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래지지 않게
<광염 소나타> 김경수
<광염 소나타>는 음악적 영감을 갈구하는 작곡가 J가 남긴 일기장을 그의 친구 S가 읽어나가며 J에게 벌어진 일을 무대 위에 펼쳐내는 형식의 작품이다. 김경수 역시 다시 한번 <광염 소나타> 무대에 오르기 위해 오래된 일기장 안에 잠들어 있던 S를 6년 만에 끄집어냈다. S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6년 전 자신의 노력이 빛바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다시 그 자리에
지난 1월 <랭보>를 마무리하고 <광염 소나타>로 돌아오기까지 약 세 달간 휴식기를 가졌어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나요?
<광염 소나타> 연습 전까지 한 달 정도 스케줄이 하나도 없었어요. 바로 하와이로 떠났죠. 3주간 하와이에서 머물렀는데, 언제 또 이렇게 쉴 수 있겠냐는 생각에 최대한 저 자신에게 관대하게 굴었어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웃음) 공연을 하고 있을 때는 컨디션 조절에 신경 써야 하니까 뭐든 절제했거든요. 오랜만에 맞이한 휴식인 만큼 하와이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요. 여행지에서는 보통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편인데, 이번에는 일부러 액티비티 체험에도 도전했어요. 그동안 활동적인 취미는 저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바다 수영도 하고 흙먼지 뒤집어써 가면서 운전도 해보니 얼마나 재미있던지! 저와 안 맞는 게 아니라, 도전해 보지 않아서 몰랐던 거였어요. 그래서 이번 휴식기는 저도 몰랐던 저를 발견하는, 여러모로 리프레시 되는 시간이었어요.
2017년 트라이아웃 공연 이후 6년 만에 다시 <광염 소나타> 무대에 섰어요. 6년 전처럼 이번에도 친구 J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는 천재 작곡가 S를 연기하죠. 작품과 재회한 소감이 어때요?
사실 <광염 소나타>는 다시 출연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트라이아웃 공연에 출연한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나기도 했고, 그 사이에 S가 어떤 인물인지 잊었을까 봐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제작사에서 2017년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같이 공연을 해보자고 제안해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죠. 트라이아웃 공연을 준비할 때는 작품의 기본적인 틀을 만드는 작업이 중요하다 보니 디테일한 부분을 채우는 시간이 부족했어요. 공연 기간이 짧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이번 시즌에는 어떻게 하면 그때의 아쉬움을 보완하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트라이아웃 공연 당시의 대본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들었어요.
창작 과정에서 모두가 치열하게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애정이 클 수밖에요. 제가 출연한 모든 작품이 소중하지만, 특히 <광염 소나타>처럼 시작 단계부터 함께 만들어간 작품은 그 작품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소중해요. 그래서 제 작업실에는 유물 수준의 자료들이 많아요. 그때의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공연 관련 자료를 버리지 않고 전부 가지고 있거든요. 가끔씩 예전 대본을 들춰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공연을 준비했던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요.
6년 전의 김경수와 지금의 김경수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겠죠. S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나요?
시간이 흐르면서 저 자신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S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변함이 없어요. 사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S를 잘 표현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봤는데, 그냥 제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S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드리자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이번 공연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처음 <광염 소나타>를 만났을 당시에는 정말 제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인물을 만들었거든요. S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치열하게 연구했죠. 그래서 이번 시즌 연습을 할 때도 예전 대본을 펴놓고, 그때의 제가 적어둔 메모들을 보면서 ‘내가 S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구나’ 복기했어요. S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2017년의 김경수일 테니까요. 2017년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S를 2023년의 무대로 데려오고 싶었어요.
S는 J의 일기장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요. 연기할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나요?
J의 이야기를 최대한 잘 들으려고 해요. S는 J의 마음의 외침을 제대로 듣지 못해 그를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일기장을 펼치는 순간부터는 글자에 담긴 J의 목소리를 잘 들으려고, J가 느꼈을 감정들을 잘 느끼려고 노력해요. 더 나아가서 함께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야 해요. 단순히 그들이 하는 대사를 잘 듣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떻게 걷는지까지, 제가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건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해요. 그래야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시에 일기장을 통해 시공간을 오가는 S를 잘 표현할 수 있거든요. 중압감이 큰 역할이에요.
S를 연기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요?
피아노 연주. 그것보다 어려운 건 없어요. (웃음) <광염 소나타>는 천재 작곡가의 이야기인 만큼 배우들이 공연 중에 직접 피아노를 연주해요. 그중에서도 S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가장 많아서 정말 피나는 훈련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피아노 앞에 가서 앉고, 공연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바로 피아노를 치고. 제가 배우인지 피아노 연주자인지 알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방심하는 순간 바로 실수를 해서, 연습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밖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매순간 깨닫고 있어요. S의 피아노 연주는 단순한 반주가 아니에요. 일기장에 있는 J의 이야기를 연주하는 거죠. 그래서 피아노 연주를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넘어서, 연주 안에 J의 이야기를 잘 녹여내는 게 제 목표예요.
<광염 소나타>에서 마음 깊이 다가오는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빛바래지지 않게.’ J와 S의 행복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지켜볼 수 있는 장면이에요. ‘빛바래지지 않게’라는 키워드가 S를 존재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S는 J의 음악이 빛바래지지 않도록 J의 마음을 느끼려고 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의 감정들을 찾으려고 하거든요. 개인적으로도 ‘빛바래지지 않게’라는 곡을 정말 좋아해요. 관객분들이 <광염 소나타>를 사랑해 주시는 이유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이 곡처럼 따뜻한 감성을 지닌 뮤지컬 넘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되어주는 곡이죠.
S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작곡가’라고 소개되죠.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천재인 S보다는 그 재능을 갈망하는 J의 마음에 공감하겠죠. 그래서 S가 J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과 경수 씨가 J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 조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S가 J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후회와 죄책감이에요. S는 J가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몰랐고, 행여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S에게 J는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J의 일기장을 통해 그가 느낀 고통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그에게 귀 기울이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죠. 반면에 저는 J를 바라보면서 동질감을 느껴요. 그의 열등감에 공감하거든요. 사실 누구나 열등감을 느끼면서 살아가잖아요. 하지만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든 해내고 싶어서 노력하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을 만나는 순간 열등감을 느끼는 거예요. 저도 제가 ‘잘하는 배우’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종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 잠시 뒤처졌을 뿐이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스스로를 더 믿어주자’라고 생각하고, 열등감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요.
관객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잖아요. 스스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확신을 갖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확신은 없지만, 공연을 하는 순간만큼은 작품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그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니까요. 무대는 저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마음가짐을 지키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어요.
베클렘트Beklemmt. ‘죄다, 압박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자, <광염 소나타>의 모티프가 된 단어죠. 경수 씨는 작품에 임할 때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편인가요?
저를 찾아주시는 관객분들을 위해서라도 공연을 준비할 때는 스스로를 압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해서든 저에게 주어진 역할을 최상의 모습으로 보여드려야 하니까요. 그래야만 관객분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요. 저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공연을 준비할 때는 더더욱 저 자신을 풀어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광염 소나타> 트라이아웃 공연 당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고, 소멸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라고 고충을 털어놨더라고요. 그만큼 스스로를 옥죄면서 공연을 준비했다는 뜻이겠죠?
음… 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웃음) 사실 그 당시에 <광염 소나타> 공연을 준비하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트라이아웃 공연이다 보니 작품을 발전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됐어요. 공연은 며칠 안 남았는데 대본은 아직 수정해 나가야 할 부분이 많고, 마음은 급한데 제대로 해결되는 건 없고. 매일매일 해내야 하는 게 너무 많아서 잠 잘 시간도 없었죠. 그래서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 정말 많이 걱정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그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하하. 제가 좀 과장한 것 같네요. 그렇게 과장해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나 봐요. 사실 초연 작품은 늘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요.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거고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순간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화가, 작가 등 다양한 천재 예술가를 연기했어요. 그들의 삶을 살아보며 가르침을 얻은 부분이 있나요?
S가 J에게 하는 말을 빌리자면, ‘노력하고 멈추지 않는 점’인 것 같아요. 그들은 천재라는 수식어를 얻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멈추지 않았죠. 또,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의외로 열등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나 그들 역시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갔어요. 비록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고요. 천재 예술가라고 불리는 이들에게도 그런 고뇌가 있었다는 사실이 제 가치관에도 많은 영향을 줬어요. 덕분에 지금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내가 나를 믿는다면 미래에는 더 많은 이들이 내게 믿음을 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이들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게 배우의 장점인 것 같아요.
다양한 인물을 통해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참 재미있어요. 아무리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캐릭터일 지라도 결국 그 중심에는 제가 있더라고요. 작품을 준비하며 한 인물과 가까워지는 과정이 사실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던 거죠. 그래서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관객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역시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이죠.
맞아요. 배우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관객분들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요. 그래서 어떤 작품이든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흥미 요소만 있는 작품은 경계하게 되죠. 어떤 작품이 ‘우리 이렇게 살면 어떨까?’ 혹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만 한다면 그 작품은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벌써 15년 넘게 배우의 길을 걷고 있어요. 이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나요?
늘 고민해요. 어떤 배우가 될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요즘 드는 생각은 성공보다는 성장을 향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배우라는 직업에 애정이 있는 만큼, 성장하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무르는 날이 오면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인간으로서도 더 성숙해지고 싶어요. 나이 들어가는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제 꿈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3호 2023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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