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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낭만파 남편의 편지> 최위안 감독, 잃어버린 낭만 되찾기의 괴로움 [No.121]

글 |이동섭(『뮤지컬 토크 2.0』 저자) 사진 |김호근 사진제공 |아담스페이스 2013-11-07 5,069

사전에서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로 정의되는 것은, 낭만이다. 정의에서 보다시피 감정과 이상이 주도되는 낭만은 곧 이성과 현실을 벗어나려는 욕구가 강하게 배어있다. 그래서 생활의 흔적이 없을수록 낭만성은 강화된다. 그러니 비루하고 속되기 마련인 속세에서 먹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게 낭만은 한 조각 꿈과 같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꾸불꾸불 국도로 접어드는 것, 속도와 효율보다 풍경과 감성을 선택하는 것 정도가 우리 일상의 낭만이다.

 

같은 맥락에서 연애가 낭만이라면, 결혼은 현실이다. 연인이 부부가 되면, 왜 낭만은 끝나는걸까? 결혼이란 제도는 ‘낭만 킬러’일까? 똑같은 일상을 매일 반복하던 결혼 9년차 남편은 기나긴 출근길에 권태로운 부부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연애 시절처럼 부인에게 손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문장은 “저와 두 번째 결혼을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였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누가 보냈는지 밝히지 않았다. 부인이 자신의 필체를 알아봐주길 바란 것이다. 설령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자기 이외에 그런 편지를 보낼 사람은 없을 테니, 당연히 자신임을 알아채리라 믿었다.

 


아내는 세금 통지서와 광고물 사이에 끼인 빨간 편지봉투에 적힌, 자기 이름 ‘금란’이 낯설다.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열어 본 편지에 적힌 내용은, 치명적인 도발이다. 일상의 지루함에 매몰됐던 부인은 급작스레 설렜고, 뜨겁게 흥분됐다. 누굴까? 어떤 남자일까?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남자를 편지의 발신자로 떠올릴 때, 그것은 기대와 희망에 가깝다. ‘저런 젠틀한 남자도 사랑에 빠질 만큼, 나는 여전히 아름답다.’ 남편에게 편지를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과 죄책감은 사실 다른 남자에 대한 기대와 환상의 그림자였다. 결혼 9년차 유부녀의 푸석하던 얼굴은 홍조띤 처녀의 얼굴로 바뀌고, 비밀을 간직한 여자는 변하기 시작한다. 남편은 장미꽃을 들고 퇴근했지만, 부인은 남편의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남편의 고백은 실패한다. 예상하지 못한 아내의 반응을 목격한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반전을 거듭하며 의외의 결말로 치닫는다.

 

소설, 연극, 영화가 결합된 새로운 작품 

 

영화 <낭만파 남편의 편지>에서 눈에 띄는 이름은 세 사람이다. 원작소설을 쓴 안정효 작가, 영화를 기획한 박철수 감독, 그리고 단 천만 원의 예산으로 7회차 만에 작품을 완성해낸 최위안 감독이다. 앞의 두 이름은 귀에 익지만 최 감독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낯설다. KBS 촬영감독, MBC 드라마 PD를 거친 그는 과 <베스트극장>에서 드라마를 연출하고, 방송국을 나와 2009년에 만든 첫 영화 <저녁의 게임>으로 제20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경쟁 부분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꽤나 낭만적인 세 아저씨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된 영화지만, 원작 소설의 매력을 발견하고 영화화의 꿈을 꾼 것은 최 감독이었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부터 이 소설은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에서 온통 안 된다고 하니, 오기가 생겨서 유작으로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심정으로 완성했어요(웃음).”

 

하지만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는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박철수 감독의 주선으로 안정효 선생님을 만난 때부터 약 5년이 걸렸어요.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제작사를 구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촬영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죠.”

 

제작비 부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던 영화는 형식의 새로움을 떠올린 최 감독의 아이디어로 돌파구를 찾았다. 최 감독은 13평 남짓의 소극장 연극 무대를 세트로 구성해 촬영했고, 원작 소설을 돋보이게 만들던 주인공들의 나레이션을 그대로 사용하여 문학적인 깊이를 갖춘 영화로 만들어냈다. 연극 무대와 나레이션은 영화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지루할 수 있는 형식이지만, 감독은 그것이 작품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하고 밀어부쳤다.

 

대신 표정 연기와 짧은 대사 몇 마디로 극중 인물을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이해하는’ 배우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에서 활동 중인 김재만과 신소현이 캐스팅됐다. 특히 주로 소극장에서 연기를 해온 신소현은 “이 영화의 공간이 낯설지가 않아서 연극 리허설을 촬영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연기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남의 이야기를 내가 대신해주는 것이 영화”라던 이창동 감독처럼, 최위안 감독도 영화를 통해서 각자 문제를 안고 끙끙대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런 따스한 마음은 멀리까지 퍼지기 마련이라, 최 감독이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스태프과 배우들도 기꺼이 노개런티로 작업에 참여했다. 그런 고마움으로, 촬영이 모두 끝난 후 최 감독은 모두에게 A4 용지에 10원짜리 동전을 붙여 출연료로 전달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은 우리의 마음을 확실하게 움직인다. 그 결과 영화는 지난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젼’ 섹션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고, 특히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정향 감독(<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 연출)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결혼 상대를 찾아라 

 

형식의 독특함은 이 작품의 큰 장점이다. 무대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석을 향하지만, 여기에서는 카메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대와 카메라의 공존은 낯설고, 그 낯섦은 이 작품에 힘을 부여하는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연극 무대는 현실을 상징화된 공간으로 채색해줬고, 부인이 네 번째 편지를 보낸 남자를 상상하는 장면과 남편의 출근 장면, 북카페에서 고심하던 장면 등을 비롯한 몇몇 씬은 대단히 인상적이다(물론 연극의 공간과 영화의 카메라의 충돌로 배우의 연기가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느껴져 어색한 부분도 있다). 분명, 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촬영했다면, 만들어내지 못할 효과였다. 이런 장면들 덕분에 원작 소설을 연극으로 상연한 경우와는 아주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 되었다.

 

특히 발신인 불명의 편지가 거듭될수록 변화하는 아내의 심리와 환상으로 전개되는 영화 중반부터는 13평 남짓의 집이 마치 그녀의 내면세계로 보인다. 그래서 마지막 편지에서 남자의 점심 제안은,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이자 남편과 아이가 점령한 집안을 벗어나고 싶은 탈출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좋은 변명으로 느껴진다. 전업 주부인 아내는 이름이 없고, 집안에서 자기만의 공간도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은 있어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에야 비로소 내면의 흥분과 설렘이 드러나면서 생기 없던 집에 활기가 생겨난다. 그녀의 누드 신이 에로틱한 이유는, ‘아내’와 ‘엄마’를 벗고 처녀의 몸인 ‘금란’을 다시 입으면서 잃어버렸던 성적 매력이 마법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그 집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느꼈으리라. 그래서 원작 소설과는 달리, 그 남자를 만나러 가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다. 권태로운 현실을 타개할 답이 집밖에만 있지 않으며, 낭만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은 집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함을 금란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문을 열고 뛰쳐나가지만, 금란은 열렸던 그 문을 스스로 닫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싶듯이, ‘시트를 덮어야 남편과의 잠자리를 허락하던’ 금란은 금란답게 행복하길 원했다. 
 


따뜻한 힐링무비

 

“부부는 가족의 핵인데, 요즘 너무 쉽게 이혼을 하는 것 같아요.”(최위안 감독)

 

낭만은 환상이라, 곡진한 노력에 의해서만 현실이 된다. 집밖을 나서기 직전에 아내는 그 사실을 깨닫고 열린 문을 닫는다. 아내는 남편에게 편지 사건을 아마도 영원히 비밀로 할 것이다. 한때 당신을 마음에 담은 적이 있다고, 누구를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영화 <일대종사>(왕가위 감독)에서 궁이(장쯔이)는 엽문(양조위)에게 뒤늦게 고백한다. 잠시 미지의 남자를 향해 설렜던 마음을 통해 금란은 한 번도 편지 발신자의 후보자가 되지 못했던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마도 첫 편지를 받던 저녁의 남편처럼, 장미꽃을 준비하고 퇴근하는 그를 기다리지 않을까?

 

“낭만은 여유예요. 그런 면에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낭만적이죠. 저희 영화를 보시는 관객들은 분명 낭만을 아시는 분들일 거예요.”

 

최 감독의 말대로라면, 지금 한국에서 낭만은 여성의 몫이다. 극장, 공연장, 전시장 어디든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유를 갖고 문화를 즐기는 여자들은 함께 즐길 줄 아는 낭만적인 남자를 갈망한다. 이때 낭만은 그 남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무엇이고, 자신의 성향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기대감이고, 더 나아가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욕구의 총합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따뜻함이에요. 사는 게 건조하고 메말라가는데, 마음놓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힐링무비를 만들고 싶었어요.”

 

지난 여름 한국 극장가를 점령한 블록버스터들은 멸망 직전의 인류, 도심 속 테러,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한 사회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끌었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10여 곳의 극장에서 개봉한 한 권의 책을 닮은 영화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상처받고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1호 2013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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