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들려준 이야기
<브론테> 김려원
<브론테> 속 에밀리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발신인이 없는 의문의 편지. 하지만 그 한 통의 편지는 에밀리가 세상에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김려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낼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것 역시 편지 한 통이다. 그를 믿어주는 관객의 응원과 사랑의 메시지가 가득 담긴 편지 말이다. 곁에 머물러주는 관객이 있기에 비로소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김려원. 이제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희망을 가져온 한 통의 편지
요즘은 <브론테>와 <사랑의 불시착>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어요. 두 작품 모두 초연 창작뮤지컬인데,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두 인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사실 두 작품 연습을 병행할 때는 ‘다시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 근데 막상 두 작품의 첫 공연을 올리고 보니, 시간을 돌려서 다시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 하더라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 <브론테>의 에밀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 글을 바라보며 살았던 차분한 인물이고, <사랑의 불시착>의 세리는 재벌가 막내딸로 톡톡 튀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에요.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다 보니 오히려 시너지가 생기더라고요. 한 작품에서 사용하지 않는 감정을 다른 작품에서 쏟아내다 보니 내면의 균형이 맞춰진다고 해야 할까. (웃음) 매일매일 그날 공연하는 작품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브론테> 첫 공연을 마친 후 배우들과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요. 그만큼 벅찬 감정이 들었다는 뜻이겠죠?
좋은 결과물을 보여드리기 위해 연습 기간 내내 아홉 명의 배우가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브론테>를 좋은 작품으로 완성시키겠다는 일념하에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해 노력했죠. <브론테>는 그 누구의 작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작품 같아서 첫 공연을 마친 후에 다들 ‘우리가 결국 해냈다’는 생각에 엉엉 울었어요. 특히 공연이 끝나고 박수 소리를 듣는데 엄청나게 울컥하더라고요. 관객분들이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보내주는 박수는 소리가 달라요. 박수 소리가 마치 ‘너희 오늘 진짜 잘했어!’라는 말처럼 들리죠. <브론테>의 첫 공연은 여러모로 특별했던 것 같아요.
려원 씨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브론테가의 둘째 에밀리예요. 인물과 가까워지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많이 고민됐나요?
에밀리는 소심하고 감성적이지만, 동시에 야성적이고 터프한 인물이에요. 실제 그의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복합적인 면이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다양한 면모를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했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지만 너무 신경질적으로 보이면 안 되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에밀리의 성격을 어느 정도의 농도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결국에는 평상시에는 소심해 보이다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 예민해지는 노선을 선택했죠. 하지만 에밀리라는 인물에 대한 고민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가져가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공연을 이어가면서 계속 고민해보려고요.
<브론테>는 억압 속에서도 자유와 욕망, 해방을 꿈꿨던 자매들의 이야기죠. 에밀리가 특히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유라고 생각해요. 에밀리는 실제로 산책을 즐겼대요. 그 당시는 여자가 혼자 산책을 하면 남자를 유혹하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였는데 말이에요. 제 생각에 에밀리는 사회적 시선보다 자유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샬럿이 자매들에게 글을 쓰자고 제안하면서 “우리의 글이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 줄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에밀리 혼자 ‘자유’라는 단어를 되뇌거든요? 그 장면이 자유를 꿈꿨던 에밀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극 중 브론테 자매에게 배달된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는 에밀리가 변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줘요. 에밀리는 편지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요?
편지에 “시간이 흐르면 너의 글은 더욱더 빛나게 될 거야”라는 말이 적혀 있잖아요. 나를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죠. 에밀리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편지인지 상관없이 그 응원을 믿고 싶은 마음이 컸을 거예요. 에밀리에게 필요했던 건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편지를 받기 전부터 에밀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환청을 듣잖아요. 그런데 편지에 “나는 너희가 어떻게 죽는지 모두 지켜봤다”라고 하니, 미래에서 나를 부르는 그 환청의 주인공이 이 편지를 보낸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을 것 같아요.
편지를 받은 후 에밀리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요. 자신의 글에 자신감을 갖지 못했던 인물이 편지를 계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겠어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에밀리는 복합적인 인물이에요. 편지를 받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변화가 드라마틱할 정도로 크게 드러나진 않아요. 자신의 글에 조금 더 확신을 갖게 됐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 변화하는 모습의 균형을 잘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자신을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배우 입장에서도 크게 공감됐을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예술에는 답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관객분들이 남겨주시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고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거구나’라는 용기를 얻어요. 그러면 자신감이 생겨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죠. 에밀리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편지를 받고 나서 내가 지금 당장은 인정받지 못해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글을 알아봐 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잖아요. 그게 에밀리에게는 정말 큰 원동력이 됐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연기하는 에밀리는 죽을 때도 울지 않아요. 오히려 희망을 품고 죽음을 맞이하죠. 내가 죽고 나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는 확신, 내 글이 인정받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에밀리는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둬요.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요?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어”라는 말은 세 자매가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서로에게 해주는 말이에요. 죽는 순간에 에밀리가 그 말을 하는 이유는 앤에게 작가로서 계속 나아가라고 응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앤은 그때까지 작가로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에밀리는 앤에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이 장면을 통해서 앤처럼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한 분들이 힘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어요. 샬럿, 에밀리, 앤이 그렇듯이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잖아요. 그러니 관객분들이 <브론테>의 세 자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받으셨으면 좋겠어요.
에밀리는 죽음 후 자신의 글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세상을 떠나잖아요. 려원 씨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내가 어떻게 기억될까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2019년에 크게 아프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때 첫 번째로 든 생각이,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해줘야겠다는 거였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려원이 정말 좋은 애였지’라고 기억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 생각을 계속 품은 채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려원이는 믿을 수 있는 배우였고,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남고 싶어요.
<리지>를 통해 존재감을 알린 2020년부터 <브론테>와 <사랑의 불시착>으로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올해까지, 지난 3년간 쉴 새 없이 달려왔네요. 그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관객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 시간이었어요. 이전에는 어떤 작품이든 배우로서 쓰임을 당하는 게 우선이었다면, 이제는 관객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해요. 관객분들이 분에 넘칠 정도로 저를 사랑해 주신 덕분이죠. 동시에 저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도 훨씬 커졌어요. 저를 믿어주시고, 제 선택을 믿어주시는 관객분들께 상처를 드리면 안 되잖아요. 또, 최근에는 선배 배우로서의 책임감도 많이 느껴요. 내가 잘해내야, 내가 가능성을 입증해야 여성 후배들이 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아질 테니까요. <브론테> 연습 과정에서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한 데에도 그런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우리가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다음 시즌이 있을 테고, 그렇게 시즌을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으면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배우들을 발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브론테>뿐만 아니라 <리지> <베르나르다 알바> 등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 왔어요. 이런 선택 역시 앞서 말한 책임감 때문이겠죠?
물론 그 이유만으로 작품을 선택하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이긴 해요. 아직까지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 중에 전 회차 매진이 되고, 자리가 없어서 못 볼 정도로 인기를 얻은 창작뮤지컬은 드물잖아요. 그런 작품이 나올 때까지 배우와 창작진이 꾸준히 도전을 해서, 더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선의의 경쟁이 펼쳐졌으면 좋겠어요. 남자가 주인공인 작품이 ‘남성 서사’라고 불리지 않는 것처럼,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에도 굳이 ‘여성 서사’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날이 오도록 다양한 여성 주인공 작품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래서 <브론테>에서도 ‘여성’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작가’로서의 면모가 잘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작가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세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직업적인 면에서 더 전문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이제는 여성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여성’ ‘선배’ 배우로서의 고민이 아닌, 오롯이 나를 향한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책임감이 되게 강한 편이에요. 제 공연으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을 경험하는 관객도 있을 테니 그런 분들께 좋은 기억을 남겨드릴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예요. 그런데 가끔은 그 목표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제 능력을 전부 다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 내면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책임감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무대를 마음껏 즐기자는 생각이죠. 그렇게 해야 오히려 제가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7호 2022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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