의상이나 메이크업 스타일을 고민했어요. 연출님과 수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극 중 셰익스피어에게 가장 공감했던 것과 가장 공감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가장 공감했던 건 ‘있는 척하는 것’이었어요. 대중들이 보기에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천재 작가지만 속으론 누군가를 시기, 질투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능숙하게 원래부터 대단한 사람인 척하죠.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남들이 보는 만큼 제 삶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해야 할 때가 많거든요. 반대로 저와 가장 다른 점은 셰익스피어는 진심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유명세를 즐길 줄 안다는 거예요. 제 생각에 셰익스피어는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것 같아요. 반면 저는 부끄럼도 많고 자존감도 낮은 편이라 주어진 상황을 즐기지 못하는 편이에요. 어떤 때는 뻔뻔스러울 만큼 상황을 즐기는 셰익스피어가 부럽기도 해요.
셰익스피어가 처음 등장할 때 콘서트장에 입장하는 가수처럼 나타나잖아요.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대에 올라가나요?
“무대를 찢어 놓겠다!” (웃음) 선배님들께서 셰익스피어는 그런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가야 한대요. 제 생각에도 그게 셰익스피어다운 것 같아요.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에 열광하고 환호하는 장면이라서 최대한 자신감을 끌어올린 다음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요. 나는 지금 여기서 최고로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정말 다행인 건 그 장면을 앙상블과 함께한다는 거예요. 매 공연마다 앙상블 배우들이 ‘파이팅! 잘할 수 있어! 우리가 도와줄게!’라는 눈빛을 보내 줘서 정말 힘이 돼요.
차곡차곡 쌓아 온 무대에 대한 진심
뮤지컬을 처음 접한 게 예고에 진학한 다음이라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노래도 좋아하고, 연기하는 것도 좋아해서 막연하게 연예인이 되고 싶었어요. 예고 진학을 준비하려고 알아보는데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커리큘럼에 뮤지컬이 있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저에게 뮤지컬은 굉장히 낯선 단어였어요. 이게 뭔가 싶어서 검색을 해 보니까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어서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바로 원서를 냈죠. (웃음) 학교 예술제 때 뮤지컬 공연을 했어요. 그때 제가 장영실의 일대기를 그린 <천상시계>라는 작품의 주인공을 맡으면서 뮤지컬에 더 빠져들게 됐어요. 뮤지컬이 정말 재미있고 매력적인 장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대학교 졸업 공연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했더라고요.
4학년은 졸업 과제, 1학년은 기말 과제로 셰익스피어 희곡 중 하나를 공연해야 했어요. 그런데 네 다섯 팀이 모두 <한여름 밤의 꿈>을 선택한 거예요. 1학년들이 점수를 받으려면 배역을 맡아야 했는데 출연자가 가장 많은 작품이 <한여름 밤의 꿈>뿐이었거든요. 아무래도 대학생이 하는 공연이니까 거창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어요. 사소한 소품부터 무대, 의상까지 다 저희 손으로 만들었고 각색도 직접 했거든요. 그 당시 제가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딱히 마음 붙일 데가 없었어요. 데뷔가 계속 미뤄지면서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했으니까요. 그때 저에게 확실한 건 학교밖에 없어서 정말 열심히 학교를 다녔어요. 학교생활의 마지막이 <한여름 밤의 꿈>이어서 많이 기억나요.
연기 데뷔는 뮤지컬 <그날들>로 했죠. <그날들>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저는 무슨 일이든 항상 처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만약 제가 어떤 일을 처음 했을 때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일을 다시 할 자신이 없어요. <그날들>은 저에게 좋은 사람들과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게 해 준 작품이에요. 그 기억이 좋게 남아서 뮤지컬에 다시 참여하고 싶었어요. 제게는 데뷔작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작품이죠.
<그날들> 공연 중 에피소드 하나만 이야기해 주세요.
처음 출연하는 뮤지컬이다 보니 이런저런 실수들이 있었어요. 대부분은 관객분들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하루는 정말 큰 실수를 했어요. 벌써 3,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제가 연기했던 무영이가 친구인 정학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어요. ‘정학이에게’라고 대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무영에게’라고 해 버린 거에요. 바로 수습을 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아찔했어요. 엄청 자책하면서 무대를 내려왔는데 선배님들이 자신들의 실수담을 이야기해 주시면서 그 정도 실수는 괜찮다고 위로해 주셨어요.
처음 뮤지컬에 참여해서 어떤 것을 배웠어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속 시끄러운 일도 생기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웃을 수 있는 건 모두 같은 목표로 무대에 서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학생 때나 가수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 섰을 때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뮤지컬처럼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이뤄 가는 과정에 참여해 보니까 확실히 더 와닿았다고 할까요? 3시간이 채 안 되는 동안 관객 여러분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뭉클해져요. 그 안에 제가 함께한다는 사실이 행복하고요.
<썸씽로튼>이 벌써 세 번째 참여하는 뮤지컬이에요. 무대 위에서 여유가 좀 생겼나요?
무대에서 여유가 있다든지, 무대를 즐긴다는 말은 아직까지 저와 거리가 있는 말 같아요. 지금 저는 무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긴장해야 하는 연차라고 생각해요. 제가 삐끗하거나 나태해지면 뮤지컬이라는 커다란 배가 순항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그래서 공연 전날은 잠을 설치는 편이에요. 긴장감 때문에 공연장으로 출근하기 전에 반려견 베로를 껴안고 “오늘 대사 안 틀리고 노래 잘 부르게 기도해 줘” 하고 인사해요. 그래도 곁에서 도와주시는 선배님들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아이돌과 활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챙겨 줘야 하는 나이가 됐는데 뮤지컬을 할 때는 선배님들이 먼저 챙겨 주셔서 감사하죠.
뮤지컬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무엇이라고 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뮤지컬은 ‘이어달리기’예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여러 사람이 결승점을 향해 다 같이 달리는 거죠. 혼자서는 절대 완주할 수 없어요. 관객 여러분께 좋은 추억을 만들어 드리려면 바통을 주고받으면서 결승전까지 함께 달려야 하거든요. 결승전에 도착하면 고생했다고 서로 격려해 주고 내일도 힘차게 다시 달려 보자고 약속하는 것이 뮤지컬인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9호 202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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