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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러시아 발레의 다이아몬드 - 울랴나 로파트키나 [No.87]

글 |김영주 사진 |심주호 2010-12-08 5,830

한 사람의 예술가가 한 장르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순간이 있다. 울랴나 로파트키나가 달빛 같은 조명 아래서 비극적인 백조 여왕의 운명을 정제된 움직임으로 그려낼 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고한 목선에서 시작해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이어지는 라인은 깃털처럼 부드러우면서 칼날만큼 명확해서 어떤 아쉬움도, 다른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제아무리 황금 같은 수식이라도 그녀의 춤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로파트키나가 아무리 지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의 말이 그녀의 춤만큼 위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살아있는 전설인 발레리나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 고양아람누리극장의 지하 연습실에서 만난 로파트키나는 다음 날 공연을 위한 리허설을 끝낸 직후였지만 지친 기색 없이 차분하고 침착했다.

 

 

부산에서부터 고양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지냈고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부산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백조의 호수>를 먼저 봤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 극장 로비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날 처음 발레를 본 관객들이 굉장히 흥분해서 기뻐하더군요.
(가슴에 손을 모으고) 고마워요. 한국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방문하는 건데, 90년대에도 한 번 왔죠.(마린스키 발레단은 1992년과 2004년에 내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이번에 와서 여러 곳을 보면서 한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한 모습, 현대적인 건물들에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991년도에 마린스키에 입단했는데 소비에트 말기였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그때는 어떻게 지냈고 지금은 무엇이 바뀌었는지요?
발레스쿨을 마치자마자 마린스키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매우 행복했어요. 전설적인 무용수들의 무대를 보고 자랐는데 내가 바로 그 무대에 서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매우 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 모두 우리 극장이 자랑하는 클래식 레퍼토리였습니다. <레이몬다>, <지젤>, <백조의 호수>, <라 바야데르>, <사랑의 전설>,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작품들이지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 소비에트 시대에는 무대에 올릴 수 없었던 작품들도 공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서방으로 망명했던 안무가들의 작품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전 세계 관객들이 사랑하는 마린스키 극장의 러시아 발레 작품들이 여전히 그대로 보전되고 있습니다. 물론 마린스키 발레단에서도 늘 새로운 작품들을 시도하고 있고, 나 또한 무용수로서, 배우로서 새로운 작품,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해온 작품들, 아마도 <백조의 호수>가 내가 가장 많이 공연을 한 작품일 텐데, 그 작품 안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십년 후에도 내가 계속 춤을 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발레 안에서 무엇이든 끝없이 시도하고 싶고, 멈추지 않고 춤추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것이겠군요. 최근에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라트만스키가 안무한 신작 <안나 카레니나>를 공연했는데, 현존하는 발레리나 중에서 가장 완벽한 ‘백조’의 이미지를 가진 무용수로서 인간 여자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동화고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문학의 전설적인 고전 작품 중 하나니까요. <안나 카레니나>에는 매우 러시아적인 복합성이 담겨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춤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이지요. 백조의 몸짓을 포즈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클래식 발레의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안나 카레니나>는 완전히 다른 작품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관객들에게 보이는 동작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아내야하는 감정의 층위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발레는 다른 장르에 비해서 의미를 전달하기가 더 까다로운 예술이니까요.


당신은 가장 음악성이 뛰어난 프리마 발레리나로 손꼽히는데요. 가장 좋아하는 발레 음악이나 작곡가는 누구입니까?
클래식 발레 음악 중에 고른다면 첫 번째는 물론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입니다.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좋아해요. 멘델스존이나 드보르작,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용한 모던 발레 작품들도 아주 좋아합니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바흐의 음악으로 안무한 발레 작품을 춤춰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흐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당신과 바흐는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예전에 예프게니 키신이 내한을 했을 때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주했는데, 발레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차이코프스키나 프로코피예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곡가가 쓴 발레 음악은 듣기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무용수로서 그 수준이 아닌 음악에도 춤을 춰야 할 때가 있을 텐데 좋아하기 힘든 곡에 맞춰 춤을 춰야 한다면 어떻게 하나요?  
음, 만약에 음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역할에 집중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좋지 않은 것보다는 좋은 것을 생각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차있다고 생각하면서요.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매우 힘들겠지만 내가 춤추는 작품의 다른 재미있는 점, 좋은 요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아니스트와 발레리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요. 예프게니 키신과 비교한다면, 그는 음악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환상적으로 연주할 수 있고 연주곡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무용수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음악이 마음에 안 든다면 무언가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겨울, 밴쿠버 동계 올림픽의 폐막식에서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소개하기 위해 축하 공연을 하셨는데요. 그 무대에 선 것은 당신에게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딱 3분간의 공연이었는데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무대는 광활하게 느껴질만큼 넓었고, 관객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극장과 비교한다면 올림픽 경기장은 마치 우주와 같았습니다. 수많은 관객들이 별처럼 멀리서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고, 나 자신은 아주 작은 바늘처럼 느껴졌어요. 관객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보는 이들과의 소통이 어려웠습니다. 보통의 경우에 춤을 출 때는 관객들의 느낌이 내게도 전달되기 마련인데, 거기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래서 혼자 생각했습니다. 나의 춤에 집중하자,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쁘게 춤추는 것이라고.

 

많은 전설적인 무용수들과 마찬가지로 바가노바 발레 학교 출신입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가노바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이 중요하지요. 사실 결정적인 것은 누구에게 배웠냐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발레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는 사람인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삶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가르쳐주는 사람인지도 중요해요. 이 모든 것은 결국 삶을 위한 일이니까요. 선생님이 누구냐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공연은 평범한 발레 컴퍼니는 물론이고 다른 세계 정상급 단체들과 비교해도 차이가 날 만큼 완벽하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정도 수준의 발레단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드뭅니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 영국 로열 발레단,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볼쇼이 발레단과 같은 유럽과 미국의 몇몇 발레단들만이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린스키도 그중 하나입니다. 우리 발레단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주로 클래식 발레를 공연하기 때문입니다. 클래식 발레는 하나의 시험과 같습니다. <백조의 호수>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작품을 춤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죠. 왜냐하면 클래식 발레는 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감상의 아름다움과 춤추는 사람이 갖춰야 하는 기술적 아름다움을 함께 요구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모던 발레는 꼭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모던 발레를 출 때는 자유로운 몸의 움직임과 표현이 중요하죠. 클래식과 모던 발레는 서로 다른 원칙에 따라 동작이 구성된다고 봐야 합니다. 모던 발레에서는 몸의 강한 움직임을 중시하지만, 클래식에서는 강인함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아름답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측면까지 함께 강조합니다. 마린스키 발레단이 훌륭한 이유는 우리와 바가노바 발레 학교가 매우 오랫동안 클래식 발레의 기초를 연구하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극장과 학교는 2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발레에서 세계적으로 드문 매우 유서 깊은 역사고 전통이죠. 한국에도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훌륭하게 자리 잡은 전통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발레에 매우 훌륭한 기반이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춤에도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 탈리오니와 안나 파블로바 같은 전설적인 발레리나와 비교해보면, 오늘날의 무용수들에게는 앞선 시대의 선배들에 비해 더 많은 과제가 주어지고, 그래서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선배들은 모던 발레나 컨템포러리 댄스까지 배울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비교하기 매우 힘든 부분이죠. 그리고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해요. 왜냐하면 발레를 하는 무용수와 아티스트들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팔과 다리,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무대에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훈련하고 배워야만 해요. 이처럼 근본적인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직업이고 삶이지요.

 

발레를 통해 당신의 삶이 얻은 것, 발레가 당신에게 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발레 덕분에 얻은 것?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발레리나가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이 음악을 움직임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매우 강렬한 경험을 하고 있고,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음악을 통해서, 동작을 통해서 오직 발레로만 관객에게 전달 가능한 어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서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삶과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방식이지요. 음악과 동작을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을 전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하나의 방식입니다.


발레를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감정의 흐름.`


발레에 얽힌 당신의 첫 번째 경험,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 집에 사진집이 있었는데 어떤 발레리노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처음 그 책을 본 건 두 살인가 세 살 때였던 것 같은데, 그 사진을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원래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어떻게 하면 사진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레리노를 그릴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지요.

 

그때 이렇게 위대한 발레리나가 될 것을 예감했습니까?
전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짧은 인터뷰를 마친 이튿날, 그녀는 자신을 살아있는 전설로 만들어준 작품 <백조의 호수>를 춤추기 위해 6년 만에 한국 관객 앞에 섰다. 불과 24시간 전,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던 인터뷰이-표정 변화는 별로 없고, 깊은 연녹색 눈동자에 담긴 진지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30대 후반의 여인과 스물네 명의 백조들을 거느린 순백의 여왕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기분 좋은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무대 위에서 로파트키나는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상(理想)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존재함으로써 지상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예술가였다. 영속될 수 없기에 더 소중한 그 순간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다시 오기를 바란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7호 2010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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