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법정> 유태양
내일의 태양
뮤지컬 활동을 병행하는 아이돌은 많다. 그러나 그룹의 메인 보컬이 아닌 메인 댄서가 뮤지컬에 도전하는 일은 흔치 않다. 화려한 춤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인정받는 SF9의 멤버 유태양. 그는 뮤지컬 무대에서 새롭게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이다.
조금씩 확장되는 세계
지난해 연말 공연한 <알타 보이즈>가 뮤지컬 데뷔작이죠. 극 중에서도 아이돌 역할을 맡았는데, 처음 경험한 뮤지컬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요?
<알타 보이즈>는 퍼포먼스에 중점을 둔 작품인 만큼 다른 뮤지컬에 비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알타 보이즈’라는 아이돌 그룹이 투어 콘서트를 하며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내용인데, 3천 석 규모의 KBS아레나에서 공연했기 때문에 실제로도 콘서트 무대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죠. 처음부터 낯선 형식의 뮤지컬에 도전했다면 부담감을 느꼈을 텐데, <알타 보이즈>는 저에게 익숙한 요소가 많아서 큰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할 수 있었어요.
뮤지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사실 뮤지컬은 저에게 오랫동안 낯선 장르였어요. 그러다가 2018년쯤엔가 우연히 <킹키부츠>를 보고 ‘쇼크’를 받았죠. 뮤지컬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구나! 객석에 앉은 제가 어느새 무대 위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더라고요. 그 뒤로 인터넷에서 뮤지컬 공연 영상을 많이 찾아봤어요.
보이는 라디오 형식의 공연 <온에어>에 출연했을 때, <모차르트!>의 뮤지컬 넘버 ‘황금별’을 부르기도 했죠.
<모차르트!>의 음악을 정말 좋아해요. ‘내 운명 피하고 싶어’라는 곡도 좋아하는데, 직접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상으로 아마데가 모차르트의 팔을 찌르는 장면을 보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어요. 연기와 음악이 공존하는 저 무대에 서면 어떤 느낌일까? 여러 뮤지컬 작품을 접하면서 가수라는 제 영역을 넘어 더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뒤늦게 연기를 시작했는데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북한말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소화하던 걸요! 비결이 뭐예요?
연습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명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 나라면 리해랑 역할을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상상해 봤어요. 또 북한말을 사용하는 다른 영화도 찾아보고, 인터넷으로 북한말 강의도 찾아 들었죠. 북한말도 지역마다 특색이 달라서 한 지역을 선택해 집중 공략했어요. (웃음)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관객분들이 제 말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겁이 났지만, 표현해야 할 캐릭터의 특징이 명확하다는 점이 연기의 가닥을 잡는 데 도움이 됐어요.
리해랑은 가수가 되기 위해 기타를 들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태양 씨도 그런 경험이 있다면서요?
네, 저도 열여섯 살 때부터 기타를 메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중학생 때 학교에서 방과 후 활동으로 기타 수업이 개설됐는데, 그걸 알고 부모님을 졸라서 무작정 기타를 샀어요. 부모님도 놀라셨을 거예요. 그전까지는 한 번도 떼쓴 적이 없는 온순한 아이였거든요. (웃음) 그렇게 배우기 시작한 기타가 너무 재밌어서 학교 밴드부까지 들어갔어요. 밴드 활동을 하면서 음악이 주는 즐거움에 더욱 빠져들었고, 가수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했죠.
지금은 기타 연주보다는 춤 실력으로 유명해졌는데, 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가수가 되기 위해 여러 소속사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한 곳에서 가수가 되고 싶으면 춤을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댄스 학원에 갔는데, 그때는 춤이 어렵게만 느껴졌어요. 다들 선생님을 잘 따라 하는데 저만 뭘 해도 이상한 거예요. 하지만 그 부족함이 성장의 발판이 됐어요. 저는 안 되는 건 될 때까지 하는 성격이거든요. 지는 걸 싫어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춤 실력이 늘고 재미도 느끼게 되었죠. 이제는 저란 존재를 춤과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태양 씨의 춤 실력이 빛을 발한 무대였다고 생각해요. 북한 특수 부대의 절도 있는 칼군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만난 건 여러모로 저에게 좋은 기회였어요. 말씀하신 대로 무술과 군무 장면이 많아서 저의 장기를 충분히 보여드릴 수 있었고, 함께한 스태프와 배우분들이 뮤지컬에 익숙하지 않은 저를 잘 이끌어주셨거든요. 제가 춤추는 장면을 연습할 때마다 (백)인태 형, (서)승원 형이 “야, 이건 봐야 돼!” 하고 달려와서 앞에 앉아 구경하던 게 떠올라요. (웃음) 형들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덕분에 저도 긴장을 풀고 마음껏 제 춤을 보여드릴 수 있었죠. 메인 댄서 포지션의 아이돌이 뮤지컬에 진출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오히려 저한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공연에서 어떤 안무가 주어지든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드릴 자신이 있거든요. 그걸 저만의 무기로 가져가고 싶어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이번에 새롭게 참여한 <인간의 법정>은 퍼포먼스보다 노래와 연기에 중점을 둔 작품이에요. 전작들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은데, 연습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이게 일종의 직업병인데요, 저는 춤추면서 노래하는 것보다 가만히 서서 노래하는 게 더 힘들어요. 왠지 더 긴장되고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하다못해 평범하게 노래하며 걷는 장면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박자를 타게 되는 거예요! (웃음) 처음에는 제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연습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빵 터져서 알았어요. 가수로 활동하며 저도 모르게 굳어진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태양 씨가 맡은 아오 역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라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해요.
단순히 인간처럼 생긴 로봇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처럼 의식을 갖게 된 로봇을 연기해야 해서 더 어려워요. 그러니까 너무 인간 같아도 안 되고, 너무 인간 같지 않아도 안 되는 거죠!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오가 의식을 얻기 전과 후의 모습도 완전히 달라요. 의식이 생기기 전에는 주인의 명령에만 반응하는 기계였다면, 의식이 생긴 후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거든요. 양쪽의 차이가 확실히 느껴지게끔 연기하고 싶어요. 중요한 건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시점을 왔다 갔다 하며 진행되기 때문에, 저도 아오가 의식을 갖기 전과 후의 모습을 왔다 갔다 하며 연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때그때 장면에 몰입해서 감정을 컨트롤하는 게 이번 작품에서 저에게 주어진 숙제예요.
공연 개막 전 아오의 솔로 곡인 ‘내 피는 파랑’이 음원으로 공개되었잖아요. 이 곡을 부를 때는 어떤 감정을 담아 노래하나요?
‘내 피는 파랑’에는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오가 결국 그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길을 가기로 다짐하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이러한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러려면 단순히 음만 잘 지켜서 부르는 게 아니라 가사에 신경 써야 해요. 연습할 때 장소영 음악감독님께서 “말을 전달하듯이 노래하면 좋겠다”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노래하는지 돌아봤는데, 말이 마음을 거치지 않고 입에서 바로 튀어나오더라고요. 이제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면서 노래하고 있어요. 이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스스로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의미를 찾고 그게 연기에 반영될 수 있도록 연습하고 있어요.
공연 유튜브 채널 ‘혜화로운 공연생활’에 출연했을 때 ‘내 피는 파랑’을 라이브로 부르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걸 봤어요. 실제 무대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몰입할 수 있었나요?
저는 웃는 연기보다 우는 연기가 더 쉽더라고요. 어쩐지 슬픈 감정에는 바로 이입이 돼요.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도 대체로 어두운 감정을 표현하는 곡이고요. 저란 사람이 즐거움보다는 슬픔을 표현하는 쪽에 더 끌리나 봐요. 어쩌면 연기를 통해서 제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안 좋은 감정을 안고 무대에 올랐을 때 오히려 공연이 잘 되는 묘한 경험을 했거든요. 잘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면 오히려 긴장해서 버벅거리게 되는데, 그때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었어요. 제 안에 내재된 감정을 무대 위에서 다른 인물이 되어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은 참 매력적이에요.
뮤지컬에서 또 어떤 재미를 발견했어요?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1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네 편의 작품에 출연했는데, 무엇이 태양 씨를 계속해서 뮤지컬 무대로 이끄는지 궁금해요.
작품에 참여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여러 배우분들의 노래와 연기를 지켜보고, 연출님과 음악감독님께 피드백을 받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제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지금의 저는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잘 조합해서 저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더욱 다양한 무대를 보여드릴 테니 지켜봐 주세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7호 2022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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