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키부츠> 안무·연출가 제리 미첼
인생에 사랑으로 다가가는 법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판단하지 말 것. 내게 딱 맞는 신발을 신고 나만의 길을 걸어갈 것. 삶에 꼭 필요한 인생 명언을 전하는 <킹키부츠>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2013년 브로드웨이를 강타한 후 이듬해 국내에 소개돼 벌써 다섯 번째 시즌이다. 부족한 게 없지만 꿈도 없는 찰리가 제 인생 앞에 불쑥 등장한 드래그 퀸 롤라를 만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 진실된 스토리로 지루할 틈 없는 유쾌한 무대를 만들어낸 사람, <킹키부츠>의 안무 겸 연출가 제리 미첼을 만났다.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기
<킹키부츠>는 2005년 개봉한 동명의 영국 영화에서 출발했습니다. 공동 프로듀서인 다릴 로스(Daryl Roth)와 할 루프틱(Hal Luftig)에게 작업 제안을 받았을 때, 영화의 어떤 점이 뮤지컬로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제가 영화 <킹키부츠>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재미있게도 런던 공항에서였어요. 영화가 개봉한 시기에 마침 런던에 갈 일이 있었는데, 공항에 있는 레코드 숍에서 우연히 영화 OST를 보게 된 거예요. 새빨간 부츠가 커다랗게 들어간 앨범 커버를 보자마자, ‘이 영화, 뮤지컬에 어울리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그 뒤로 까맣게 잊고 몇 년 후 다릴과 할이 <킹키부츠> 이야기를 꺼내서 그제야 영화를 보게 됐어요. 이성애자 남성이 드래그 퀸 부츠를 만들어 폐업 직전의 구두 공장을 살린다는 스토리가 흥미로웠죠. 뮤지컬에 대한 확신은 영화 초반에 얻었는데, 찰리와 롤라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는 ‘화장실 대화 장면’에서 이건 뮤지컬로 만들어져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단, 하비 피어스타인이 극작을 맡는다는 조건하에요. 왜냐하면 그는 최고의 극작가니까요! 다행히 다릴과 할도 제 생각에 동의했고요.
말씀대로, 특별할 것 없는 이성애자 찰리와 별종 같은 드래그 퀸 롤라는 각각 다른 세상 속에 살아갈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이 서로 닮은 상처를 발견하고 가까워진다는 점에서 뮤지컬로 만들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요?
우선, 저는 게이라는 것을 먼저 밝혀둘게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희 집은 삼형제인데, 저를 빼곤 모두 이성애자예요. 둘 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요. 게다가 저희 집안에서 엔터테인먼트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희 세 사람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가업을 잇지 않고 자기 꿈을 찾아갔다는 거예요. 부모님은 조부모님께서 운영하셨던 레스토랑과 바(Bar)를 물려받았는데,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일을 이어받지 않았어요.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알았거든요.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죠. 하비가 <킹키부츠>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해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먼저 받아들여야 타인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죠. 찰리와 롤라가 처음으로 자기의 아픔을 드러내는 장면 ‘Not My Father's Son(나는 못난 아들 그가 원했던 모습이 아냐)’에 그런 주제가 잘 담겨있어요.
‘Not My Father's Son’은 신디 로퍼가 작업 초기에 만든 뮤지컬 넘버 중 하나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이 곡을 듣고 많이 울었다고 말했는데, 당신에게 특별히 호소하는 바가 있었나요? 말하자면 당신도 아버지의 아들 같지 않은 아들이었다거나…?
아뇨, 저는 완전히 아버지의 아들 같은 아들이었어요! 하하. ‘Not My Father's Son’은 우리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곡이에요.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죠. 신디에게 하비가 쓴 대본을 주면서 어떻게 곡을 쓸 거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이가 어릴 적 아빠를 닮으려고 애썼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될 거라고 하더군요. 남자아이들은 보통 어렸을 때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아버지를 닮으려 노력하는 여정 속에서 어느 순간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죠.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해도 그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거든요.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Not My Father's Son’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아요.
하비 피어스타인은 당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헤어스프레이>나 <라카지(La Cage aux Folles)>를 함께 작업했지만, 신디 로퍼는 이전에 뮤지컬 작곡 경험이 없었어요. 협업에서 우려되는 점은 없었나요?
저와 하비의 합류가 결정되고 작곡가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하비의 형제 로널드가 신디를 추천했어요. 저는 신디의 뮤직비디오 안무를 맡아 같이 일해본 경험이 있고, 하비 역시 신디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좋은 한 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신디 자체가 뮤지컬의 열성 팬이에요. 예전에 <서푼짜리 오페라>(2006) 브로드웨이 공연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요. 신디에게 연락하는 건 하비가 맡았는데, 같이 뮤지컬을 해보겠냐고 물었더니 곧바로 “좋지!”라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근데 설거지를 하면서 그 전화를 받은 거였대요. (웃음)
신디와의 협업 과정은 어땠나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지요.
시카고에서 첫 공연을 올렸을 때, 롤라가 찰리에게 어떤 부츠를 만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Sex Is in the Heel’ 장면에서 객석이 난리가 났어요. 롤라와 함께 이 장면에 등장하는 엔젤들이 퇴장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박수가 계속됐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전 장면이 찰리가 드래그 퀸 부츠로 아버지가 남기고 간 구두 공장을 다시 살려보겠다고 마음먹는 중요한 순간이거든요. 그때 나오는 노래가 ‘I'll Come to Rescue’였는데, 첫 공연이 끝나고 신디에게 이 곡을 새로 써야겠다고 말했어요. 찰리가 롤라 못지않게 관객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달라고요. 한마디로 히트송을 써달라고 했죠. (웃음) 그렇게 탄생한 곡이 ‘Step One’이에요.
공연이 무대에 오르기 전, 작품 개발 과정에도 특별한 기억이 있을 듯합니다.
거의 최종 단계의 리딩 공연을 할 때였어요. 투자자들이 그 자리에 초대되었죠. 당시 우리 팀에는 두 개의 ‘킹키부츠’가 있었는데, 하나는 제 거였고 다른 하나는 롤라용이었어요. 제가 일 년 전쯤 가게에서 산 하이힐 부츠를 샘플 삼아 롤라가 신을 신발을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공연 시작에 앞서 갑자기 돈(Don)이 피날레 장면에서 부츠를 신고 등장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돈 역을 맡은 대니(Daniel Sherman)랑 저랑 신발 사이즈가 같았어요. 대니는 저보다 훨씬 몸집이 큰 배우인데, 처음 제 부츠를 신었을 땐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그런 모습으로 엔딩 신에 등장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죠. 그 순간 깨달었어요. 이 캐릭터가 <킹키부츠>에서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리라는 걸요.
돈은 극 중에서 드래그 퀸 롤라를 향한 태도가 가장 크게 변화하는 인물이죠. 처음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롤라의 편에 서게 되잖아요.
관객들은 보통 공연을 보러 가면 무대에 있는 여러 인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찾게 돼요. <킹키부츠>에 대해 전혀 모르고 극장에 오는 사람들도 롤라나 찰리, 로렌, 돈, 니콜라 등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자신과 닮은 캐릭터를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많은 남성 관객들은 ‘돈’에게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돈이 롤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변해가요. 공연의 끝에는 분명 시작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죠. 그럼 돈에게 공감했던 그 관객도 달라질 수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제가 항상 말하는 거지만, 돈은 우리 작품의 비밀 병기예요.
재능을 완성하는 삶의 태도
<킹키부츠>처럼 안무와 연출을 동시에 맡을 경우, 어떤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는지 궁금합니다. 안무가 출신으로서 안무와 연출 어떤 것에서 먼저 아이디어를 얻는지요?
제 안무의 출발점은 항상 대본이에요.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에는 단 한 동작도 만들지 않아요. 뮤지컬에서는 안무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요소가 되어야 하니까요. 연출도 마찬가지예요. 스토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 전체적인 연출 방향을 설정하죠. 안무와 연출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할 경우에는 연출 콘셉트를 정한 다음에 안무를 구상하고요. <킹키부츠>를 예로 들면, 하비가 쓴 대본 모든 장면에 “부츠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운반된다”라고 적혀있었어요. 그게 저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줬죠.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1막 엔딩 장면 ‘Everybody Say Yeah’는 재미있는 연출로 많이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죠. 같이 무대에 올라 춤추고 싶게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대본에 있는 컨베이어 벨트를 어떻게 표현할지 자료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재미있는 영상을 발견하게 됐어요. 미국 록 밴드 오케이 고(OK Go)의 ‘Here It Goes Again’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였는데, 노래하는 내내 멤버 네 사람이 여덟 개의 트레이드밀을 오가며 춤을 추더라고요. 알고 보니 인터넷에서 많은 화제가 됐던 뮤직비디오였어요. 무대디자이너에게 그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춤출 수 있는 테이블 높이의 컨베이어 벨트를 만들어달라고 했죠. 저처럼 큰 사람이 거기 올라 춤을 춰도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한 걸로요. 참고로, <킹키부츠>의 실제 배경인 영국 노샘프턴 구두 공장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없어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공장 답사를 가봤는데, 신발을 카트에 담아 운반하더라고요. 하비가 쓴 대본이 사실은 아니지만, 극적 허용이 가능한 거죠.
처음 연출을 맡았던 작품은 2007년 공연된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였는데요, 뮤지컬 안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출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요?
저는 제가 언젠가 연출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어요.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 아그네스 드 밀레, 제롬 로빈스, 마이클 베넷 모두 댄서로 출발해 안무가를 거쳐 나중엔 연출까지 맡았거든요. 저도 그들이 이룬 것을 따라 그 뒤를 잇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런 기회를 빨리 만들려고 서두르진 않았어요. 저한테 맞는 작품이 저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금발이 너무해>가 딱 저에게 어울리는 작품이었죠. 첫 연출을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내가 이걸 진짜 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거예요. (웃음)
안무가로 막 활동을 시작했을 때, 제롬 로빈스와 마이클 베넷의 어시스턴트를 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장의 작업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가르침을 얻었나요?
제롬 로빈스와 마이클 베넷 둘 다 믿을 수 없이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에요. 안무로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전달할 줄 알죠.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요. 그런데 제가 가장 놀랐던 점은 두 사람 다 타고난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거예요. 마이클은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공연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영감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창작이란 고된 작업이다. 좋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성실함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뮤지컬 <풀몬티>(2000)를 같이 작업했던 테런스 맥널리가 생각나는데, 테런스는 대본을 길게 쓴 다음에 매일 조금씩 줄여나갔어요. 여기서 한 줄, 저기서 한 줄, 불필요한 대사들을 삭제하면서 이야기를 점점 더 간결하고 재미있게 만들어가는 거죠. 창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창작물에 가혹할 줄 알아야 해요.
지난해에 타계한 스티븐 손드하임과도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는데요, 그와의 추억담을 말해줄 수 있나요?
제가 손드하임과 같이 일했던 건 <폴리스>의 웨스트엔드 공연 때예요. 당시 전 밥 에비앙의 협력 안무가였는데, 무대 리허설을 할 때 밥이 저한테 책임을 맡기고 잠시 자리를 비운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오케스트라 피트에 있던 손드하임이 저를 올려다보더니 “제리, 음악이 넘치면 줄여도 돼. 불필요하면 잘라.”라고 말하는 거예요. 제 머릿속에 든 생각은 ‘와우, 저 사람은 손드하임이잖아? 그런데 그가 나한테 자기 음악을 줄여도 된다고 말하는 거야?’였죠. 그때 협업의 의미를 되새기게 됐어요. 손드하임은 저에게 관대함이란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이에요.
당신의 최근작 가운데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금발이 너무해> <캐치 미 이프 유 캔> <킹키부츠> 모두 한국에 소개되었어요. 최근에는 1990년 영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을 뮤지컬로 만드는 데 참여했는데, 이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다면 어떤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 거라 보세요?
<귀여운 여인>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벽한 고전과도 같은 작품이에요. 잿더미 속에 있던 한 여성이 무도회장에 가게 되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매력적인 이유는 구원을 얻는 사람이 신데렐라가 아닌 왕자님이기 때문이에요. 영화 속에서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에드워드지, 비비안이 아니거든요. 비비안은 에드워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도 않고요. 어떤 면에서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죠. 뮤지컬은 브라이언 아담이 쓴 음악도 무척 훌륭해요.
끝으로 <킹키부츠>를 보러 올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킹키부츠>의 팬분들께 이 공연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 와달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좋은 공연을 보면 항상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거든요. “너 이거 꼭 봐야 해!”라고요. 제가 참여한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킹키부츠>는 꼭 봐야 하는 작품이에요. 공연을 보고 나면 마음속에 희망이 가득해지니까요. 그리고 마침 <킹키부츠>의 한국 공연 홍보 카피가 “Better together, Kinky together(함께가 좋습니다. 같이 ‘킹키’합시다)”이더라고요.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특별한 경험을 함께하길 바랍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4호 2022년 7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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