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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희망으로 한 걸음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이혜경 [No.222]

글 |최영현 사진 |이배희 2023-04-05 1,375

희망으로 한 걸음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이혜경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이하 <호프>)은 거장의 미발표 원고를 지키느라 자신의 인생을 지키지 못했던 호프가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호프>에 뮤지컬배우 이혜경이 새로운 호프로 합류한다. 무대 위에서 다양한 인물의 인생을 그려온 이혜경이 만난 호프는 어떤 모습일까.

 

 

내게 돌아가는 길

 

이번에 처음 <호프>에 참여하게 됐어요. 혹시 이전에 작품을 본 적이 있나요?
아쉽게도 직접 공연을 보지 못했어요. 평소 친하게 지내는 (김)선영 배우가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그때 맡은 역할이 노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그러다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다음에 알아보니 너무 유명한 작품이더라고요. 게다가 평은 얼마나 좋은지. 작품에 대해 물어본 사람마다 좋은 작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는 걸까 싶어서 궁금증도 생기고 기대감도 차오르고 그랬죠. 

 

낯선 작품이라 출연을 망설였을 법도 한데 이 작품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뭐예요?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땐 조금 놀랐어요. 2018년 <오! 캐롤> 이후에 공백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호프> 제작사인 알앤디웍스 오훈식 대표가 같이 작품을 하자고 하길래 오히려 제가 물어봤어요. 어떻게 저를 캐스팅할 생각을 했냐고요. 그랬더니 항상 호프 역에 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그 말이 고마워서 출연을 결정했죠. 오훈식 대표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고요.

 

작품의 대본을 읽고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나요? 
솔직히 처음 대본을 볼 때는 “어? 이게 뭐지?” 싶은 장면이 좀 있었어요. 극 중에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 장면이 어떻게 구현될지 감이 잘 안 왔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대본을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던 게 연습하면서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호프>가 어떤 작품인지 알게 됐어요. 이 작품은 혼자 연습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에요. 배우 간의 호흡이 정말 중요해요. 잘 짜인 대본과 연출 안에서 배우들이 유기적으로 호흡을 주고받아야 해요. 감정적인 호흡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호흡까지도요. 말하자면 <호프>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기하는 게 중요한 작품이에요.

 

극 중 현재 호프의 나이가 78세예요. 이 나이대의 역할을 처음 연기하는 거라 고민이 더 많을 것 같아요. 
배우라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어떻게 잘 연기할지 고민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호프가 할머니이기 때문에 조금 더 고민스러웠죠. 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보니 저희 어머니가 딱 78세시더라고요. 그런데 요즘 78세 어르신은 노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보다 젊어 보여요. 꼬부랑 할머니처럼 연기하면 어색하겠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할머니처럼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좀 벗어났어요. 대신 호프가 힘겹게 살아온 인생을 내 몸으로 어떻게 표현할지를 더 고민해야겠더라고요. 제가 관객에게 보여드려야 할 인물은 할머니가 아니라 호프니까요. 그렇지만 노인이니까 행동은 좀 느리고 투박해야 하겠죠. 외형은 분장의 도움을 받으려고요. 선영이가 호프 분장을 하면 다 내려놓게 될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앞서 대본을 읽을 때와 연습할 때 차이가 크다고 이야기했는데, 어떤 면에서 차이를 가장 많이 느꼈나요?
연습 때 많이 울어요. 배우가 인물이나 상황에 감정적으로 푹 빠져버리면 관객은 극 중 인물이 아니라 그냥 배우를 보게 돼요. 그래서 연기할 때는 조금 냉정하게 자기가 맡은 역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호프>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현재 호프가 자신의 과거를 계속 돌아보잖아요. 비참하고 불행했던 과거를 그저 관망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대본을 볼 때는 이만큼 힘들지 않았는데, 막상 연습실에서 후배들이 호프의 과거를 연기하는 걸 보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요. 인생을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상태에서 호프를 보니까 그 인생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지금 가장 큰 숙제는 제 감정에 너무 빠지지 않는 거예요. 이걸 해결해야만 호프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더라고요. 

 

같은 호프 역할을 맡은 김선영 씨나 김지현 씨가 따로 조언해 준 건 없나요? 아무래도 두 배우는 이전에 <호프>를 공연한 경험이 있잖아요.
아휴. 선영이, 지현이도 얼마나 우는데요. 평소에는 사소한 일에도 그렇게 잘 웃다가도 연습만 시작하면 금방 울어요. (웃음) 그래도 작품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감정을 잘 다스리더라고요. 두 사람이 저를 많이 걱정해요. 감정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하지만 결국 저 스스로가 풀어야 할 숙제이니 연습하면서 방법을 잘 찾아보려고요. 대신 다른 부분에서는 두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아요. 이 작품 속에는 배우들이 지켜야 할 약속이 참 많아요. 이를테면 동선 같은 거죠. 그런 부분을 선영이나 지현이가 옆에서 많이 알려줬어요. 덕분에 덜 헤매고 빠르게 작품에 적응했어요.

 

그동안 무대에서 청순가련한 여성부터 억척스러운 여성까지 정말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어요. 그 많은 인물 중에 호프만의 특별함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젊을 때는 언제든지 내 삶을 찾아 나설 수 있어요. 근데 호프는 노인이에요. 실제로 극 중에서 “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라는 대사도 해요. 당장 내일 죽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털어내고 자기만의 시간과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나서요. 앞으로 살아갈 내일을 이야기하고요.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죠. 이 점이 호프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호프>가 호프의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았으면 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호프가 될 수 있거든요. 이 작품을 보는 분들도 그냥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혹시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 중에 호프와 비슷한 역할이 있었나요?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와 비슷한 것 같아요. 알돈자도 밑바닥에서 처참하게 살았던 여자예요. 세상을 비관하며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자신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 둘시네아를 찾아내잖아요. 결국엔 진짜 자신을 찾는다는 점에서 호프와 알돈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열정을 쏟아낸 무대

 

호프의 삶은 원고지를 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혜경의 삶은 뮤지컬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1996년 뮤지컬을 시작했으니까 벌써 몇 년째인가요? 27년째 뮤지컬배우를 하고 있네요. (웃음) 

 

호프에게 원고지는 애증의 대상인데, 이혜경에게도 뮤지컬이 애증의 대상인가요?
애증의 대상은 아니에요. 제가 뮤지컬을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됐다면 뮤지컬과 애증의 관계가 됐을지 몰라요. 그런데 저는 뮤지컬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친구 따라 서울시뮤지컬단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뮤지컬에 입문했거든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뮤지컬배우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처음 무대에 섰을 때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는 거예요! 그렇게 한 작품이 두 작품이 되고, 결국 지금까지 왔어요. 저에게 뮤지컬은 친구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서 친해진 후 오랜 시간 같은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그런 친구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결국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뮤지컬 무대에서 보냈어요. 긴 시간을 뮤지컬배우 이혜경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저의 노력과 열정을 알아봐 주신 분들 덕분이죠. 무대는 나의 의지로 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고, 세워줘야만 설 수 있는 곳이에요. 저는 제가 부족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공연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무대에 쏟아부어요. 저만 그런 열정을 갖고 있어서 무대에 계속 설 수 있는 걸까요? 아니요. 무대에 서는 배우는 다 그래요.  제가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누군가가 나를 무대로 불러주는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긴 시간을 뮤지컬배우로 살 수 있었던 거예요. 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배우로서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어떻게 한결같이 무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나요?
제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웃음) 배우는 작품마다 자신의 한계를 만나요. 그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쏟아붓는 것밖에 없어요. 내가 가진 게 하나면 하나를, 열이면 열을 쏟아내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가진 것을 다 쏟아내고 최선을 다해야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요. 그렇게 배우로서 한계를 넓혀가는 거죠. 무대에서는 ‘내가 이 정도 경력이 있으니까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통하지 않아요. 관객이 보고 있잖아요.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죠.

 

매 순간 그렇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후회가 남을 새가 없겠어요. 
매번 후회해요.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요. (웃음)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제 무대에 만족해 본 적이 없어요. 늘 아쉬워요. 그런 아쉬움 때문에 다음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돼요.

 

그럼 반대로 무대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예요?
커튼콜 때요. 솔직히 무대에 서 있을 땐 행복을 느낄 틈이 없어요.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 저는 이혜경이 아니니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거든요. 배우에게는 반복되는 무대일지 모르지만, 관객에게는 항상 첫 무대예요. 그러니까 배우는 처음인 것처럼 연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긴장하고 내가 연기할 인물에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요. 대신 나를 온전히 무대에 다 쏟아낸 후 관객과 함께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호프>를 통해서도 그런 행복을 맛볼 수 있길 바라요.  

 

<호프>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요?
관객뿐만 아니라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원고지 K가 호프에게 이런 말을 해요. “넌 수고했다. 넌 충분하다. 넌 살아냈다. 늦지 않았다.” 요즘 연습할 때 이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아요. 호프만큼은 아니지만 저의 삶도 평탄치 않았거든요. 그 시기를 겪고 지금까지 온 저에게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여태 살아온 시간은 아주 힘들었지만, 잘했어. 넌 그걸 살아냈어. 그렇게요. 저뿐만이 아니라 힘든 시간을 살아낸 모든 사람에게 잘 살아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혜경이란 책의 마지막에 어떤 문장이 남았으면 좋겠어요?
앞의 대답과 비슷한데요. 잘 살아냈다!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태어났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고요. 대충대충 시간을 보내지 말고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를 기대하면서 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것. 불평불만이 아니라 감사의 말을 한마디 더 하는 것. 그게 잘 사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하루, 일주일, 1년, 10년을 살면 내가 마지막에 눈을 감을 때 잘 살았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고, 또 <호프>를 잘 해내고, 그런 나에게 “잘 살아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2호 2023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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