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러브레터>는 50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은 앤디, 멜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2인극이다. 두 사람이 읽어 내려가는 편지에 담긴 희로애락을 관객이 함께 따라가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박혁권은 글을 사랑하는 모범생 앤디 역을, 유선은 그림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멜리사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공연 개막을 약 2주 정도 앞둔 지금, 이미 각자의 캐릭터에 푹 빠져 있는 두 사람을 대학로의 한 연습실에서 만났다.
두 분 모두 연극 <러브레터>와 첫 만남이죠. 처음 대본을 보고 <러브레터>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나요?
박혁권 출연 제안을 받고 혼자 카페에 앉아서 대본을 읽었는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앤디와 멜리사,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50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에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주는 감동이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유선 2021년에 연극 <마우스피스>에 출연하면서 ‘아, 연극이 이렇게 매력적인 거였지’라는 깨달음을 다시금 얻었어요. 또 좋은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러브레터>를 만났죠. 처음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이야기가 어떤 재미를 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는 두 사람이 주는 감정의 깊이가 놀랍도록 묵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50년의 세월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어려운 작품이지만, 잘 해낸다면 제게 큰 가르침을 줄 것 같다는 도전 의식이 생겨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마우스피스> 공연 당시 연극의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나요?
유선 <마우스피스>는 제가 13년 만에 다시 도전하는 연극이었어요. 오랜만에 하는 공연인데 심지어 두 배우 간의 호흡이 특히 중요한 2인극이다 보니, 연습 과정에는 다른 배우들의 호흡을 따라가기에 바빴죠. 정말 힘든 공연이었지만 끝나고 나니 도전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연을 열심히 준비하고, 무대에 서서 상대 배우, 관객들과 호흡하고, 하루하루 공연에 충실하면서 살아있음을 느꼈어요.
박혁권 배우는 1993년 극단 산울림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러브레터>로 굉장히 오랜만에 무대에 돌아왔죠?
박혁권 거의 20년 만이네요. (웃음) 오랜만에 공연 연습을 하니까 어색하고, 재미있어요. 사실 어릴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연극을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학로에 발길을 끊었었어요. 그러던 중 한 5년 전부터 이제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하는 거다 보니까 의미가 있는 작품을 선택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을 선택하는 게 더 어려워졌어요. 그러던 중 <러브레터> 대본을 받았고, 출연을 결심하게 됐죠.
2인극이지만, 두 인물의 독백으로 구성된 작품이에요. 작품을 잘 표현하기 위해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유선 독백으로 이루어졌기는 하지만, 무대 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감정의 빌드업이 안 돼요. 서로의 말을 듣는 게 정말 중요해요. 사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연기의 기본이지만, 막상 연기를 하다 보면 나의 캐릭터를 채우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편지를 잘 풀어내기 위해 상대방이 읽어 내리는 편지를 잘 듣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박혁권 맞아요. 50년에 걸쳐 앤디와 멜리사에게 벌어지는 일이 편지에 전부 담겨있기 때문에, 내 편지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만큼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게 중요해요. 또, 이번 시즌에는 원작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가져오는 데에 집중했어요. 연습 시작 전 테이블 리딩을 2주 정도 하면서 원작과 번역본, 이번 시즌 대본을 함께 읽으며 두 사람의 편지 속에 담긴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갔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작에 가까운 방향으로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8세부터 노년 시절까지, 여러 나이대를 연기해야 해요. 부담감은 없나요?
유선 있었죠. 도대체 여덟 삶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지 싶었어요. (웃음) 그 나이대를 실제로 표현하려고 하면 연기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외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그 나이대에 맞는 정서를 가져와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박혁권 연극 무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목소리 톤이나 말투, 행동으로 나이대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아도, 편지를 쓸 당시의 인물들의 감정만 깊이 파악해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무대에서는 충분히 관객을 설득할 수 있죠.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편지를 매개로 두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잖아요. 연기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것 같은데요. 극 중 인물과 가장 맞닿아 있다고 느낀 순간이 있다면요.
박혁권 딱 앤디와 멜리사가 처음 편지를 주고받던 나이, 8~9살 즈음이 생각나더라고요. 저도 그때 좋아하는 친구 집 전화번호 알아내서 장난 전화하고 그랬거든요. (웃음) 사실 대본 읽는 내내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나이대의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인간이 살아오면서 느꼈을 감정들이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있거든요. 그 감정과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에요.
유선 저는 멜리사의 외로움과 상처에 많이 공감이 됐어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는 앤디를 보면서 많이 외로웠겠구나, 마음 둘 곳이 없었겠구나 싶었어요. 점차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멜리사의 상황이 안타깝기도 했고요.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에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조금 더 솔직하게, 사랑을 많이 표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연의 주요 소재가 되는 ‘편지’는 아날로그적이면서 여전히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연극도 그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에게 연극 무대란 어떤 존재인가요?
박혁권 무대는 배우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예요. 물론, 공연이 계획대로 잘 흘러간다는 전제하에.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렵지만 공연이 성공적으로 올라가면 무대 위에서 배우가 할 수 있는 몫이 많아지기 때문에, 말 그대로 ‘연기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거라 그런지 너무 겁이 나네요. 긴장돼서 벌벌 떨고 있어요. (웃음)
유선 저는 아직 무대가 너무 두렵고 무서워요. 그러면서도 왜 계속하겠다고 하는 건지 스스로 궁금할 때도 있어요. (웃음) 사실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요. 제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하죠. 극도의 외로움과 공포가 느껴져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무대에 서는 순간 공연에 푹 빠져서 무아지경이 돼요. 공연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게 되는 거죠. 그때의 쾌감이 절 무대에 서게 해요.
두 분이 연기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죠?
박혁권 저희는 2000년에 공연된 학전의 뮤지컬 <모스키토>에서 처음 만났어요. 유선 씨는 배우로 출연했고, 저는 무대감독이었죠.
유선 그때 저는 20대 초반, 대학도 졸업하기 전이었는데, 이렇게 나이가 들고 다시 만나니까 엄청 반갑더라고요. 동네 고향 오빠를 다시 만난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달까요. 그 당시 혁권 오빠는 되게 진중했던 기억이 나요. 하루는 공연 중에 운동화가 벗겨진 적이 있는데, 제가 백스테이지로 돌아와서 걱정하니까 오빠가 암전 중에 슬쩍 가져다주더라고요. 그 모습이 정말 든든했어요.
박혁권 유선이는 되게 씩씩했어요. 그런데 그게 타고나길 씩씩한 건지 씩씩해 보이기 위해 노력한 건지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어요.
유선 씩씩한 모습도 분명히 있지만, 타고난 씩씩함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씩씩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죠. (웃음) 지금도 여전히 그래요. 당찬 면모도 있지만, 저와 정말 가까운 사람들은 제게서 여린 모습을 찾아내죠.
박혁권 그럼 내가 사람을 잘 본 거네. (웃음)
오랜만에 다시 만나 함께 연기해 보니 어떤가요?
박혁권 처음 공연 제안을 받았을 때는 유선이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몰랐었어요. 그 후에 소식을 듣고 정말 반가웠어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처음 만났던 시절의 기억도 났고요. 다시 만난 게 정말 신기해요. 사실 아직은 연습 중이고, 대본 숙지가 우선인 상황이라, 공연 개막하고 무대에서 직접 호흡을 맞춰봐야 함께 연기한다는 실감이 날 것 같아요.
유선 <러브레터>는 기억을 넘나드는 작품이잖아요. 오빠와 저도 오래전부터 추억이 있는 사이이니, 그 추억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어요. 같이 연습을 하고, 호흡을 맞추면서 느껴지는 안정감도 좋더라고요.
<러브레터>는 약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공연돼요. 관객이 이 작품을 꼭 봐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씩 꼽아본다면요.
유선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누군가를 좋아했던 추억이 있잖아요. <러브레터>는 그 추억의 일기장을 한 페이지 들춰보는 느낌이에요. 공연을 보며 나의 추억과 맞닿은 부분을 발견하는 순간, 그 시절의 아련한 감정이 떠오르면서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실 거예요. 따사로운 봄에 어울리는, 따뜻한 정서적 충전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박혁권 유선 씨가 말한 것처럼, 관객분들도 공연을 보시면서 각자의 추억을 분명히 떠올리게 되실 거예요. 작품이 두 사람이 지나온 50년의 세월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관객분들도 각자가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실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