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준비된 배우가 되고 싶다
돌이켜보면 옥주현은 늘 싸우고 있었다. 솔직한 성격에서 비롯되는 오해와 편견, 새로운 세계에서의 힘든 적응 과정, 평생 동안 신경 쓰며 노력해야 하는 체형까지, 그의 성공기는 그대로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그의 엘파바가 뭉클한 감동을 줬다면 아마 이런 옥주현 개인의 과거와 겹쳐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파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옥주현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투쟁의 과정을 거쳐 그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아듀, 엘파바
‘옥파바’의 퇴장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실감이 나요?
안 나요. 뭔가 아쉬워요. (정)선아랑 저랑 커튼콜 전에 ‘짜증 나, 너 때문에’ 이러면서 장난칠 때가 있어요. 매번 간신히 눈물 참아가면서 반년간 해왔는데 마지막 공연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노래도 망치면 안 되고 그걸 관객들에게 들켜도 안 되는데 상대 배우가 그런 모습을 비치면 울컥하거든요. 그래서 더 애틋하고 짠한 것 같아요. 자제해야죠.
6개월 넘게 한 작품으로 달려왔어요. 확실히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감상이 남겠죠.
데뷔작(<아이다>)부터 8개월 동안 무대에 서서 그런지, 사실 6개월이 그리 길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래도 ‘막공’이 다가오니까 솔직히 겁이 나요. ‘옥주현 가고 새로운 엘파바 온다’ 이런 기사가 나오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끝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아직 안 본 분들, 회전문 관객들 모두에게 베스트 공연을 보여드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남은 기간은 제겐 큰 숙제에요. <아이다> 재연 때 탈이 나서 무대에 못 올라간 게 트라우마로 남아있거든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 안 좋아질 수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요샌 악몽을 꿔요.
악몽까지?
뒤척이다가 알람을 못 듣고 일어나면 낮 2시인 꿈이에요. 사실 2시여도 시간은 충분한데 소스라치게 놀라요. 깨서 시계를 보면 새벽 4시 반이거나 6시 정도죠. 기사가 나온 이후로
그렇게 계속 숙면을 못 취하고 있어요. 재밌는 건 선아도 저처럼 잠을 설친대요. 안 그럴 것 같은데 부담스러운가봐요. 저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끝까지 무탈하게 해내고 싶어요. 그날따라 특별히 엄청나게 잘하는 걸 기대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업다운이 심하지 않아야 스스로에게도 혼란스럽지 않아요. 그 평균값을 잘 맞추는 게 남은 기간의 과제일 것 같아요.
매일 초록 분장을 하고 지우는 일상이 사라지면 허전하겠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분장을 혼자 하는 배우고, 이 공연도 시작한 지 3주 정도 있다가 직접 하기 시작했어요. 스스로 하는 걸 왜 좋아하는지 아세요? 분장을 하면서 점점 변해가는 나를 보며 내면도 변화하는 걸 느끼거든요. 그 변화가 좋아요. ‘얜 누구야’ 이런 생각이 들어요. 감정을 잡는 데도 좋아요. 목을 푸는 것도 나중에 따로 하는 게 아니라 외모의 변화에 따라서 보이스 컬러를 맞춰가요. 그렇게 엘파바의 색깔을 섬세하게 만들어가는 거죠.
특히 ‘뭔가가 달라졌어’라고 속삭일 때 주현 씨의 엘파바는 뭉클하게 하는 뭔가가 있어요. 이 작품을 통해 뭐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저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요. 아직도 긴장을 많이 하니까요.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을 더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무대에 막상 올라가면 그 배역으로 살게 돼요. 예전에는 공연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사라졌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사고로 공연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죠. 다른 인터뷰에서 말하지 않은, 혼자만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면 뭘 꼽겠어요?
제가 기물 파손을 한 게 몇 건 있어요. ‘디파잉 그래비티’ 때 빗자루 들고 있다가 너무 꽉 쥔 나머지 자루 가운데를 부러뜨린 적도 있어요. 원래 후기를 안 찾아보는데 그런 날은 슬쩍 주변 사람들한테 반응을 물어봐요. 아니나 다를까, <시카고> 때 총 부러뜨린 에피소드까지 다시 나오고 있대요. 그렇게 저의 기물 파손 역사는 또 하나 이어지는 거죠(웃음).
가장 하고 싶어했던 <위키드>였잖아요. 터닝 포인트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뇨, 전 모든 공연이 터닝 포인트인 것 같아요. 제겐 ‘아이돌’, ‘가수’라는 뗄 수 없는 꼬리표가 있잖아요. 물론 부담스러운 요소이기도 한데, 적어도 뮤지컬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저를 더 이상 예전의 옥주현으로 보지 않아요.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되는 색다른 재미부터 시작해 캐릭터가 성공적으로 입혀지면 터닝 포인트가 되는 거겠죠.
엘파바는 주현 씨에게 무엇이었나요.
사람을 날것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존재요. 외로울 수 있는 자아에 대해서 측은하게 바라보는, 그러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존재. 피예로에게도 그런 말을 하잖아요. 다르게 바라보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거라고. 그런 따스함을 배울 수 있는 존재였던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 옥주현
<아이다> 초연 때 언론의 혹평을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모든 게 달라졌죠. 그런데 그런 평가와는 별개로 ‘난 배우로서 성공할 거야’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해요.
전혀요. 그때는 무대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표현하는 건 그냥 ‘열심’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게 아니었죠. 공연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마모’가 되어야 해요. 그건 짧은 시간에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 전체를 보게 되고, 그 의미를 알수록 무서워지죠. 그걸 알아가는 과정에서 성숙해진 것 같아요. 배우로서든, 개인으로서든 성장한 부분이죠.
그래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면 다른 생각이 들 법도 한데요.
그렇게 큰 상을 빨리 받은 것도 사실 부담스러웠어요. 벌써 받으면 안 되는데, 별로 잘하지도 못했는데 받았어. 어떡하나. 그런 고민 끝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무대에서 보답하자’는 결심이 굳어진 것 같아요. 그런 게 저를 더 관리하게 해요. 제 일상을 채우는 모든 스케줄들은 단지 공연만을 위한 거거든요. 공연이 끝난다고 해서 그 패턴을 놓고 싶지 않아요. 발레나 필라테스 같은 것들이 그래요. 결국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도 영향을 미치고 제게 좋은 자극이 되고 있는 건 분명하거든요.
정통 배우도 아니고, 연예인이라는 선입견도 이쪽 세계에 있었을 거예요. 그런 것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식’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죠. 그 방식은 무엇이었나요.
관객 후기를 보지 않는 이유가 그거예요.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반영할까봐요. 좋은 후기는 더 욕심을 내게 하고, 나빴다고 하면 생각이 많아져요.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를 구할 땐 연출가에게 의견을 물어요. 그게 연출가의 몫이기도 하고. 원래 전 학창 시절에는 예습, 복습 안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공연할 때만큼은 천성에 맞지 않게 부지런한 것 같아요. 게을러지지 않는 게 저에겐 최선이었어요.
배우들마다 나름의 장점이 있죠. 감정 표현이나 가창력 같은. 배우 옥주현의 장점은 뭘까요.
저는 가수였으니까 ‘노래를 잘한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에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뮤지컬 배우’니까 음악과 연기 다 잘해야 하는데, 그걸 갖추지 못했던 시기에 제 공연을 봤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해요. 그래서 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분수를 잘 아는 게 장점이 아닐까요.
지난해부터 부쩍 ‘배우 옥주현의 재발견’이라는 반응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하지만 남들의 평가 말고, 스스로 배우가 됐음을 느꼈던 시점이 있었겠죠?
딱 꼬집어서 어떤 순간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해야지’라는 의식을 안 한 순간이 있었어요. 머리로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거죠. 그게 <황태자 루돌프>였어요. (안)재욱 오빠에게 연기 조언을 많이 받으면서 실력이 많이 향상된 것 같아요. ‘마리 베체라’는 확 돋보이는 역할은 아니지만 그 역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루돌프의 행동이 납득이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거기서부터 고민의 차원이 좀 달라진 듯해요. 옆에서 보니까 그냥 ‘그 사람’이 되어서 하는 거더라고요.
이렇게 실력과 인성까지 탄탄하게 겸비해오면서 좋은 배우가 되었는데, 신기하게 ‘안티’는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그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어요. 제가 뭘 해도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 싶어요. 물론 억울한 부분도 있지만, 그것도 철없는 아이돌 때의 내 모습에서 남은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지울 수 없는 거니까요.
알고 보면 체형 관리뿐만 아니라 멘탈 관리까지 철저한 것 같네요.
기술적인 거라든지 외부의 위험 요소는 항상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제 컨디션까지 불안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 요인들을 아예 원천 봉쇄하는 거죠. 대신 그만큼 예민해지는 부분도 있어요. 가령 전 몸에 습도계와 온도계가 내장돼 있는 것 같아요. 그 때문에 기술감독님이 부담스러워하기도 해요. 최적의 환경에서 미세한 차이가 나면 벌써 몸이 알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오면 다들 그렇게 눈치를 보세요. 죄송하죠(웃음).
무대와 하나된 삶
치열한 자기 관리의 기본은 역시 몸이겠죠. 이번에 필라테스 DVD도 오랜만에 냈던데.
저에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수식어들이 있잖아요. ‘원조 아이돌’, ‘다이어트 전문가’ 같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버릴 수가 없어요. 이제는 받아들이면서 함께 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잠깐 요요 현상이 생기면 언론에서 ‘옥주현 다이어트 실패’ 같은 기사를 냈는데, 그땐 정말 싫었어요. 내가 늘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게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공연을 좀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운동을 하게 되고 생활의 일부가 된 거죠.
그래서인지 주현 씨의 책이나 영상물을 보면 다른 연예인들의 것과는 다른 느낌을 받아요. 단순히 수익 사업이 아닌, ‘나 여전히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다’라는 기록 같달까.
말씀하셨듯이 제 책이나 DVD들은 다이어트를 추천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요. 생활 속에서 에너지를 키우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죠. 특히 체력을 많이 쓰는 직업을 갖고 있는 30대의 제가 실생활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같이 건강하면 좋잖아요. 이건 배우 옥주현이 아니라 인간 옥주현으로서 말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살이 찌거나 몸이 안 좋아지거나 여름이 다가올 때만 운동을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라 운동은 집에 있는 밥솥처럼 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발레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작했다죠? 그때 이후로 정말 곧은 태가 살아 있는 역들을 잘 소화해냈죠.
발레를 하면서 느낀 건 이걸 놓지 말아야겠다는 거예요. 뮤지컬 배우에게 발레는 정말 기본인 것 같아요. 바른 자세를 만드는 데 정말 좋아요. 사실 제가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안 좋은 자세였거든요. 그런데 댄버스는 그런 존재가 아니잖아요, 곧은 자세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발레가 없었다면 그걸 표현할 수 없었겠죠.
어느덧 주현 씨도 선배 대열에 들어섰어요. 어떤 선배가 되고 싶은가요?
발레를 배우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겼어요. 외국에서는 춤, 노래, 연기를 두루 갖춘 사람들이 앙상블부터 시작해서 커버나 얼터를 통해서 메인 캐스트가 되는 기회를 잡잖아요. 반면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에서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곪았다면 곪은 부분이고,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뮤지컬을 시작할 때 가수였으니까 노래‘만’ 잘하는 배우였던 거잖아요. 그래서 뮤지컬 배우라면 누구나 갖춰야 하는 덕목, 가령 춤추고 몸을 쓰는 능력을 지금이라도 챙겨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늘 준비돼 있는, 기본이 탄탄한 선배가 되고 싶어요.
이번 공연 마치고 하반기 계획은 어떤가요? 브라질 월드컵은 정말 가나요?
윽, 그거 라디오 방송 갔다가 (이)지훈 오빠가 “전 공연을 계속하니까 못 가는데 옥주현 씨는 갈 수 있겠네요”라고 해서 그냥 “아, 네”라고 한 게 그런 소문이 난 거예요(웃음). 브라질은 전혀 계획 없습니다! 그리고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노래들로 이루어진 기획 앨범이 곧 나와요. 가수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한 곡을 빼곤 전부 뮤지컬 넘버로만 이뤄진 앨범이에요. 그리고 6월에는 일본에서 갈라 콘서트를 할 예정이에요.
제가 본 옥주현은 무대에서든 무대 밖에서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다른 꿈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모르겠어요. 일단 눈앞에 있는 걸 잘하고 싶어요. 전시나 바자회를 통해서 재능 기부도 하고 싶어요. 제 직업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들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8호 2014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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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위키드> 옥주현 [No.128]
글 |송준호 사진 |김수홍 2014-05-26 5,785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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