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 for My Music
<오페라의 유령> 김주택
떨어진 샹들리에가 다시 천장에 매달리며 과거를 소환하는 <오페라의 유령>의 첫 장면처럼, 잠시 시계를 2009년으로 되돌려 보자. 한국에서 <오페라의 유령> 두 번째 라이선스 공연이 개막했던 그해, 저 멀리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인 바리톤 김주택이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으로 오페라에 데뷔했다. 이후 세계 무대를 누비며 오페라 가수로 활약하던 그는 2017년 돌연 음악 경연 프로그램 <팬텀싱어2>에 출연해 크로스오버 그룹 ‘미라클라스’를 결성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2023년, 13년 만에 돌아온 <오페라의 유령> 라이선스 공연에서 ‘팬텀싱어’ 김주택은 진짜 ‘유령phantom’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오페라 스타 김주택과 어두운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숨어 사는 유령. 정반대의 세계를 사는 듯한 두 인물은 ‘나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 아래 한 몸이 되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김주택 씨가 <팬텀싱어2>에 출연하자 큰 화제가 되었던 걸 기억해요. 당시에는 가족과 지인이 방송 출연을 만류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뮤지컬 데뷔 소식에는 어떤 반응이 돌아왔나요?
<팬텀싱어2>에 출연하겠다고 했을 때는 어머니가 앓아누우셨죠.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봐 캐스팅 발표 직전까지 어머니께 출연 사실을 숨기고 있었어요. 근데 캐스팅 소식을 들은 어머니 반응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반대하시기는커녕 관심 있게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마도 장르를 떠나 조승우, 최재림, 전동석이라는 쟁쟁한 배우들과 같은 역할을 맡았다고 하니 아들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나 보다 생각하신 것 같아요. (웃음) ‘미라클라스’ 멤버들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줬고요. 특히 뮤지컬배우 박강현 ‘선배님’이 저와 무척 잘 어울리는 역할이라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웃음)
그동안 박강현 배우가 출연한 뮤지컬을 대부분 챙겨 보았다고 들었어요. 뮤지컬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진 거예요?
솔직히 <팬텀싱어2>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성악만이 나의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눈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았죠. 그런데 <팬텀싱어2>를 통해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실력자들을 만나보니 제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있더라고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그동안 성악 좀 한다고 너무 콧대가 높아졌구나! 반성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부터 고정관념을 깨고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마침 경연 과정에서 뮤지컬배우인 강현이와 같은 ‘미라클라스’ 멤버가 되었고, 응원 차 공연을 보러 가면서 자연스레 뮤지컬을 접하게 되었어요. 2017년 대학로에서 <이블데드>를 공연하던 때부터 대극장 무대에 선 지금까지 강현이가 출연한 뮤지컬은 거의 다 봤죠.
객석에 앉아 뮤지컬 공연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뮤지컬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뮤지컬이 잘 공연되지 않거든요. 뒤늦게 한국에 돌아와 뮤지컬을 접하고 그야말로 압도당했어요. 무대 연출도 멋지고, 배우들의 노랫소리가 귀를 꽝꽝 때리는데 마이크를 쓰지 않는 오페라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연기를 배운 적은 없지만 <레미제라블> <하데스타운>처럼 대사가 거의 없고 노래로만 진행되는 성스루 뮤지컬이라면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가 부르는 노래도 불러보고 싶고요. 가끔 ‘내가 이 뮤지컬에 출연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곤 했죠. <오페라의 유령>도 그렇게 막연히 꿈꾸었던 작품 중 하나예요.
캐스팅 발표 당시 “언젠가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된다면 나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해 줄 <오페라의 유령>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라는 소감을 전한 바 있죠. 출연을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뭐예요?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이지만 성악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작품이에요.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 데다 종종 성악가가 출연하기도 했으니까요. 저 또한 직접 공연을 본 적은 없지만, 콘서트에서 라울과 크리스틴의 이중창 ‘All I Ask of You’를 부른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음악이 참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롱런하는 공연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궁금했어요. 직접 공연에 참여해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더라고요. 무엇보다 한국에서 <오페라의 유령> 라이선스 공연이 올라가는 건 무려 13년 만이잖아요! 다음 공연까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데,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라이선스 공연이 오랜만에 이뤄지는 만큼 캐스팅 경쟁도 치열했을 텐데, 오디션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코로나19로 인해 출입국이 어려웠던 시기에 오디션이 열려서 라이너 프리드 연출님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화상으로 오디션 상황을 지켜보셨어요. 오디션곡은 유령이 크리스틴과 라울의 밀회를 엿보고 배신감에 차서 부르는 노래 ‘All I Ask of You’ 리프라이즈였죠.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런데 노래를 마치고 나니 연출님이 유령의 감정에 집중해서 한 번 더 불러볼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때 좋은 예감이 들었죠. 그 말은 저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연출님 앞에서 노래를 부른 건 연습 때가 처음이었는데, 직접 들으니 화상 오디션 때보다 몇 배는 더 전율이 느껴진다고 말씀해 주셔서 기뻤어요. 오디션 현장에 계셨던 PD님도 제가 기억에 남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자기는 보통 오디션 때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는데, 첫 소절을 듣자마자 고개를 든 건 제가 처음이었다고요. 정작 저는 엄청나게 떨었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런 칭찬을 들으니 부끄러웠어요.
정말 그렇게나 긴장했다고요? 뮤지컬이 낯선 장르이긴 하지만 노래 실력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 있을 줄 알았어요.
어유, 처음에는 안 그랬죠. 일단 유령의 노래에는 고음이 많아요. 오페라에서 바리톤이 소화하는 음역대는 높아봐야 F#(파#), G(솔) 정도인데, 유령은 G#(솔#)을 넘어 A(라)까지 내야 하거든요. 가성을 써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원래 성악가는 가성을 쓸 일이 없어요. 오페라 무대에서는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뚫고 소리를 전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뮤지컬에서 요구하는 발성은 오페라와 다르기 때문에 부담감을 느꼈죠.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연습 때 성악 발성을 적당히 섞어서 노래를 불러봤는데, 다행히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웃음)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겼어요.
“오페라 가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어요”
연습 과정에서 오페라와 뮤지컬의 차이를 크게 느낀 부분이 있나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이크를 쓰지 않는 오페라에서는 작은 소리로 노래하면 목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에 묻혀버려요. 지휘자에게 목소리가 작다고 지적받는 건 성악가로서 아주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반면 뮤지컬에서는 마이크를 통해 배우의 작은 속삭임과 숨소리 하나까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잖아요. 그래서 오페라보다 훨씬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요. <팬텀싱어2>에서 강현이가 저에게 ‘티라노’라는 별명을 붙여줘서 파워풀한 성량으로만 저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저는 감정선을 살려서 섬세하게 노래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면에서 뮤지컬이 저한테 잘 맞더라고요.
그동안 오페라 무대에서 이탈리아어로 노래할 때가 많았다면, 이번에는 한국 관객 앞에서 한국어로 노래한다는 점도 새로울 듯해요.
한국어로 노래하니까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일단 연습 과정에서 한국어 가사가 계속 더 좋은 방향으로 수정되다 보니 자꾸 그 전에 외웠던 가사와 헷갈리더라고요. 오페라는 가사가 바뀔 일이 없고, 연습 시작 전에 암보를 해오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새로운 연습 방식에 적응하고 있어요. 한국어 특성상 악센트나 인토네이션이 뚜렷하지 않은 것도 애로 사항이에요. 유럽권 언어는 음의 고저와 강세가 정해져 있어서 그걸 따라가며 노래하면 되는데, 한국말은 각자 발음하기 나름이거든요. 그래서 성악가들이 이탈리아나 독일, 영미권 가곡보다 한국 가곡을 부르기 어려워해요. 하지만 그만큼 재미있어요. 부르는 사람이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노래가 확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연기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요?
대사 연기가 많다면 부담감을 느낄 텐데 <오페라의 유령>은 성스루 뮤지컬이잖아요. 노래에 감정을 입히는 건 오페라 무대에 설 때부터 계속 해왔던 일이라 비교적 수월해요. 흔히 오페라 가수는 자기 순서에 나와서 노래만 하고 퇴장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시는데, 오페라 역시 뮤지컬 못지않게 연기력을 요하는 장르거든요. 이번에 유령 역을 잘해내서 오페라 가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어요.
이번에 크리스틴 역을 맡은 손지수, 송은혜 씨도 모두 성악가 출신이잖아요. 연습 때 두 분과 함께 호흡을 맞춰본 소감이 어때요?
두 분에 대해서는 전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소프라노인 지수 씨는 저와 같은 선화예고 출신인 데다 콩쿠르에서도 가끔 마주친 적이 있거든요. 팝페라 가수인 은혜 씨와는 콘서트 무대에 함께 선 적이 있고요. 두 분의 존재가 저한테는 큰 의지가 됐어요. 똑같이 뮤지컬에 도전하는 성악가로서 고민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크리스틴은 출연 분량이 많아서 연기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 텐데, 유령 역의 다른 뮤지컬배우분들이 잘 이끌어주셔서 이제는 다들 즐기면서 연습하고 있어요. 함께 연습해 보니 두 크리스틴의 개성이 달라서 더 재미있더라고요. 지수 씨가 실제로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해 온 만큼 어엿한 프리마 돈나 느낌이 난다면, 은혜 씨는 이제 막 스타로 떠오른 크리스틴의 소녀처럼 순수한 면을 잘 살려요.
연습을 마치고 무대에 서는 날을 그려봤을 때, 가장 기대되는 장면은 뭐예요?
유령의 솔로곡 ‘The Music of the Night’를 부르는 장면이요. 연습을 시작하고 10일 동안은 거의 이 노래만 연습했는데, 왜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겠더라고요. 몇 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유령이 어떤 인물인지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거든요. 유령에게는 음악이 삶의 전부예요. 자신의 모든 것을 음악에 쏟아부었죠.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자신이 꿈꾸는 음악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요. 그게 바로 크리스틴이에요. ‘The Music of the Night’를 부르기에 앞서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이렇게 노래해요. 널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단 하나다, 네가 나의 노래를 불러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유령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관객들 눈에 유령은 그저 악당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무척 긴장되지만 또 가장 기대되는 장면이기도 해요. 이 곡을 부를 때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어요.
‘The Music of the Night’는 섬세한 감정 표현이 필요한 곡인데, 유령은 가면을 써서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맞아요. 가면으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강렬한 눈빛을 쏘더라도 관객에게 전달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대신 손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해요. ‘The Music of the Night’에서 유령의 손동작은 마치 아기를 다루듯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요. 크리스틴이 그만큼 소중하니까요.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공존해야 돼요. 그래야만 유령에게 압도당하는 크리스틴이 보이거든요. 연출님은 “크리스틴의 척추를 잡고 끌어당긴다는 느낌으로” 연기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크리스틴을 사로잡는 유령의 보이지 않는 힘을 잘 표현해야 한다는 거죠. 연습이 진행될수록 이 작품이 얼마나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짜여 있는지 실감하고 있어요. 호흡, 눈빛, 손동작, 가사의 단어 하나까지도 허투루 넘길 수 없더라고요. <오페라의 유령>이 35년 동안 전 세계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치밀함에 있는 것 같아요.
“생각만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크리스틴은 유령의 지도를 받아 프리마 돈나로 부상하잖아요. 실제로 주택 씨에게도 유령처럼 멘토가 되어준 선생님이 있나요?
만난 적은 없지만 제가 노래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붙들어 주신 분이 계세요. 바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바리톤 피에로 카푸칠리예요. 카푸칠리는 바리톤이지만 테너 음역까지 소화가 가능하고 호흡이 긴 것으로 유명해요. 저는 특히 그의 레가토(둘 이상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노래하는 창법)를 좋아하죠.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로드리고가 죽기 전에 부르는 ‘나는 죽더라도 행복하오Io Morro, Ma Lieto In Core’라는 아리아가 있는데, 여기서 카푸칠리가 20초 정도 되는 네 개의 프레이즈를 한 번도 끊지 않고 부르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걸 따라잡고 싶어서 저녁에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걸으면서 노래 연습을 했어요.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니까 조금씩 숨이 길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카푸칠리의 노래를 듣고 따라하면서 성장했어요. 저의 우상이자 멘토였죠. 지금도 초심을 되살리고 싶을 때마다 카푸칠리의 영상을 봐요. 그럼 유령이 크리스틴을 거울 너머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카푸칠리가 화면 너머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어요.
유령은 음악의 천재이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숨어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주택 씨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유령에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나요?
저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극 중 인물과 저 사이의 비슷한 경험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요. 예컨대 방황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 역이라면, 아끼는 후배가 엇나갈 때 느낀 감정을 떠올리며 연기하는 거죠. 유령과 나의 접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탈리아에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를 떠올렸어요.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4~5년쯤 지났을 때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어요. 설상가상으로 인간관계에서도 큰 배신을 당했죠. 이십대 중반에 홀로 먼 타국에서 연달아 악재를 겪으니까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그때까지 나의 전부라고 믿었던 노래를 포기하고 싶어졌어요. 아예 삶을 포기하려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고요. 그때 느낀 감정을 유령에게 대입해 보려고요. 유령의 외로움, 자신의 음악에 날개를 달아주리라 믿었던 크리스틴에게 배신당했을 때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때의 슬럼프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저를 붙잡아 준 것 역시 노래였어요. 당시 저는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에서 졸업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직접 저를 찾아오셔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별장에도 데려가 주시고, 콩쿠르에도 나갈 수 있게 도와주셨죠. 바로 그 콩쿠르에서 제 오페라 데뷔작의 캐스팅 디렉터를 만난 거예요. 극적이죠? 이후 데뷔 무대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은 다 잊었어요. 학교도 역사상 네 번째로 만장일치 최고점으로 졸업했고요. 노래 때문에 삶을 포기할 뻔했는데, 노래 덕분에 다시 삶을 붙잡게 된 거죠.
오페라 스타로 승승장구해 온 줄만 알았는데, 그런 좌절의 순간이 있었다니 의외네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제 인생은 계속해서 도전과 실패, 그리고 다시 도전으로 이어져 왔어요.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고 활발히 활동할 때 슬럼프가 다시 찾아왔어요. 늘 익숙한 극장에서 익숙한 동료, 오케스트라와 익숙한 레퍼토리로 노래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게 정말 내가 꿈꾸었던 미래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러다 잠깐 한국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팬텀싱어1>이 방송을 시작한 거예요. 방송을 보는 내내 ‘내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팬텀싱어2> 출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원했죠. 매너리즘에 빠진 저 자신을 리프레시하고 싶어서요.
그렇다면 앞으로 또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오페라의 유령> 이후에도 기회가 닿는 한 뮤지컬을 계속하고 싶어요. 진지하게 뮤지컬배우로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좀 더 먼 미래에는 지휘자나 음악감독이 되고 싶어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고,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보고 싶거든요. 지휘자는 제 어릴 적 꿈이기도 한데, 성악가가 된 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공연을 함께한 정명훈 선생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를 보고 어릴 적 고이고이 접어두었던 꿈이 되살아났어요. 아무래도 저는 한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성격을 타고난 것 같아요. 열아홉의 김주택이 이탈리아로 향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에 마음이 가요. 저의 도전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예요.
세상에는 도전을 즐기는 사람보다는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사람이 더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저는 후배들에게 생각만 하지 말고 시도하라는 말을 자주 해요. 생각만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도하면 실패하더라도 경험이 남죠. 그 경험이 쌓여서 실력이 되는 거고요. 가끔 후배에게 어떤 조언이나 제안을 했을 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라고 대답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참 안타까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는 사람은 막상 그 기회가 눈앞에 다가와도 실력이 부족해서 잡지 못해요. 성공이냐 실패냐에 연연하지 않고 경험을 쌓는 일 자체가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잡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러니 지금껏 생각만 했던 일이 있다면 당장 시도해 보세요. 나무를 넘어트리려면 10번 찍어야 해요. 생각만 10번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2호 2023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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