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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LETTER] 다시 펼쳐질 여행에 대하여 [No.216]

글 |오세혁 작가, 다미로 작곡가 사진 | 2022-10-14 544

다시 펼쳐질 여행에 대하여

오세혁 × 다미로 네 번째 편지

 

첫 편지에서 나는 여행에 대해 말했어. 내 머릿속의 길이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고 여겨졌을 때, 오히려 몸의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았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롭게 『데미안』을 읽었지. 
<데미안>의 대본을 쓰면서 새로운 길이 시작됐어. 그 여행을 통해서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길이 막히면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고 다짐했지.

그 다짐 하나만으로 꽤 많은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어. 
언젠가부터는 슬슬 다가올 막다른 길을 기다리게 되더라고.

어서 빨리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서 말이야.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어쩌면 한동안은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도 괜찮겠다고. 
좋은 작가를 찾아내고, 좋은 배우를 발견하고, 좋은 제작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이미 있는 길에서 만나고 경험하고 체득한 것들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선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네버엔딩플레이는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팀이야.

어쩌면 하나의 팀이 아니라 여러 팀의 연합체에 가깝지.

다양한 색깔을 지닌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을 스스로 선택해서, 다양한 조합으로 팀을 꾸려 작업을 시작하지. 
작업의 속도와 밀도에 따라서 바로 다음 해에 작품을 올리기도 하고, 길게는 몇 년 후를 내다보기도 해.

작업에 참여하지 않는 시간에는 각자가 알아서 자유롭게 활동을 해.

저마다의 길을 마음껏 떠났다가, 또다시 함께하는 작업이 그리워지면 길을 되돌아와서 만나는 거야. 

 

나는 어쩌면 작가들의 베이스캠프를 꿈꿨는지도 몰라. 
우리가 저마다 오르는 산의 높이는 다르겠지만, 때때로 그 산이 너무 까마득할 때 잠시 숨을 돌리며 신발 끈을 맬 수 있는 곳.

한동안 모닥불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아침이 오면, 기운차게 저마다의 산을 향해 떠나갈 수 있는 곳.

어쩌면 나는 그 모닥불의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산을 오르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의 동료들이 다시 저마다의 산을 묵묵히 오르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슬슬 몸이 근질거려서 어느새 신발 끈을 묶게 될지도 몰라. 
벌떡 일어나서 동료에게 달려가겠지. 소재를 보내고 자료를 보내고 떠오르는 인물들의 상태와 감정에 대해 밤새도록 얘기하겠지. 
그럼 우리는 어느새 또 작업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거야.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또다시 터덜터덜 내려와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하게 될 거야.

새로운 창작자들이 두런두런 앉아 새로운 이야기를 따뜻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야.

 

돌이켜 보면 우린 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내가 작가들의 베이스캠프를 꿈꾼 것처럼, 너도 작곡가들의 베이스캠프를 꿈꾸고 있었지.

아마도 비슷한 꿈을 꾸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을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모닥불은 점점 더 많이 피어나겠지. 
모닥불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불이 되면, 마치 아침의 태양처럼, 모든 어두운 것들을 비추게 될 거야.

그럼 우리들 모두, 그리고 우리들의 뒤에서 걸어올 또 다른 우리들도, 점점 더 밝고 따뜻한 길을 걷게 될 거야. 
그때까지 계속해서 막다른 길과 새로운 길의 사이에서 지치지 않고 여행을 할 거야. 
이제 조만간 다시, 새로운 산에서 만나길 바라며. 


2022.08.18.
세혁

 

*

 

여행. 

노트에 적기만 해도 언제나 설레는 말이야.

여행이라는 말은 나만의 장소를 만나게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엔 항상 어릴 적 했던 보물찾기가 생각나.

보물찾기를 시작하기 전, 큰 보물을 찾을 듯한 기분에 설레던 그 마음 말이야.

그런 두근거림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더 설레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는 함께 참 많은 여행을 다녔지.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러시아, 베트남 그리고 한국의 아주 많은 곳.

그곳에서 너는 글을 쓰고 나는 음악을 만들고, 오늘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함께할 작품을 이야기했던 날들. 

 

그중에서도 도착만으로도 들떴던 브로드웨이 여행이 많이 생각나. 
어렸을 적부터 가보고 싶었던 그곳에서 매일 밤 함께 공연을 보고 나서 서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잖아.

우리의 꿈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아서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밤새 이야기를 나눴지. 

 

여행은 내게 그런 의미인 것 같아.

처음 가보는 곳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고립감.

그리고 그 끝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는 것. 
그 느낌들은 곧 내게 영감으로 다가오곤 해. 
끝없이 계속되는 작업에 영감이 바닥날 때쯤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여행지 거리의 풍경들을 떠올려.

그곳의 공기들.

낯선 곳에서의 나를 떠올리면 숨을 조금씩 크게 쉴 수 있게 돼.

공연이 시작되고 첫 번째 뮤지컬 넘버의 전주가 시작될 때, 어딘가에서 어떤 기분으로 작곡했는지 슬며시 떠오르면 ‘아, 여행이 내게 또 하나의 선물을 주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
어느 날 훌쩍 떠난 강진 여행에서 우린 많은 고민을 서로에게 털어 놓았지. 
신인 창작자였던 우리가 어느덧 10년 차 경력의 사십 대 중반을 바라보면서 고민이 참 많아졌으니까.

작품을 만들 때마다 느끼게 되는 창작의 어려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미래에 대한 고민들.

여행지에서 우린 고민에 대한 정답을 찾진 못했어.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먼저 행복하고 건강하자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자고, 그게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답을 얻었잖아. 

 

요즘 나는 좋은 영향력에 대한 고민이 참 많아졌어.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무엇보다 네 행복이 먼저라고 해.

재미있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파괴시키면서 작품에 임하지 말라고.

그래야 작업할 때도 건강한 에너지를 즐겁게 쏟아부을 수 있을 테니까.

네게 쓰는 마지막 편지에도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어. 
내 친구 오세혁이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쓰는 곡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고 덜컥 느낄 때.

긴 새벽을 피아노 앞에 앉아서 홀로 버텨내야 할 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시간에 쫓기는 하루하루를 보낼 때.

나는 우리의 여행을 떠올려.

우리 힘들 땐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즐거울 땐 그냥 즐겁다고 이야기하는 인생을 살자. 

 

앞으로 이 인생이란 여행에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때론 견디기 힘든 파도가 몰아치더라도, 이 여행의 끝엔 반드시 평안과 행복이라는 종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어.

 

마지막 편지를 마치며, 
언제나 새롭게, 그리고 뜨겁게.

또 다른 여행에서 다시 만나길. 
 
22.08.19.
다미로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6호 2022년 9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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