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감이 될만한 삶을 살았던 인물의 목소리를 무대에 복원하기 위해 모인 창작 집단 ‘목소리 프로젝트’가 신작을 선보인다. 2018년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그린 <태일>, 2019년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삶을 그린 <섬: 1933~2019>에 이어 4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작품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을 조명한 <백인당 태영>. 목소리 프로젝트의 전작을 모두 함께한 배우 백은혜가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는 이태영의 일대기를 연기한다. 새로운 길을 만들며 걸었던 사람 이태영의 발자취를 뒤쫓으며 백은혜는 어떤 풍경을 마주했을까?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
목소리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세 번째 작품이에요. 이제는 제4의 멤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목소리 프로젝트의 작품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이유가 뭔가요?
목소리 프로젝트는 공연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의 목소리를 전달하잖아요. 그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언제든 함께하고 싶어요. <태일>과 <섬: 1933~2019>에 출연한 뒤 다음 작품에는 안 불러주시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또 한 번 출연 제안을 주셔서 감사했죠. 목소리 프로젝트의 박소영 연출님, 이선영 작곡가님, 장우성 작가님과는 앞선 두 작품을 함께하며 사적으로도 친해져 ‘아’ 하면 ‘어’ 하는 사이가 됐어요. 그래서 <백인당 태영>을 연습하는 지금은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들 만큼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요.
신작의 주인공이 이태영 변호사라는 얘기를 듣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뭐예요?
“오~ 흥미롭네요!” 하고 맞장구를 친 다음 돌아서서 이태영 변호사가 누구인지 폭풍 검색을 했죠. (웃음) 알고 보니 정말 대단한 분이더라고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으로서 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세우고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는 등 여권 신장을 위해 힘쓴 분이에요. 그런데도 저는 그 이름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여성이 법조인이 되기 힘들었던 시절에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한 적조차 없었거든요.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이 이 작품을 통해 이태영 선생님에 대해 처음 알게 될 텐데, 그만큼 제가 그분의 목소리를 잘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이태영 변호사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 특히 마음에 와닿은 장면은 무엇인가요?
13세의 태영이 빨래하는 올케언니를 바라보며 먹먹함을 느끼는 장면이요.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빼앗기고 시집 식구 시중을 들어야 하는 올케언니를 보며 태영은 부당함을 느껴요. 물론 그보다 어릴 때부터 딸과 아들을 차별 대우하는 사회에 의문을 품기는 하지만, 올케언니를 지켜보며 그 의문이 깊어지고 여성을 차별하는 인습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하죠. 실제로 이태영 선생님이 쓴 책에 가사에 시달리면서도 가정 안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올케언니를 보며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화여전 가사과에 지망했다는 내용이 나와요. 저는 이 대목에서 <태일>의 주인공 태일이 자기보다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는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목소리 프로젝트 시리즈의 주인공은 모두 자기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일인 다역을 맡았던 <태일>과 <섬: 1933~2019>에서는 역할이 바뀔 때마다 그 역할에 재빨리 몰입하여 연기하는 게 숙제였다고 얘기한 바 있죠. 그렇다면 <백인당 태영>의 태영을 연기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숙제는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 태영이 품었던 의문이 커져 변호사가 되고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하려면 수없이 힘든 싸움을 해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태영 선생님이 굉장히 많은 업적을 남기셨고, 공연은 그 생애를 100분으로 압축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언뜻 보면 탄탄대로를 걸어온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태영을 연기하는 저부터 선생님의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지난 주말에도 선생님의 일대기를 담은 소책자를 다시 읽으면서 연습하는 동안 내가 너무 쉽게 지나친 순간은 없는지 되짚어 봤어요.
실존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대본 외에도 참고한 자료가 많나 봐요.
지금은 절판된 오래된 책들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어요. 이태영 선생님이 직접 쓴 책도 읽고, 돌아가신 후에 주변 사람들이 이태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쓴 글도 읽었죠. 선생님의 생전 인터뷰 영상도 찾아봤는데, 그 영상만 봐도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알겠더라고요. 인터뷰 당시에 이미 상당히 연세가 있으셨는데도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어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막힘없이 정확하게 전달하는 말솜씨에도 감탄했고요. 그 인터뷰 영상을 참고해서 연기 톤을 잡았어요. 선생님의 눈빛, 목소리, 제스처에서 나오는 강렬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어요.
<백인당 태영>은 태영을 연기하는 배우와 그 외 인물을 일인 다역으로 연기하는 배우, 단둘이 이끌어가는 이인극이에요. 배우들의 합이 중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연습하고 있어요?
연출님이 연습 초반에 이렇게 선언하셨어요. “우리 너무 숨 가쁘게 연습하지 말자.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갖자!” 그런데 현실은 연습이 끝나고 연출님이 퇴근한 뒤에도 집에 가는 배우가 아무도 없어요. 다들 자발적으로 남아서 추가 연습을 해요. (웃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단 대사를 외우는 것부터 난관이에요. 긴 세월에 걸친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전달하려면 대본을 완전히 숙달하고 있어야 하는데, 대본에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오고 선생님이 평안북도 출신이라 북한 사투리도 써야 하거든요. 러닝타임이 짧고 대본이 얇아서 금방 외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속았어요. (웃음) 하지만 덕분에 배우들끼리 따로 대사를 외우고 맞춰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돈독한 사이가 됐죠. 여럿이서 이렇게 한마음으로 작품을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요.
가고 싶은 길
<태일>과 마찬가지로 <백인당 태영>에도 배우가 극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어요.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흐름을 끊고 배우 본인으로 나서는 게 어색하지는 않나요?
목소리 프로젝트의 작품은 애초에 호흡이 빠르고 한 장면에만 깊이 빠져 있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무대에서 극 중 인물과 저 자신을 오가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다만 제가 말을 청산유수로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관객분들은 듣기 힘들지도 몰라요. (웃음) 목소리 프로젝트의 목표는 공연을 본 관객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공연 중에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고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하는 시도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태일>에서는 ‘원동력’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매일 공연 때마다 그날 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주제가 어려워서 그때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이번에는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증명한 이태영 변호사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꾸준함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들었어요. 평소 관심 있는 주제와 관련해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행동이 있나요?
부끄럽게도 제가 꾸준히 하는 게 참 없더라고요. 그래도 한 가지를 꼽는다면, 환경을 생각해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에요. 음식을 주문할 때 따로 챙겨 간 텀블러나 도시락 통에 담아달라고 하고, 비닐봉지도 가능한 한 안 받아요. 사실 남들 앞에서 이런 얘길 하는 건 쑥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저라고 늘 환경을 위한 선택만 하는 건 아니고 가끔은 일회용품을 쓰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최근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완벽할 수 없다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결심한 바를 실천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더라도 계속하는 데 의의를 두려고요. 때로 결심을 지키기 못해도 괜찮아요. 그때마다 다시 결심하고 실천하면 되니까요.
<백인당 태영>에는 태영에게 가르침을 주고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들이 등장하죠. 은혜 씨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인가요?
저희 어머니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일이에요. 저는 원래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였는데, 고학년이 되자 저보다 키도 크고 잘 달리는 친구들이 생기더라고요. 달리기 시합에 나가면 제가 질 것 같아서 아예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그때 어머니가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은혜야, 엄마가 옆에서 같이 뛰어줄게. 엄마 보고 따라와.” 그러고는 정말로 출발선부터 골인 지점까지 코스 라인 밖에서 저와 같이 뛰어주셨어요.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요. 이 에피소드만 들어도 짐작이 가시겠지만, 저희 어머니는 굉장히 대담하고 정신력이 강한 분이세요. 그러면서도 사랑이 많고 긍정적이시죠.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본받고 싶어져요.
<백인당 태영>은 일곱 살 태영이 웅변대회에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잖아요. 은혜 씨도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어요?
어릴 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보다 방에서 혼자 흥얼거리는 걸 더 좋아했어요. 또래보다 사춘기가 일찍 찾아왔거든요. 초등학생 때부터 방문을 닫고 들어가서 라디오를 듣고 사연을 적어 보내며 시간을 보냈죠. (웃음) 그렇다고 무대를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어린아이를 무대에 세우면 잘 보이려고 애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긴장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가 있잖아요.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저는 나서서 하지는 않지만 시키면 또 빼지 않는 스타일이었대요. “아이, 뭐 이런 걸 시켜. 그래서 원하는 게 이거예요?”라는 느낌으로. (웃음)
지금은 어때요? 배우 생활이 적성에 잘 맞나요?
지금도 MBTI 성격 유형 검사를 하면 E(외향성)와 I(내향성)가 거의 반반으로 나와요. 그게 배우 생활과 잘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시간도 좋아하고, 혼자 생각에 빠져 보내는 시간도 좋아하거든요. 꾸준히 하는 일이 드문 제가 제일 꾸준히 하고 있는 게 바로 연기예요.
배우 생활을 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던 시기는 없나요?
30대 초반에 매체에 진출하면서 살짝 휘청했어요. 무대에서는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어떤 역할이든 연기할 수 있지만, 매체에서는 현실적으로 저와 비슷한 나이대와 이미지의 배역이 주어지잖아요. 그때 실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맡을 수 없는 배역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하지만 다행히 좋은 작품들을 만나서 의욕을 되찾았죠.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휘청거릴 일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제가 참 약하고 경험이 부족했어요. 요즘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괜찮아, 별일 아니야”라고 말하며 다독여 줘요.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제가 예민해지면 함께하는 팀 전체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저뿐 아니라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감정을 잘 다스리려고 해요.
2019년 <더뮤지컬>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는 주변에서 인도해 주는 대로 걸어왔다면 이제는 나 스스로 어디로 갈지를 잘 판단해서 걸어야겠다.”라고 얘기한 바 있어요. 지난 4년여의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그때의 다짐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답은 지금도 찾는 중이에요. 여전히 제 앞가림을 다 못 하는 저를 이끌어주는 고마운 손길이 많지만 ‘배우로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만큼은 내려놓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목소리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이 작업이 저에겐 큰 의미가 있어요. 목소리 프로젝트의 작품들은 직관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하잖아요. 배우로서 관객에게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게 많아요. 그러니 여러분도 극장에 와서 이태영의 목소리를 들어보시길 바라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5호 2023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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