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뮤지컬을 볼지 고민하다가 궁금증을 자극하는 제목에 눈길이 간 적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여기, 제목만으로도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섯 작품을 모았다. 여섯 개의 제목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자.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한 독재자의 대역 배우로 활동했던 노인 네불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주체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회 안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쇼맨’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했다. 좁게는 자신의 일대기를 쇼로 표현하는 네불라를, 넓게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하루하루 연기하며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뜻하는 제목이다. 그러나 ‘쇼맨’이라는 제목만 보면 화려하고 밝은 작품일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공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부제를 붙였다. 기획 단계에서 부제가 길다는 의견이 있어 줄이려고 해보았으나, ‘어느 독재자’나 ‘네 번째’처럼 일부 단어를 삭제하자 부제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도 흐려져 결국 지금의 제목을 유지하기로 했다.
“초연 개막 전,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쇼맨>이라는 작품을 준비한다고 하면 대개 영화 <위대한 쇼맨>을 각색한 작품인 줄 알더라고요. OST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올해는 작품의 인지도가 늘어나서 별개의 작품으로 인식되면 좋겠습니다.” _한정석 작가
2019년 초연 이후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은 <스웨그에이지 외쳐,조선!>은 재치 있는 아이디어가 더해진 퓨전 사극이다. 서울예술대학교의 학생 공연으로 시작한 이 작품의 원제는 <외쳐,조선!>이었다. 계급 사회 아래서 자유를 외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은유하는 동시에, 당시 상용됐던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표현에 대한 한탄을 담은 것이다. 이후 정식 공연으로 개발하는 단계에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될 만한 제목을 찾았다. <태산이 높다 하되><시조의 나라><쇼 미 더 엽전><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조선> 등의 후보가 있었으나 초연을 이끈 우진하 연출가가 ‘스웨그에이지’라는 단어를 떠올려 지금의 제목이 완성됐다.
“사실 제목 속 ‘외쳐’라는 단어는 과거 유행했던 게임 속 밈에서 착안한 것이기도 해요. 게임에서 어떤 미션을 해결한 후 성취감을 표현하는 구호가 ‘외쳐, OO’이라는 형태의 밈으로 굳어진 거였는데, 그 구호가 작품이 지향하는 바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 제목에 활용했어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밝히는 거라 제작진분들도 전혀 모르는 비밀이랍니다.” _박찬민 작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창작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한국 전쟁 중 무인도에 표류한 여섯 군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쟁과 군인이라는 다소 딱딱한 소재를 다루는 이 작품이 어떻게 이토록 감성적인 제목을 얻게 되었을까?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시대적 배경과 반대되는 느낌의 제목으로 작품의 따뜻한 면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한정석 작가는 극 중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뮤지컬 넘버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타이틀 송으로 삼고, 이를 작품의 제목으로 연결했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극 중 영범이 무인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세운 작전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착안해 <작전명: 여신님이 보고 계셔> <여신님이 보고 계셔 대작전> 등 제목에 ‘작전’을 붙인 버전도 고려했단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이 없어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최종적으로 채택됐다.
“초연 당시,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제목의 호불호가 갈리더라고요. 그래도 공연 관람 후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얘기해 주시는 분도 많아서, 다들 제목에 익숙해지실 거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10주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호불호가 갈리는 것을 보니… ‘아직 멀었구나’ 싶습니다.” _한정석 작가
<전설의 리틀 농구단>은 제목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OO구청 리틀 야구단 모집’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게 된 박해림 작가의 머릿속에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단원 모집이 잘 안 되나 보다, 아무래도 저 나이대에는 다들 공부를 하고 있겠지? 그럼 저 야구단엔 누가 갈까?’ 이 질문들은 박해림 작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고, 또 다른 질문의 시작이 됐다. ‘실내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농구단이라고 바꿔보자. 남자애들은 농구를 왜 좋아할까? 키가 작거나, 몸이 허약한 아이들도 농구단에 들어갈까? 우리의 주인공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까?’ 질문을 거듭하면서 쌓아간 이야기에 박해림 작가 친구의 사연이 더해지고, 당시의 사회 상황이 덧붙여지면서 <전설의 리틀 농구단>이 완성됐다.
“중고등학교 남자애들이 자신들의 농구 팀을 뭐라고 부를지 고민하다가 허세 가득한 이름을 지어보았어요. 사실 저는 제목을 잘 못 짓는 편이에요. 이야기를 쓰는 데 집중하느라 제목은 가제만 먼저 지어 두곤 하는데, 결국 그게 본제목이 될 때가 많아요. <전설의 리틀 농구단>도 그런 경우였어요.” _박해림 작가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제목을 짓는 데는 표상아 작가의 친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작품 기획 초기에 제목을 고민하던 표상아 작가에게 친구가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라고 해.” 그 조언 덕에 제목의 틀은 잡혔지만, 바로 다음 고민이 이어졌다. ‘까맣게 타버린 저택’에 어떤 이름을 붙여줄 것인가! 그의 친구는 또 한 번 무심한 한 마디를 던졌다. “쿠로이라고 해. 까맣다는 뜻의 일본어로.” 그렇게 순식간에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흥미로운 제목이 탄생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이 뒤따라왔다. 제목을 듣는 사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래서 누가 살고 있는데?”라는 질문을 한 것이다. 공연을 올리기 전에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쿠로이는 안 살아요!”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해야 했지만, ‘쿠로이 저택’을 방문하는 관객이 많아지면서 같은 질문을 받는 날이 확연히 줄었다. 표상아 작가는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날이 언젠간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을 품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쿠로이 저택처럼 검게 타버린 자신만의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옥희처럼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는 꿈이 잠들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제목은 곧 우리가 잊고 살았던 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해요.” _표상아 작가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의 본제목은 처음부터 한 치의 고민도 없이 ‘HOPE’였다. 주인공의 이름이자 영어로 ‘희망’을 뜻하는 단어다. 아무도 읽지 않은 ‘호프’라는 책을 관객과 함께 읽고 싶었고, 그 이야기의 끝에 희망이 있다는 의미를 제목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제인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은 강남 작가가 대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붙인 것이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호프의 삶과 세계적인 작품이라 칭송받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원고. 이 둘을 통해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무언가에 대해 판단하는 게 맞는 일인지’ 질문해 보고 싶었던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게 도와준 문장이다. 이 부제를 붙인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호프집’이라는 복병 때문이다. 맥줏집을 뜻하는 ‘호프’와 제목이 혼동될까 걱정했던 강남 작가는 한글이 아닌 영어로 제목을 표기하고, 대본에만 적혀 있었던 부제를 제목에 병기했다. 호프집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오해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호프> 외에 다른 제목을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이런 생각은 해봤어요. ‘호프의 품에서 벗어난 원고 K가 출간되면 제목이 뭘까? 그걸 공연 제목으로 해도 좋겠다.’ K에는 어떤 제목이 붙여질까요?” _강남 작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5호 2023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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