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소음>
피기 전에 낡지 않으려면
오래된 느낌의 신작
쏟아지는 창작뮤지컬 가운데 <청춘소음>이라는 제목은 단연 눈에 띈다. 사람 이름도 아니고 외국어 제목도 아니어서 그런가. 사실 그런 면도 없지 않다. ‘청춘’ 같은 예스러운 단어에 ‘소음’ 두 글자를 붙여 네 글자 음운을 맞춘 제목은 이 이야기가 요즘의 트렌드와는 다른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담뿍 담겨 있다는 점에서 <청춘소음>은 좋은 제목이다. 원래 제목이란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한 것이잖나. 좋은 제목에는 이야기의 내용과 장르와 주제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근심 어린 소리騷音에 시끄러운 세상에서 한바탕 웃음소리笑音로 모든 잡음을 없애버리는消音 청춘들의 이야기. 이래 쓰나 저래 쓰나 ‘소음’의 뜻 모두 청춘이라는 주어로 모일 수 있으니 이만한 제목도 없다. 그런데 작품이 제목을 못 따라간 모양이다. 공연을 보면 그 이유가 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1990년대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 작품은 생산 연도에 비해 연식이 오래돼 보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층간 소음이라는 신선한 이야깃거리에서 시작한 이 작품이 이토록 낡은 면모로 회자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 때문에
<청춘소음>은 15센티미터 부실한 벽 때문에 윗집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덕용맨션’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재로 따지자면 낡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런 현실성이 시종일관하다면 웃음은 자연스레 배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적인 디테일에서 이야기는 자주 느슨해진다. 인물의 현실성이 그렇고, 상황의 현실성이 그렇다. 예를 들어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는 청년이 가짜 여행기로 몇 년 동안이나 독자들을 속이는 일이 가능할까? 이런 설정이 그럴듯하려면 감쪽같은 거짓말을 위해 꼼꼼하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하는 청년의 현실적인 고달픔이 생생해야 한다. 게다가 그렇게 쉽게 거짓말을 자백한다고? 그랬다간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되겠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손해와 기꺼이 손해를 떠안을 용기는 이야기에 없다. 방구석 청년이 다시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과정이 너무 쉽고 해맑기만 한 거다. 다른 인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층간 소음이라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사소하게 만들어지는 생활 소음의 에피소드가 차곡차곡 쌓일 때 이야기는 현실성과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 소음의 에피소드는 다소 부족하거나 때로 인위적(갑작스러운 피리 불기!)이다. 사랑과 화해에 이르는 비현실적인 결론이 안이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상에서 빚어지는 ‘웃픈’ 이야기를 기대했건만, 근거 약한 희망을 다지는 개성 없는 결과물에 그치고 만 것이다.
그래도 현실적인 재미로 생생해질 수 있는 ‘구다리’가 이야기 안에 적지 않다는 점은 이 작품의 대본이 지닌 장점이다. 이야기의 시작점과 틀거지에 나름대로의 짜임새가 있어서 일상의 소동극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지금은 아니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 때문에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도 그렇고,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희극적인 과장을 통해 의미의 비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도 꽤 많다. 고쳐서 새로 틀을 바꾸기보다 구석구석 디테일을 채우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이런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본 뒤로 숨은 문제
<청춘소음>이 구태의연해진 이유는 대본 때문일까? 이야기의 결함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어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대본에 지워졌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맞는 접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이야기 안에는 작게나마 웃음의 코드와 현실적인 감각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작은 웃음마저도 보이지 않게 됐다면, 이야기의 바깥을 살펴봐야 할 일이다. 물론 대본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대본을 고쳐야 한다면 이야기보다 더 급한 것이 음악이다. 이야기에 비해 음악은 결함을 잘 들키지 않는 안전지대에 있지만, 사실 음악이 이야기의 완성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다. 서브텍스트를 풍성하게 채우며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힘은 음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이 대본의 음악은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음악 때문에 이야기가 더 느슨해지니 말이다. 첫 장면부터 왈츠풍으로 전개되는 음악은 유럽 여행의 낭만을 표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극적 기능으로 보면 이야기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만다. 시작부터 이야기의 속도감을 처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쾌하고 재치 있게 전개되어야 할 때 음악의 호흡은 느릴 뿐 아니라 적절치가 않다. 예를 들어 화를 꾹꾹 누르고 격식 있는 척 층간 소음을 항의하는 주인공에게 부드러운 리듬의 노래를 만들어 입히니 말이다. 가사의 표면적인 내용에 중점을 두느라 장면의 이유를 놓쳐버리는 격이다. 그 결과 음악은 이야기를 쫀쫀하게 조이기는커녕 대사가 마련해 놓은 희극적 호흡까지 날려버릴 때가 많다.
공연의 언어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무대부터 그렇다. 20년 전의 무대를 연상시키는, 단순하게 공간을 재현한 무대는 말 그대로 예스럽다. 무대가 복고의 취향이 될 수 없는 것은 미학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재현이라기에는 주인공의 방에 눕고 일어날 공간 하나 준비하지 못했고, 뻐꾸기시계를 연상시키는 세트의 모양새와 쓰임새는 기능을 따지기 전에 촌스럽다. 예산보다 상상력이 더 부족한 셈이다. 이런 식의 무대는 연출의 결과일 거다. <청춘소음>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공연의 어법과 코미디의 호흡 모두에 익숙하지 못한 연출의 만듦새다. 공연의 곳곳에서 연출의 미숙함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모든 장면을 암전으로 전환하는 것은 공연의 장면과 영화의 신을 구분하지 못할 때 범하는 가장 흔한 실수다. 영화에서 장면은 편집점이 기준이지만 공연의 장면은 연결이 기준인 바. 에피소드 형식이라면 모를까 드라마로 흐르는 이야기에 암전 때문에 생기는 장면의 단절은 코미디의 호흡을 더 쌓지 못하게 만든다. 세 사람의 대화를 한 통의 전화로 교차시켜 각자 다른 의미의 대화로 완성하는 장면에도 쫀쫀한 리듬과 템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굳이 멀티맨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멀티맨은 공연에서 익숙한 연출 방식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결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전쟁 때문에 또 다른 소음에 시달리는 옆집 아저씨처럼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중요한 캐릭터를 멀티맨으로 표현하는 게 과연 효과적인 선택일까? 꼭 필요한 캐릭터의 수를 줄여버리는 기계적인 발상에, 매끄러운 등퇴장도 준비해 놓지 않은 연출에 멀티맨이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는 허술함을 들켜 그만큼 민망해진다. 여기엔 배우의 몫도 크다. 사실과 과장을 넘나들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는 코믹 연기에 이 작품의 배우들은 능숙하지 않다. 연출과 배우가 서로를 돕지 못한다.
그럼에도 북돋워야 할 이유
결과적으로 볼 때 <청춘소음>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질 만한 작품은 아니다. 충분히 익지 못한 대본의 의욕, 아마추어 같은 연출의 미숙함, 능숙하지 못한 배우의 연기, 상상이 부여되지 않은 무대까지, 창작뮤지컬에서 익히 봐왔던 여러 가지 아쉬움이다. 오히려 이 작품의 의미는 작품 자체보다는 창작뮤지컬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는, 일종의 대표성에 있다. 이 작품이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사람들의 일상은 이야기의 가장 일반적인 소재이건만 요즘의 창작뮤지컬에서는 오히려 새삼스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렛미플라이>나 <어차피 혼자>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소재로만 보자면 이런 작품이야말로 비주류이자 다양성으로 분류될 만한 이야기인 셈이다. 일상의 이야기가 이토록 드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흥행의 주류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탄탄한 이야기의 틀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틀이란 다른 게 아니다. 타인이 있고, 갈등이 있고, 사건이 있고, 변화가 있는 것.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구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창작뮤지컬에서는 이런 틀이 가장 낯설고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타인의 자리에 자아가 있고, 갈등 대신 고민이 있고, 사건 없이 상황만 있고, 변화 대신 위로가 있고. 아직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의 재료들만 나열한 채 감정의 강도만 더해가는 방식으로 서사의 시간이 채워질 때가 적잖다. 소재와 발상에 기대고, 배우에게 의존하는 작품이 많아진 것도 그 영향일 거다. 작품은 넘쳐나는데 서사는 빈곤해졌다. 이런 희한한 지형도에서 서사의 틀에 충실해야만 빛이 나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자주 겪어왔다. 당연하다. 현실의 문제에서 출발해 비현실적인 희망에 도착하려면 ‘그럼직한’ 전개와 ‘그랬으면 좋겠는’ 결말까지 치밀한 논리로 잘 짜인 구조가 있어야 하지만 이걸 잘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구조에는 갈등이 됐든 충돌이 됐든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서사의 오래된 철학은 일상의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러워진다.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이야기를 계속 북돋워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청춘소음>은 ‘창작산실’이 선정한 올해의 신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을 개발하는 여러 플랫폼이 있지만 시장에서 흥행하는 작품과 다른 결을 가진 작품까지 포괄하는 지원 프로그램으로는 창작산실이 대표적이다.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시장을 확장하는 것이니 더 넓은 의미의 시장성을 내다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 까닭에 창작산실의 작품들은 다른 플랫폼에 비해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은 편이다. 이 시행착오에 관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지만 방향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감내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창작뮤지컬의 신작 수가 비약적으로 많아진 것은 분명 발전의 지표다. 하지만 물량은 발전의 지표 중 가장 표면에 있는 것일 뿐. 장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또한 장르가 포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져야 한다. 그 영역은 다름 아닌 리얼리티다. 브로드웨이에서도 뮤지컬이 자기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장르가 됐을 때 형식에서나 깊이에서나 한껏 도약하지 않았던가. 스티븐 손드하임이나 조나단 라슨은 그 순간을 만든 이름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다. 우리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뮤지컬이 더 이상 불편한 장르가 아닐 때 뮤지컬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아질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1호 2023년 2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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