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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어쩌면 해피엔딩> 클레어, 기꺼이 상처를 선택하는 마음

글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CJ ENM 2024-07-22 1,284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로 나아가는 작품이다. 과거에는 올리버가 산다. 그는 LP와 실 전화기, 종이잡지와 ‘병팔이’라는 수고스러움 끝에 얻어지는 행복을 추구한다. 오래전 헤어진 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따르고, 그와 재회할 날만을 위해 사는 존재. 현재에는 클레어가 산다. 호기심이 있고 무엇이든 지금 당장 시도하는 걸 즐긴다. 지루한 삶 대신 행동하는, 생기 넘치는 존재. <어쩌면 해피엔딩>은 과거와 현재만 있던 올리버와 클레어가 마주하며 시작된다. 이들은 자신 안의 세상을 나와 미래를 상상하고 ‘함께’를 선택하는 결말에 이른다. 로봇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따뜻하고 뭉클한 아주 보통의 멜로드라마다.

 

하지만 클레어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어쩌면 해피엔딩>은 ‘자기방어’의 이야기다. 그는 삶의 유한성을 온몸으로 체득하기에 현재를 산다. 수리가 어려워지는 낡은 부품들, 몇 남지 않은 헬퍼봇 친구들, 사라지는 기억들이 그를 괴롭힌다. 클레어는 슬퍼하는 대신 현실을 바라본다. “어차피 똑같은 결말”이라고 합리화하고, “슬퍼할 이윤 없다”고 감정을 외면하며, “괜찮을 거”라는 주문을 건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게 미래라면, 현재의 가능성에 집중하자는 의도다. 그러니 관계에서는 평온을 깨지 않을 만큼의 거리가, 일상에서는 언제든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이 중요해진다. “원래 이게 이런 거야”라거나 “영원한 것은 없어”처럼 클레어의 문장들이 단정적인 것 역시, 이별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현존’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의 심각성을 부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클레어의 모습이 얼핏 과장되거나 부자연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가 로봇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그늘을 감추려 애쓰기 때문이다. ‘평온’을 가장한 외로움, 상처로 남은 설렘, 나와 같지 않은 마음에 대한 서운함, 시작의 두려움, 끝의 슬픔은 오로지 혼자일 때만 드러난다.

 

클레어는 표현하지 않을 뿐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과 감정 모두를 인지하기에 누구보다 빠르고 섬세하게 사랑의 징조를 알아챈다. 설렘과 즐거움, 편안함과 안정감, 공통점을 발견하고 비밀을 공유할 때의 희열을 말이다. 사랑의 여러 얼굴을 알고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클레어의 모습은 그래서 슬프다. 씁쓸한 미소에는 사랑을 향한 깊은 갈망과 사랑으로 인한 상처가 공존한다. 그렇기에 클레어는 필연적으로 반딧불이를 사랑하게 된다. 이르게 생을 마감하더라도 스스로 빛을 내는 생명. 클레어는 반딧불이를 통해 ‘헬퍼봇’을 넘어 나로서 존재하고 싶은 욕망과 곧 사라질 미래의 두려움을 마주한다. ‘현존’하기에 아름다운 찰나의 기쁨으로 두려움을 잠시 잊고, 짧아도 선명하게 기억될 누군가를 기대하면서.

 

 

막연한 기대를 확신으로 바꿔준 이는 인간 제임스다. 클레어는 제임스를 ‘친구’로 부르는 올리버에게 끝까지 그는 ‘주인’이며 올리버를 ‘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임스는 올리버를 오래도록 잊지 않고 그를 위해 LP를 남김으로써 ‘친구’임을 증명한다. 클레어는 이제 믿는다. 자신을 지켜줬지만 꾸준히 의심했던 오래된 자기방어가 틀렸다는 것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마음이 없다는 것을 배웠지만, 지우지 않는 마음의 존재도 사람으로부터 배운 셈이다. 클레어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외면해온 마음을 비로소 마주하고, 기꺼이 사랑으로 상처받기를 결심한다. 깊은 마이너스에서 시작된 용기가 클레어를 빛낸다. 물론, ‘기억 삭제’라는 마지막 선택이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을 지웠든 아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믿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클레어는 아마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삶의 방식을 가장 섬세하게 드러낸다. 제임스와 올리버는 서로를 오래도록 잊지 않는 것으로, 클레어와 올리버는 취약한 서로를 돌보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한다. 사랑은 더 넓은 세계를 열고,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나를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효율과 각자도생의 시대에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장 클래식한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오래도록 잊고 있던 게 이것이 아니었는지 묻는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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